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참전단체 릴레이 탐방 리멤버 솔저스

[참전단체 릴레이 탐방] ⑭ 국군간호사관학교 총동문회 <끝>

김상윤

입력 2020. 08. 12   15:54
업데이트 2023. 08. 04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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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으로 뭉친 ‘백의의 천사’…전쟁 속 희망이었다


 전시 간호후보생 교육 길어야 한 달
6·25 기간 치료 부상자만 40만 명
베트남전 등 위험한 의료현장서 활약
생도대 지원·교육 등 다양한 활동도


제40차 국군간호사관학교 총동문회 정기총회에 모인 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총동문회 제공
제40차 국군간호사관학교 총동문회 정기총회에 모인 회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총동문회 제공


6·25전쟁 당시 야전병원은 또 하나의 전장이었다. 부상병들이 물밀듯 밀려들었고, 고통을 호소하는 신음과 단말마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아비규환 속에도 한줄기 따스한 빛은 있었다. 한창 꽃다운 나이에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든 ‘백의의 천사’ 간호장교들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6·25전쟁 기간 간호장교를 비롯한 의료 인력이 치료한 부상자는 무려 40만 명에 이른다. 오늘은 ‘전쟁터의 나이팅게일’로 불리는 간호장교들의 모임 ‘국군간호사관학교(국간사) 총동문회’를 만나본다.

6·25 개전 초기 부상자를 치료할 의료시설 및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육군 의료기관은 5개 육군병원과 1개 요양소뿐이었고, 의료인력은 군의관과 간호장교 250여 명, 위생병과 ‘위생하사관’은 1400여 명 수준이었다.

전시 간호후보생 교육은 길어야 한 달이었다. 10~20일의 속성훈련만 마치고 임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양성된 간호후보생은 6~11기 255명이었다. 일선 부대에서는 부대장 직권으로 민간 간호사를 뽑기도 했다.

이들 역시 간단한 교육만 마치면 즉시 현장에 투입됐다. 간호장교 군번이 없었기에 팔뚝에 ‘○○연대 간호장교’라는 글자를 적어 증명서를 대신했다고 전해진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간호장교 양성이 시급했던 1951년 3월 7일 지금의 ‘국간사’가 문을 연다. 여자의용군훈련소에서 교육 중이던 간호장교 후보생 300여 명이 입교해 총 110명이 임관했다. 6·25에 참전한 간호장교 대다수는 갓 20대를 넘긴 어린 여성들이었다. 전장의 나이팅게일, 간호장교들의 헌신이 없었다면 전쟁 기간 목숨을 잃은 군인들의 숫자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국간사 출신 간호장교들은 6·25 이후에도 베트남전을 비롯한 여러 위험한 의료현장에서 활약했다.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어떤 위험도 감수하고 최전선으로 향하는 국방 나이팅게일의 애국심과 소명의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최근 코로나19 상황에서는 국간사 60기 신임 간호장교 75명이 졸업·임관과 동시에 국군대구병원에 투입돼 확진 환자들을 돌보며 국민의 찬사를 받기도 했다.

국간사 출신 간호장교들의 모임인 국간사 총동문회는 모교와 함께 굴곡진 역사를 걸어왔다. 1993년 군내 사조직 활동 금지령에 따른 위기를 겪었고, 1998년에는 모교의 폐교 검토라는 큰 시련까지 겪었다. 당시 총동문회는 ‘학교살리기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서명 운동을 펼쳤고, 이런 피나는 노력은 대한민국 정예 간호장교의 산실인 국간사 존속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국간사 총동문회는 모교 발전을 위한 기금 조성, 생도대 지원, 교육활동, 총회 개최 및 동문교류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위기 당시 총동문회는 후원금 1억 원을 조성해 대구·대전 등 전국 군 병원에 전달하며 현역 간호장교들과 함께 의료 현장으로 달려가고픈 간절한 마음을 대신하기도 했다.

국간사 총동문회 우승란 회장은 “간호장교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제일 위험한 곳에 가장 먼저 달려가고, 마지막까지 현장을 지킨다”며 “6·25 당시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해 창설된 국간사의 전통을 훌륭하게 이어가고 있는 후배 간호장교들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강조했다. 황옥경 사무총장은 “6·25에 참전했던 간호장교 선배들 가운데 자신이 유공자란 사실을 잘 모르는 분이 많아 안타깝다”며 “참전하셨던 모든 선배님들이 꼭 유공자 여부를 확인하셔서 명예를 찾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인터뷰]6·25전쟁 참전 간호장교 박명자 여사

박명자 여사가 6·25전쟁 다시를 회고하고 있다.                                             김상윤기자
박명자 여사가 6·25전쟁 다시를 회고하고 있다.                                             김상윤기자

“반드시 기억해야 해. 나라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야.”

6·25전쟁에 참전한 간호장교이자 전 세계 간호사의 최고 영예로 불리는 ‘국제적십자위원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記章)’ 수상자인 박명자(89·사진) 여사가 젊은이들에게 간절히 전하고픈 말이다.

1932년생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박 여사는 서울대 의과대학 부속 고등간호학교를 다니며 간호사의 꿈을 키우던 중 6·25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서울대 부속병원에서 부상병을 치료하다 병원이 인민군에 점령당하면서 북으로 끌려가게 된 박 여사는 온갖 생명의 위험을 겪고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해 간호사관학교 2기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한 명을 치료하는 몇 초 사이 다른 한 명이 숨을 거뒀다. 간호 중에도 인민군 총에 맞을 것 같아 두려웠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곧 전쟁터였다”는 박 여사의 회상은 긴박했던 전시 의료현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해준다.

1956년 중위로 전역한 박 여사는 서울대 의대 부속병원 간호사를 거쳐 여러 병원에서 실무 및 관리자 역할을 하다가 간호교육자의 길을 간다. 전쟁터에서 선진 의료기술을 익히고 경험을 쌓은 박 여사는 무균 수술실 개념 도입, 현대적 개념의 회복실 운영 제안, 최신 마취술 적용, 우리말 간호 교재 제작 등을 통해 대한민국 의료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기장을 비롯해 국민훈장, 육군참모총장 감사패, 서울대인상, 호국영웅기장증, 대한간호협회 창립 60주년 공로상 등 화려한 수상 이력이 박 여사의 공적을 잘 보여준다.

간호교육자 이외에도 교련 교사, 중학교 교장, 장학사 등을 지낸 박 여사는 은퇴 후 임종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봉사에 나섰다. 노년에는 뇌종양으로 반신마비가 왔고 대수술까지 겪었지만, 어려운 이들을 위한 박 여사의 헌신과 희생은 이어지고 있다. 아흔을 앞둔 박 여사는 “다시 태어나도 ‘간호’라는 직업을 선택할 것”이라며 후배 간호장교들에게 따뜻한 격려와 조언을 남겼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최전선으로 달려간 후배들이 정말 대견했어. 허락만 해준다면 나도 대구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허락해줄 것 같지 않아서 대신 위문품을 보냈지. 나는 평생 간호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품고 살아왔어. 다시 태어나도 이 간호 일을 할 거야.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어. 환자를 늘 친절하게 대하고 진심으로, 또 사랑으로 간호해야 한다고.” 

김상윤 기자 < ksy0609@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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