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한국전쟁 70주년, 대중가요로 본 6.25전쟁

전쟁 27년 후 울려퍼진 살아남은 전우의 ‘비가(悲歌)’

입력 2020. 09. 25   13:09
업데이트 2020. 09. 25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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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1977 전우가 남긴 한마디-작사·작곡 전오승/ 노래 허성희 


 
작사·작곡가 전오승, 전사한 동생·순직 용사들 위해 만든 곡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유행가… 매년 6월이면 많이 불려져


<전우가 남긴 한마디>는 6·25전쟁이 발발하고 27년 후에 불린 유행가다.

전우(戰友)는 전쟁터의 벗이다. 네가 먼저 적군의 총알을 맞으면 내가 살아남고, 내가 그 총알을 먼저 맞으면 네가 산다. 그런 목숨을 담보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전우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이렇게 유명을 달리한 전우는 16만여 명이다. 그중 12만여 명의 유해(遺骸)는 아직도 우리나라 이 고지 저 능선에 잠든 채 조국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남긴 마지막 한마디를 유행가로 엮었다. 6·25전쟁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24년, 성음제작소 음반 SEL-100049에 실린 <전우가 남긴 한마디>. <전우가 남긴 한마디>는 통곡(痛哭)이다. 이 노래는 살아남은 자의 비가(悲歌)다. 6·25전쟁 당시 전사·실종자는 16만여 명. 그중 시신을 수습해 동작동 국군묘지에 모셔진 분들은 3만여 위다. 아직도 수습하지 못한 호국영웅들이 땅속에서 조국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이분들을 모셔오기 위해 2000년 6·25전쟁 발발 50주년에 육군이 첫발을 내디뎠다. 이 과업이 2007년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 창설로 본격화된다.

2020년 기준으로 13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이 기간 1만여 위의 호국용사 유해를 모셔왔다. 살아남은 자(살아남은 대한민국)가 전우에게 남긴 한마디(다시 데리러 오마) 약속을 지킨 것이다. 하지만 아직 남은 12만여 위는 언제쯤 귀가국선(歸家國宣)하실까? 이분들을 모셔오는 데는 비례삼불(非禮三不)의 경건한 예우가 수반돼야 한다.

그분들은 오늘도 이 고지 저 능선의 전투 교통호 속에서 경계총 자세로 책임 지역을 방어하며, 망향가(望鄕歌)를 부르고 있다.

‘나는 방랑자/ 그대의 손길을 기다리는/ 외로운 시간여행/ 새소리 바람소리/ 물결 이랑처럼 여울지는 세월/ 파아란 하늘 흰 구름처럼/ 떠돌지도 못하는 붙박이 정처/ 내 살과 피는/ 초가지붕 추녀 끝 고드름처럼 녹아/ 조국의 속 살결을 검붉게 물들였지/ 새파랗게 생동하는/ 대한의 자유처럼/ 강토에 우거진 푸른 수풀들은/ 진창난 내 뼈/ 허물어진 구멍마다에/ 가늘고 질긴 실뿌리를 뻗어/ 자유와 평화의 거목으로 자라났지/ 이제는 고향 같은 거 묻지도 마/ 에둘러 부모형제 이름도 부르지 마/ 두고온 애숭이/ 귓불 앳되던 친구들은/ 두렁바위 언덕 위 노송처럼 늙어가겠지/ 삭고 묵은 내 유골의 고향은 암울진 땅속/ 자유를 자라게 하는 은근한 붉은 흙/ 살점 부서지던 고통의 그날/ 알 수 없던 고요의 날/ 마지막 눈망울 깜빡거리면서/ 바라본 포연 속의 핏빛 하늘/ 바람결에 흩날리던 낙엽이 덮어준 자리.’

이 시는 호국용사님들의 영혼을 위무하는 곡(哭)이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을 지낸 필자의 망자(亡者) 대변시(代辯詩)다.(시집 『끝나지 않은 전쟁』. 2014)

1977년 허성희가 부른 <전우가 남긴 한마디>는 전오승(본명 전봉수·1923~2016·진남포 태생)이 작사·작곡한 12곡 중 타이틀 곡이다.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동생(전기승, 작곡가 전오승의 친동생)과 참전 중 순직한 용사들을 위해 만든 진혼곡(鎭魂曲)이다. 전오승은 이 곡을 남기고 1978년 미국으로 이민 갔다. 전오승은 <백치 아다다>를 부른 나애심(본명 전봉선·1930~2017)의 친오빠다.

허성희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1972년 <앵무새>로 데뷔해 히트곡을 내지 못하고 지내다가 <전우가 남긴 한마디>를 발표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고 이후 <백마> <진정> <마음에 새겨진 결심> 등을 발표했다. <전우가 남긴 한마디>는 매년 6월에 특히 많이 불려진다.

우리나라에서 유명을 달리한 전우가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 국립서울현충원이다. 이곳에는 56개 묘역이 있고, 서편 제2·3묘역이 베트남 참전용사들이 있는 곳이다.

예비역 육군중장으로 타계한 채명신 장군은 화장된 유골로 3.3㎡(1평)의 사병 묘역에 안장됐다. 그(전우)가 남긴 생전의 한마디는 ‘나를 파월 장병 (전우들의) 묘역에 묻어 달라’였다. 1926년 황해도 곡산에서 출생한 채명신 장군은 6·25전쟁 당시 내설악 한계령 일대에서 북한군 유격대 사령관 길원팔(총사령관, 인민군 중앙당 제5지대장, 육군중장)을 생포한 후, 길원팔 스스로 자기 자신의 권총으로 자결하도록 한 백골병단장이었다. 베트남전쟁 때는 주월남한국군사령관을 지냈고 2013년 88세로 타계했다.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는 355위의 예비역 장군 시신이 각 8평의 묘지에 매장돼 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남성과 상당수의 여성은 역전의 군 복무 베테랑이다. 이들의 가슴속에 간직된 단어가 전우다. 전우라는 이름을 들으면 그리움이 묻어나고, 때로는 목이 멘다. <전우가 남긴 한마디> 노래를 읊조리면서 전장(戰場) 혹은 군대에서 만나고 헤어진 전우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자.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과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지켜내고, 함께 가꾸어 온 동반자다.

<전우가 남긴 한마디>는 매년 호국보훈의 달에 널리 불린다.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의 명복을 기원하고 추모하는 국경의 달. 예로부터 6월 6일 망종(芒種)에는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전해 왔다. 고려 시대인 1014년(현종5) 6월 6일에는 조정에서 나라를 지키다가 순국한 장병(將兵)들의 유골을 집으로 봉송해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 아~ 그리운 전우여.
유차영 한국콜마 여주아카데미 운영원장
유차영 한국콜마 여주아카데미 운영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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