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전쟁 70주년, 대중가요로 본 6.25전쟁

1950년대 버스엔 “오라이” 외치는 여차장 있었다네

입력 2020. 11. 20   16:16
업데이트 2020. 11. 20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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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1956 시골버스 여차장
작사 윤부길 /작곡 한복남 /노래 심연옥 


당시 시골길은 대부분 비포장도로
타이어 펑크 나면 2~3시간 연착 일쑤
버스 안에서 아기 출산하는 일도
그 시절 대중교통 상황 그대로 담겨


길거리에서 흥얼흥얼 따라 부르는 유행가는 시대의 산물이다. <시골버스 여차장>만큼 1950년대 후반의 대중교통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한 게 있을까? 그 시절, 덜컹거리는 버스를 세우고 아기를 출산하고, 타이어가 펑크 나서 2~3시간을 비포장도로 길가에서 무작정 기다리기도 했다. 신랑 각시가 사모관대(紗帽冠帶)에 족두리를 쓰고 친정과 시댁을 왕래했던 교통수단이다. 이 노래는 6·25전쟁 휴전 3년 차에 탄생한 곡이다. 이 노래 속의 버스 운전기사는 제대 병사다. 이 노래 가사에 등장하는 버스 기사는 6·25전쟁 참전 용사일 가능성이 높다. 노랫말 속의 여차장(女車掌)이라는 용어와 직업도 먼 옛날의 진품명품 같은 푸근함과 구수함이 배어 있다.

우리나라의 운송수단은 6·25전쟁을 전후하여 우마차에서 자동차로 전환된다. 대중운송도 처음에는 트럭을 이용하다 버스로 발전한다. 노랫말은 너무도 적확하다. 1931년 10월 15일 조선일보 기사는 ‘대도회의 구사자, 버스 걸의 고-스톱’이란 기사를 실었다. 1928년 경성부청에서 20인승 대형버스 10여 대를 들여와 서울 시내에 투입하고, 1931년부터 버스 걸(차장)을 고용하였다. 1931년 경성부 버스, 경인버스, 경성유람버스에 버스 걸이 있었다. 지원자는 모집정원의 3배를 초과하는 경쟁률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16~19세 미혼녀로 독본(讀本, 글 읽기)·산술·상식·신체검사·구술시험을 거쳤고, 월급은 30~40원이었다.

1950~60년대 시골버스 여차장들은 거의 버스에 매달린 상태로 출발하고 내렸다. 표 가방을 허리춤에 차고 ‘오라잇, 스톱’을 외쳤다. 광복 후 잠시 남자들이 등장했었다. 그러다가 1961년, 안내양 제도가 재도입된다. 그녀들은 차 옆구리를 ‘탕탕~’ 치면서 ‘오라이~’를 외쳤다. 그 당시 버스는 중간에 문이 하나만 있었다. 그 문으로만 사람들이 타고 내려야 했기 때문에 기사가 돈을 받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더욱더 버스 안내양이 필요했다. 그 시절 버스요금은 일반 35원, 학생 25원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오라이~’ 말 대신 정차, 발차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국어순화운동의 일환이었다.

버스 안내양이 처음 탄생했을 때는 월급제가 아닌 시간제로 급료를 받았다. 1970년대에도 일당으로 임금을 받았다. 일은 이틀, 사흘 일하고 하루 쉬는 정도였다. 사람이 모자랄 때는 5일씩 연달아서 일하기도 했다. 보통 출근은 아침 5시에 하고 밤 11시에 퇴근했다. 막차를 탈 때는 그것보다 두 시간 정도 늦게 출근해서 자정 넘게까지 일했다. 요즘 법정근로시간 주 52시간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1980년대 대우가 좋아져 겨울에는 방한복이 지급되기도 했다. 버스에 앞문이 생겨서 손님들이 앞문으로 타고 뒷문으로 내리게 되었다. 27세 정도가 되면 퇴직했다. 1980년대 전반 기준이다. 이른바 나이가 많으면 정리해고를 당한 것이다. 1985~1986년 버스 안내양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1989년 안내원을 태우도록 규정한 ‘자동차운수사업법 33조’가 삭제됨으로써 버스 안내양의 역사는 기록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버스 문도 앞뒤로 두 개로 바뀐다.

<시골버스 여차장> 노랫말을 지은 윤부길(尹富吉)은 1912년 충남 보령에서 출생해 1957년 46세로 세상을 등진 만능엔터테이너다. 작사가·성악가·뮤지컬배우·코미디언·쇼단장을 역임했다. 슬하 자녀 중 윤항기와 윤복희가 가수로 활동하고 있다. 부인은 천재 무용가 최승희 제자로 고향선이라는 예명을 쓴 고전무용가 성경자다. 윤부길은 일본 유학 중 박용구·황문평 등과 함께 컬럼비아가극단에서 활동했고, 가극단 공연을 할 때마다 희극적인 연기를 하여 우리나라 최초 개그맨이라는 평을 들었다. 성악·시나리오 집필·작곡·반주·의상·무대장치에도 능했다. 윤부길악단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결성된 조선가극협의회 산하단체 라미라가극단·무궁화악극단·박시춘악단·반도가극단·백조가극단·새별악극단·신세계가극단·자유악극단·조선악극단·태양가극단·태평양가극단·희망가극단과 함께 대중음악발전에 이바지했다.

작곡가 한복남은 1919년 평안도 안주에서 출생해 1943년 <빈대떡 신사>로 데뷔(데뷔 연도에 대한 다른 설이 있음)했다. 그는 광복 직후 38선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온다. 이때 무리를 지어 38선을 따라 넘어온 사람들을 38따라지라고 한다. 공산 치하를 떠나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했던 것. 그가 김해송이 운영하는 주한미군위문공연단체인 KPK악단(1945년 후반기 창단)에 입단한 것은 1947년, 이후 3년 만에 6·25전쟁을 맞게 된다. 그는 전쟁 중 피란지 부산에서 재봉틀가게를 차려서 돈을 벌었고, 이 재산으로 도미도레코드사를 설립했다. 그는 음악교육을 정식으로 받은 적은 없으나 특별한 소질로 많은 히트곡을 냈다. 이때 현인·손인호·금사향·한정무·심연옥을 도미도에 전속시켜 <홍콩아가씨>, <꿈에 본 내 고향>, <백마강> 등 많은 곡을 히트시켰다. 그 이후에도 신민요풍 노래 <처녀 뱃사공>, <오동동타령>, <봄바람 님 바람>, <한 많은 대동강>, <님> 등은 6·25전쟁 후 인기를 지속했다. 1960년대에는 자작곡 <엽전 열닷 냥>으로 인기 절정을 누렸으며, 라라레코드·아세아레코드·오아시스레코드 등에서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후 1970년대까지 방송활동을 하다가 1991년 1월 26일 73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만요(희극적인 풍자곡) 같은 해학적인 가사와 특유의 창법으로 대중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가수 심연옥은 1929년 서울 출생으로 1947년 KPK악단에서 활동했으며, 6·25전쟁 당시 대구로 피란, 오리엔트레코드에서 금릉인 작사, 손목인 작곡, 김백희 노래 <안해의 노래>를 유호가 개사한 <아내의 노래>로 취입했다. 또 1952년 <한강>(손로원 작사, 최병호 작곡)을 취입했고, 반야월이 불로초라는 필명으로 작사해 1954년에 발표한 <야래향> 등 히트곡을 남겼다. 1957년 가수 백년설과 결혼(재혼)하면서 가수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197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 현재 미국 뉴저지에 거주하고 있다.
<유차영 한국콜마 여주아카데미 운영원장/예비역  육군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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