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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 전차전 격전지…승패 떠난 전사들의 안식처

기사입력 2020. 11. 20   17:24 최종수정 2020. 11. 22   13:08

71 이집트의 엘 알라메인 전쟁 묘지 

이탈리아 이집트 침공… 독일 지원
수에즈 운하 소유 영국과 격돌
추축국 롬멜-영연방 몽고메리
북아프리카 전선 운명 걸고 일전
31만여 명 중 6만7000여 명 전사
인근에 전쟁 박물관 1956년 개관

엘 알라메인 전쟁 묘지 전경.크게 영연방 묘지와 독일·이탈리아 묘지로 나뉘어 있다.  사진=www.travelishtours.com

롬멜 장군

몽고메리 장군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북서쪽으로 240㎞ 떨어진 곳에 있는 엘 알라메인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연합국과 추축국(樞軸國·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과 싸웠던 나라들이 형성한 국제동맹) 간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 엘 알라메인 전투가 벌어졌던 전장이다. 1942년 7월부터 11월까지 영연방(영국을 중심으로 지난날 영국의 식민지였던 여러 자치공화국)과 독일·이탈리아 등 31만여 명이 이 사막에서 혈투를 벌였다. 엘 알라메인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전사한 전몰장병의 무덤이 모여 엘 알라메인 전쟁 묘지(El Alamein War Cemeteries)가 됐다.



영국 수에즈 운하 이권 개입 이집트 보호국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의 시나이반도 서쪽에 건설돼 지중해의 포트 사이드 항구와 홍해의 수에즈 항구를 연결하는 세계 최대의 운하로 1869년 11월 17일에 개통됐다. 1875년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이권에 개입해 이집트가 보유한 주식을 매입했다. 1882년 이집트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영국은 이들을 진압한 다음에 수에즈 운하 보호를 이유로 이집트 정부를 장악했다. 1914년 영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던 이집트가 1922년 2월 28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이집트 왕국을 세웠지만 수에즈 운하는 여전히 영국 소유로 있었다.



이탈리아 무솔리니1940년 이집트 침공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전쟁의 불씨는 유럽뿐만 아니라 이집트까지 번졌다. 히틀러와 동맹을 맺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1883~1945)는 옛 로마제국처럼 대제국을 건설하고자 1940년 9월 이집트를 침략했다. 히틀러와 아무런 협의도 없는 데다 전략이 부재했던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군은 도리어 연합군의 반격을 받아 곧 패배하고 말았다.

사실 북아프리카는 히틀러와 연합군에게 지중해를 장악하는 요충지였으나 양측의 사활을 결정할 만큼 중요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맹국의 패배를 마냥 지켜만 볼 수 없었고 알렉산드리아 항구와 수에즈 운하가 걸려 있었기에 독일군은 북아프리카 전선에 뛰어들게 된다. 히틀러는 1941년 2월 에르빈 롬멜(1891~1944) 장군이 이끄는 1개 기갑 군단을 아프리카에 파견해 리비아 주둔 이탈리아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롬멜이 오기 전까지 북아프리카에서 10개의 이탈리아 사단은 2개 사단밖에 되지 않는 영국군 총사령관 웨이블(1883~1950) 대장이 이끄는 병력에 격퇴됐고, 해상에서는 커닝햄(1883~1963) 제독의 지중해 함대가 이탈리아 해군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롬멜이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에 도착한 이후 전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은 영국의 사막 군단을 제압하며 눈부신 속도로 진격했다. 영국군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서쪽으로 106㎞ 떨어진 엘 알라메인까지 퇴각하기에 이르렀다.



연합국-추축국 두 차례 전투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연합국과 추축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엘 알라메인 전투는 두 번에 걸쳐 치러졌다. 1차 엘 알라메인 전투는 1942년 7월 1일부터 7월 21일까지 벌어졌는데 전술상 무승부로 그쳤으나 전략 측면에서는 연합군이 승리했다. 버나드 몽고메리(1887~1976) 장군이 이집트 주둔 영국 제8군 사령관으로 새로 부임하면서 롬멜과 몽고메리의 별칭을 딴 ‘여우와 생쥐’의 대결로 관심을 모은 2차 엘 알라메인 전투가 1942년 10월 23일부터 11월 4일까지 펼쳐졌다.

독일과 이탈리아군의 병력은 11만6000명, 전차는 547대였다. 반면 영연방 군의 병력은 19만5000명으로 두 배 가까이 됐고 전차 역시 1029대로 2배가 넘는 규모였다. 더욱이 롬멜이 재발한 지병 치료를 위해 독일로 잠시 귀국한 사이에 10월 23일 전투가 시작됐다. 롬멜이 서둘러 돌아왔지만 물량 공세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 되면서 결국 영연방 군의 승리로 기울어졌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2만7000여 명, 독일·이탈리아군은 4만여 명이 전사했다.



영연방과 독일·이탈리아 묘지로 나뉘어

엘 알라메인 전쟁 묘지는 크게 영연방 묘지와 독일·이탈리아 묘지로 나뉘어 있다. 엘 알라메인 전투와 그 외 북아프리카 전투에서 전사한 이들이 묻혀 있다. 영연방 공동묘지에는 7200명이 넘는 영연방 군인의 유해가 있으며, 그중 약 800명은 신원 불명이다. 유해가 화장된 600명 이상의 사망자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함께 서 있다. 이곳에서 해안 도로 건너편에 5200명의 군인이 매장된 이탈리아 묘지와 4200명의 군인이 잠들어 있는 독일 묘지가 있다.

엘 알라메인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영연방 묘지 인근에 엘 알라메인 전쟁박물관이 1956년에 개관했다. 박물관 내부는 영국, 이집트, 이탈리아, 독일, 중앙 전시실 등 5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이곳에서 2012년 10월 20일 엘 알라메인 전투 7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엘 알라메인 전쟁 묘지는 영연방 국가와 독일·이탈리아 군인들의 안식처로서 전쟁의 승리와 패배를 뒤로하고 전사들이 영원히 잠들어 있다. <이상미 문화·예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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