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고통을 위로한 음악: 쇼스타코비치와 그의 시대
레닌그라드서 울려퍼진 교향곡
음악으로 아픔 보듬은 쇼스타코비치
스탈린 치하, 예술·정치서 외줄타기
‘시대의 고통’ 음악으로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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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인 쇼스타코비치는 1919년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면서 젊은 작곡가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제정 러시아가 무너졌으나 그는 ‘인민을 위한 혁명’에 수긍했다. 그는 서민들의 생활을 음악에 담고자 노력했고, 혁명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장송곡도 만들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집권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스탈린은 의심 많은 독재자였다. 모든 독재자가 그러하듯이 스탈린도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예술 텍스트에 예민했고 음악과 미술, 영화·연극, 문학 등을 집요하게 감시했다. 마치 공장에서 생산량을 할당하는 것처럼 예술 작업을 지시했고, 조금이라도 실험적인 시도를 하는 예술가들은 ‘형식주의자’로 몰렸다.
쇼스타코비치가 작업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 상연되자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문예면에 신랄한 비평문이 게재됐다. 음악이 ‘재즈’와 비슷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연상하게 한다는 것이 비판의 근거였다.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을 전혀 모르는 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난도질하는 사실에 분개했지만 ‘프라우다’에 맞서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고민하던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음악을 아끼는 투하쳅스키 원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투하쳅스키는 반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숙청됐고, 쇼스타코비치도 심문을 받았다.
투하쳅스키가 어떤 정치인과 연루됐느냐는 질문에 쇼스타코비치는 “정말 모른다”고 답했지만 심문관 자크렙스키는 “무조건 기억해야 한다”고 협박한다. 없는 기억을 자백하라는 황당한 강요였지만 불복하는 자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자크렙스키의 심문을 받은 날부터 몇 달간 쇼스타코비치에겐 밤마다 가방을 들고 아파트 계단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습관이 생겼다. 끌려가는 모습을 가족에게 보이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된 습관이었다. 이 장면은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쓴 줄리언 반스의 소설 『시대의 소음』(2017)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자포자기한 쇼스타코비치는 스스로 내무부를 찾아가지만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다. 그 며칠 사이 자크렙스키도 숙청된 것이다. 이 겹겹의 감시체제에 걸려 투하쳅스키를 비롯해 부하린, 마야코프스키 등 수많은 지식인, 장교, 예술가들이 죽임을 당했다.
몇 년 후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쇼스타코비치는 애국심을 담은 곡과 죽은 자를 애도하는 곡을 만들었다. “인민들과 함께 있어야 했고, 궁지에 몰린 조국의 이미지를 만들어서 음악에 새기고 싶었다”는 뜻이 반영된 작업이었다. 종전 후 모스크바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됐지만, 당의 기계적인 검열이 계속됐다. 문화부 장관 즈다노프는 예술의 가이드라인을 설정(‘즈다노프 선언’)했고 쇼스타코비치도 정부가 제시한 주제를 담은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1949년 4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 평화를 위한 문화와 과학대회’에 소련 대표로 참가한 쇼스타코비치에게 미국 언론들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미국에는 니콜라스 나보코프, 스트라빈스키 등 망명한 러시아 음악가들이 있었고, 동·서 냉전이 시작된 시기였으므로 그들은 쇼스타코비치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질문의 핵심은 간단했다. ‘당신은 스탈린 체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들이 ‘즈다노프 선언’과 ‘프라우다’의 비평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쇼스타코비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프라우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답하면서 망명한 스트라빈스키를 “자본주의의 하수인”이라고 비판했다. 그 원고는 쇼스타코비치가 쓴 것이 아니었다. 쇼스타코비치가 미국에서 겪을 상황을 예측한 소련 정부는 이미 예상 질문과 답변을 마련했다.
쇼스타코비치는 회고록에서 이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탄식했다. “젊은 시절 가장 경멸했을 모습으로 늙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라고. 그리고 이 고통이야말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이 ‘시대의 소음’을 이기고 살아남게 한 힘이었다. <이정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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