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겨울왕국’ 모티브 된 동화 같은 성의 굴곡진 역사

입력 2020. 10. 23   17:01
업데이트 2020. 10. 23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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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노르웨이의 아케르스후스 요새 

 
중세에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의 성채
1299년 건립 후 수차례 공격 견뎠지만
2차 대전 나치 독일군에 점령 당해
노르웨이 저항군 처형 장소로 사용
전쟁 끝난 후 부역자 감옥으로 쓰여
지금은 평화 전시하는 역할 전환

아케르스후스 요새 전경.  출처=www.nordicexperience.com
아케르스후스 요새 전경. 출처=www.nordicexperience.com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 있는 아케르스후스 요새(Akershus Fortress)는 중세에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의 성채이다. 이곳은 1299년 호콘 5세에 의해 건립돼 여러 시대에 걸쳐 수차례의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노르웨이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며 처음으로 점령당했다. 독일의 점령하에 노르웨이 저항군을 처형하는 장소로 쓰였으며, 전쟁이 끝나고 나치에 부역한 이들을 가두고 처형하는 감옥으로 사용됐다. 나치의 편에 서서 노르웨이를 다스렸던 비드쿤 크비슬링을 비롯한 8명이 이곳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현재 노르웨이 총리의 임시 사무실로도 사용된다. 디즈니의 유명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 나오는 아렌델 왕국이 이곳을 모델로 했다.



호콘 5세가 오슬로를 지키기 위해 1299년부터 세워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있는 노르웨이는 북극해와 노르웨이해를 끼고 있고, 국토의 절반이 북극권에 속해 매우 거칠고 험한 지형이다. 나라 대부분은 스웨덴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북쪽은 핀란드, 동쪽은 러시아, 남쪽은 덴마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노르웨이(Norway)는 ‘북쪽으로 가는 길’이라는 뜻으로 남쪽에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항해하는 길에서 유래됐다. 북유럽 전설인 노르세 이야기에 의하면 오슬로는 1049년 하랄 3세(1015~1066)에 의해 건설됐다고 전해진다. 호콘 5세(1270~1319)는 오슬로를 노르웨이의 수도로 여겼다. 왕은 주변국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1299년부터 아케르스후스 요새를 건립하도록 해서, 이곳은 1300년경에 완공됐다.

1945년 5월 11일 노르웨이 저항 운동가인 테르예 롤렘(맨 왼쪽)이 독일 가니슨 사령관 요제프 닉터라인(가운데) 소령과 그의 보좌관 요하네스 하멜에게서 요새 지휘권을 넘겨받고 있다.  출처=www.nb.no
1945년 5월 11일 노르웨이 저항 운동가인 테르예 롤렘(맨 왼쪽)이 독일 가니슨 사령관 요제프 닉터라인(가운데) 소령과 그의 보좌관 요하네스 하멜에게서 요새 지휘권을 넘겨받고 있다. 출처=www.nb.no


1308년부터 주변국 포위공격 모두 막아내

요새는 워낙 튼튼하게 지어진 데다가 바다와 가까이 있어 해상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유리한 지형에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의 포위 공격을 잘 버텨냈다. 이곳은 1308년 스웨덴의 왕자 에릭 마그누손(1282~1318)이 포위당했을 때 처음 전투에 사용됐다.

노르웨이는 1397년부터 400여 년간 덴마크 영토의 일부로 속하게 된다. 스웨덴의 왕 카를 크누트손 본데(1408~1470)가 1449년부터 1450년에 걸쳐 요새를 다시 포위했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1502년 스코틀랜드군이 노르웨이의 귀족 크누트 알바손(1455~1502)의 손에서 성을 되찾기 위해 포위했지만 이 역시 실패로 그쳤다. 요새는 1523년 다시 스웨덴군에 의해 포위됐지만, 이번에는 오슬로 주교인 한스 뮬의 지휘로 오슬로 시민들이 그들을 쫓아냈다. 덴마크의 왕이었으나 네덜란드로 추방돼 왕좌를 잃은 크리스티안 2세(1481~1559)가 1531년부터 1532년까지 성을 포위했으나, 덴마크와 뤼베크(독일의 북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에 있는 항구도시)의 군대에 의해 무위에 그쳤다. 그 후 요새는 한층 더 강화됐다.

덴마크가 폴란드, 뤼베크 등과 연합해 스웨덴과 벌인 북유럽 7년 전쟁(1563~1570) 중인 1567년 스웨덴군에 의해 다시 요새가 포위됐지만, 덴마크의 귀족 출신으로 노르웨이의 군 총독을 맡았던 크리스틴 멍크(1520~1579)는 공격자들에게 물자를 받을 수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도시를 불태우는 것으로 대응했고, 결국 스웨덴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624년 오슬로에 대화재가 발생해 요새를 비롯한 도시 곳곳이 불타 버렸다.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4세(1577~1648)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요새를 다시 지었다.

비드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 정부가 런던에 망명해 있는 동안 1942년 2월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 점령하의 노르웨이에서 총리직을 지낸 인물이다. 반역죄로 1945년 10월 24일 아케르스후스 요새에서 총살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크비슬링(quisling)’이 배반자, 반역자, 매국노라는 뜻으로 쓰인다. 
 사진=digitaltmuseum.no
비드쿤 크비슬링은 노르웨이 정부가 런던에 망명해 있는 동안 1942년 2월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 점령하의 노르웨이에서 총리직을 지낸 인물이다. 반역죄로 1945년 10월 24일 아케르스후스 요새에서 총살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크비슬링(quisling)’이 배반자, 반역자, 매국노라는 뜻으로 쓰인다. 사진=digitaltmuseum.no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 나치 독일에 점령

단 한번도 외부의 적에게 점령당한 적이 없었던 요새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싸움도 없이 독일군에 항복하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노르웨이는 중립국으로 남았다. 전쟁 중에 많은 선박이 파괴됐지만, 요새는 포위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노르웨이는 중립을 선언했다. 노르웨이 정부는 독일군의 공격에 맞서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다. 1940년 4월 9일 독일은 덴마크를 점령하고 나서 정부가 비어 있는 노르웨이를 침공했다. 독일은 노르웨이를 해군 부대의 전초기지로 삼아 북대서양에서 연합군을 괴롭히고 스웨덴에서 나르비크 항구를 통해 철광석을 선적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나치는 아케르스후스 요새에서 최대 40명의 노르웨이 저항군을 처형했다. 독일이 미·영 연합군과 소련군에 의해 베를린을 함락당하고 항복한 이후, 요새는 1945년 5월 11일 해방됐다. 이날 독일 점령자들로부터 노르웨이의 저항운동가인 테르예 롤렘(1915~1993)에게 요새의 지휘권이 넘겨졌다. 종전 후 요새는 반역자와 전범자를 가두고 처형하는 장소로 쓰였는데, 나치의 편에 서서 노르웨이를 다스렸던 비드쿤 크비슬링(1887~1945)을 비롯해 8명이 이곳에서 처형됐다.

요새는 연회 등 왕실 행사에 쓰이는 성내 예배당을 비롯해 아케르스후스 성, 레지스탕스 박물관, 군사 박물관, 르네상스 박물관, 하콘 7세와 올라브 5세의 무덤 등으로 구성돼 있다. 성벽은 2단 형태로 높이는 15~20m이다. 레지스탕스 박물관은 2차 대전 중 독일의 점령에 저항했던 노르웨이인들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돼 1966년 개관했다. 매일 오후 1시30분 위병 교대식이 거행된다. 아케르스후스 요새는 오랜 전쟁을 마무리하고 평화를 전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상미 문화·예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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