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고

[이승진 기고] 본질을 사유하라

입력 2020. 11. 17   16:30
업데이트 2020. 11. 17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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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 진 육군 32사단 공보정훈참모·중령
이 승 진 육군 32사단 공보정훈참모·중령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이스라엘 정보부에 의해 체포되고, 예루살렘으로 압송돼 재판을 받았다. 유대계 독일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재판을 참관하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피에 굶주린 살인마나 잔인한 악당의 모습이 아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뿔테안경의 왜소한 중년 남성이 재판 과정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위에서 시킨 대로 했을 뿐”이라는 진술만 반복하는 천박함에 충격을 받은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개념화하며, “사유하지 않는 천박함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결론 내렸다.

1961년 예일대 심리학 교수 스탠리 밀그램은 ‘권위에 의한 복종’이라는 실험을 했다. 이를 위해 밀그램은 ‘징벌에 의한 학습효과’라는 위장 실험을 계획하고 참가자들에게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처음 15V부터 마지막 450V까지 조금씩 전압을 높이며 전기충격을 가하도록 했다. 물론 학생 역할을 하는 사람은 배우였고, 전기충격 장치도 가짜였다. 장치에는 300V 이상은 위험하다는 표시가 있었고, 300V에 도달한 순간부터 학생은 비명을 지르고 가슴 통증을 호소하다가 400V 이상 전기충격에는 마치 죽은 듯이 반응하지 않는 연기까지 했다. 실험 중간에 불편해하는 참가자들에게 밀그램은 단순히 실험을 계속할 것을 지시했고, 결국 65%의 사람들은 끝까지 지시를 따랐다. 밀그램은 실험을 통해 인간이 비도덕적인 명령에 복종하는 이유는 사람의 ‘성격’보다는 그가 처한 ‘상황’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권위에 의한 맹목적인 복종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의사와 환자, 상사와 부하, 교사와 학생, 교주와 신도, 부모와 자식 등의 관계 상황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발생하며, 사회에 많은 해악을 끼치곤 한다. 군대는 계급에 따른 명령-복종 관계가 일상화된 곳이다. 맹목적인 복종에 습성화된 사람들은 임무 수행에 대한 이유를 물으면, 흔히 “상관이 시켜서”, “상급부대 지침이기 때문에”라고 답한다. 이는 조직 문화와 시스템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본질에 대한 사유를 멈추는 것이다.

이런 구성원이 많을수록 조직은 본질과 점점 멀어지게 된다. 본질을 잃어버린 조직은 결국 사회에 해악을 끼치며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본질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인간은 상황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상황을 지배해 나가는 주인으로서의 당당함을 지킬 수 있다. 그러한 군인들이 많아질 때, 우리 군은 진정 국가를 방위하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강군으로서 그 존재 이유를 충실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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