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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이면… 역사를 만든 ‘숨은 주역’들

입력 2020. 11. 18   16:53
업데이트 2020. 11. 18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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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2주-쿠바 미사일 위기와 전쟁을 막은 사람들

소련,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 건설
미국, 대규모 함대 동원해 봉쇄
양측 지휘관 선제공격 요구에도
흐루쇼프, 결국 기지 철수 발표 

 
소련군 추격 필사적 탈출 U2 조종사
핵어뢰 발사 거부한 소련군 장교
수많은 개인 행동이 핵전쟁 막았다


1962년 10월의 미·소 충돌 위기 2주를 다룬 영화 ‘D-13’(1996)의 한 장면.  필자 제공
1962년 10월의 미·소 충돌 위기 2주를 다룬 영화 ‘D-13’(1996)의 한 장면. 필자 제공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회의 중인 케네디 대통령(왼쪽)과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  필자 제공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회의 중인 케네디 대통령(왼쪽)과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 필자 제공
미국 기자 마이클 돕스의 저서 『1962』(모던아카이브·2019).
미국 기자 마이클 돕스의 저서 『1962』(모던아카이브·2019).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셀런 M.스턴의 저서 『존 F. 케네디의 13일』(모던타임스·2013).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셀런 M.스턴의 저서 『존 F. 케네디의 13일』(모던타임스·2013).


1962년은 냉전 역사를 통틀어 미·소의 충돌 가능성이 가장 큰 해였다. 베를린을 둘러싼 긴장은 베를린 장벽 설치로 이어졌고, 미국이 터키에 미사일을 배치하자 소련은 1956년 헝가리의 민주화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등 미·소의 갈등은 고조됐다. 1960년, 미국의 고공정찰기 U2가 소련 영공에서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소련은 적극적인 압박전략을 모색했다. 미국이 절대적 우위를 점한 핵미사일 전력 차이를 만회할 방편을 찾던 소련은 미국 바로 앞의 섬나라 쿠바를 주목하게 된다. 반군을 이끌던 카스트로는 혁명가 체 게바라와 손잡고 쿠바의 친미정권을 전복시켜 공산화에 성공했다. 미국의 근거리에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서자 소련은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1962년 여름부터 쿠바에 핵미사일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곡물을 나르는 화물선으로 위장한 소련의 배들이 연일 쿠바로 향하는 것을 포착했지만, 처음에는 단순한 교역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정찰기에서 찍은 사진에 핵미사일 탄두와 발사대가 선명하게 드러나자 사태는 급변했다. 미국 정부에는 바로 비상이 걸렸다.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 해안 봉쇄를 명령했고, 군은 선제 폭격과 쿠바 점령 계획을 추진했다. 1962년 10월 22일, 케네디는 TV 연설로 이 사실을 국민에게 알렸고, 핵무기가 쿠바에 배치되는 사태를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막겠다고 선언했다. 핵으로 무장한 미군 전투기들이 속속 집결했고, 미국 해군은 항공모함 8척을 비롯해 90여 척의 대규모 함대를 동원해 쿠바를 봉쇄했다. 세계의 눈은 쿠바로 쏠렸다.

소련 서기장 흐루쇼프는 당황했다. 당시 소련의 핵전력은 미국보다 열세에 놓여 있었다. 흐루쇼프는 1961년 열린 빈 회담에서 케네디와 만난 적이 있었다. 자신보다 23살이나 어린 케네디를 ‘지나치게 여리고 지적’이라고 파악한 흐루쇼프는 강한 허세로 미국의 양보를 얻어내고자 했다. 소련의 핵전력을 과장해 ‘공포의 균형’을 유지하다가 최소한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양보를 얻어낸다는 것이 흐루쇼프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봉쇄와 호전적인 양측 지휘관들의 준동으로 핵전쟁 위기에 몰렸다. 특히 미국 공군참모총장 커티스 르메이는 과감한 선제공격을 거듭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핵폭탄이 투하된 히로시마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낳았던 ‘도쿄 대공습’의 주역인 르메이는 주저하는 케네디에게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반대편의 카스트로도 흐루쇼프에게 연일 선제공격을 요구했다.

10월 27일, 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쿠바를 정찰하던 U2기가 소련군에게 격추되고 조종사가 사망했다. 그리고 북극 지역에서 통상적인 정찰 비행을 하던 다른 U2기가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에 진입했다. 소련 방공부대가 U2기를 핵무장 폭격기로 오인해 먼저 공격을 감행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B-59를 비롯한 소련 잠수함 몇 척이 수면으로 부상해 미군 구축함과 대치하고 있었다. 만약 미국이 쿠바를 점령하면 소련은 베를린을 점령할 것이고, 그것은 곧 제3차 세계대전을 의미했다. 공포에 젖은 유럽에서는 연일 반전 시위가 벌어졌다. 10월 28일, 케네디에게 친서를 보낸 흐루쇼프는 라디오 방송으로 미사일 기지 철수를 발표했다. 라디오 방송을 소련의 기만술로 파악한 미국 각료들은 침공을 계속 주장했지만, 소련 함정들이 뱃머리를 돌리자 케네디도 봉쇄를 풀었다. 이를 계기로 미·소 정상 사이에 핫라인이 구축됐고, 세계는 겨우 위기를 넘겼다.

쿠바 미사일 위기의 이면에는 주목받지 못한 조연들이 있었다. 북극 항로를 비행하다가 실수로 소련 영공에 진입한 U2기 조종사 찰스 몰츠비는 소련 전투기들의 추격을 받으면서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같은 날 쿠바에서 U2기가 격추됐으므로, 몰츠비까지 격추됐다면 아마도 전쟁은 알래스카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한국전쟁 때 중국군에 붙잡혀 600일이 넘는 포로 생활을 겪은 베테랑 조종사 몰츠비는 활강비행까지 감행하면서 무사 귀환에 성공했다. 한편 미국 구축함의 폭뢰 공격을 받은 소련 잠수함 B-59의 사비츠키 함장은 핵 어뢰 조립을 명령했다. 통신장비 고장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던 사비츠키는 전쟁이 이미 시작됐을지도 모른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어뢰통제장교 아르키포프의 반대로 핵 어뢰는 발사되지 않았다. 공군참모총장 르메이의 폭주를 막은 것은 국방부 장관 맥나마라와 법무부 장관 로버트 케네디, 케네디의 오랜 친구였던 보좌관 케네스 오도넬이었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1964)에서 신랄하게 풍자한 전쟁광 ‘터짓슨’은 바로 르메이를 모델로 삼은 캐릭터였다.

무엇보다도 케네디는 마지막까지 인간적인 고뇌를 멈추지 않은 지도자였다.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얻을 승리에 매혹되지 않았고, 반대편 세계에 앉은 두 사람이 인류 문명을 종식시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직시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만큼 많이 연구되고 분석된 역사적 사건은 드물다. 수많은 언론 기사, 다큐멘터리, 논문, 강의, 영화 등이 1962년에 벌어진 위기를 다뤘다. 사람들은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에 논리와 필연을 부여하길 좋아한다. 그러나 역사는 결국 수많은 개인의 행동으로 이뤄진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전쟁을 막고자 애쓴 사람들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
<이정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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