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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인질로 왜서 8년…혼혈 왕실에 백성 외면

기사입력 2020. 08. 03   15:36 최종수정 2020. 08. 03   16:08

<30> 백제 전지왕

백제 초기 연못 연지(蓮池). 충남 공주시 공산성 안에 있으며 고대 축성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필자 제공

백제 18대 전지왕(재위 405~420)은 부왕의 빈번한 전쟁 수행으로 기구한 일생을 살았다. 부왕(17대 아신왕·재위 392~405)은 중원 대륙에서는 고구려 광개토왕(19대·재위 391~413)과 패권 싸움을 벌였고, 한반도에서는 신라 내물왕(17대·재위 356~402)과 영토 전쟁을 계속했다. 아신왕은 연전연패했다. 한반도의 국경 전쟁(396)에서 수도 한성이 고구려군에 함락되려 하자 아신왕이 광개토왕에게 무릎 꿇고 항복했다. 광개토왕은 백제 왕족과 장군·신료 등 10여 명을 인질로 잡아갔다. 
 
아신왕은 복수를 별렀다. 백제·가야·왜의 3국 동맹을 체결하고 대륙·한반도에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왜에는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내놓고(397) 왜의 간섭을 받는 수모까지 자초했다. 백성들은 강제 부역과 전쟁 물자 충당으로 지쳤다. 조정에서도 주전론과 화전론으로 양분돼 격하게 대립했다. 왕은 15세 이상 장정에게 총동원령을 내리고 군사훈련을 직접 참관하며 전쟁을 독려했다. 이 혼돈 속에 405년 9월 아신왕이 급서했다. 국가의 총체적 위기였다.

용상은 한시도 비울 수 없는 게 국법이다. 백제 조정에서는 왜에 억류 중인 전지에게 귀국을 서두르도록 기별했다. 전지는 왜 응신천황(15대)에게 체루비읍(涕漏悲泣)하며 귀국을 애원했다. 당시 전지는 왜 왕녀 팔수(八須)와 결혼해 왜 왕실의 부마 신분이었다. 응신천황은 호위무사 100명을 출동시켜 전지의 귀국 길에 동행토록 했다.

하지만 8년 만의 귀국길이 순탄하지 않았다. 백제 왕실 내 반란으로 정국이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지의 귀국 시까지 훈해(아신왕 동생)가 정무를 대신하고 있었는데 혈례(아신왕 아들·전지 이복동생)가 삼촌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 무렵 백제 조정은 해(解)씨·진(眞)씨 두 외척 간의 권력 다툼으로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해씨는 온조(백제 시조)가 고구려를 탈출할 때 동행해 온 씨족으로 동부여의 왕실 혈통이었다. 백제 건국 초부터 조정 요직을 장악하고 왕비를 배출해 왔다. 진씨는 마한의 토착 귀족으로 백제가 마한을 병합할 때 백제 편에서 싸웠다. 일찍이 조정에 대거 진출해 해씨와 자웅을 겨뤘다. 두 외척은 번갈아 왕비를 배출하며 앙숙 간으로 변했다. 훈해와 전지는 해씨 왕비 출생이었고 혈례는 진씨 왕비 소생이었다.

전지 일행이 서해안에 당도할 무렵 한성 관료 해충(解忠)으로부터 급보가 날아왔다. 섬(해도)에 머물다가 반란 진압 후 입궐하라는 밀령이었다. 전지는 공포에 떨었다. ‘부왕도 삼촌(16대 진사왕)을 살해하고 용상에 올랐는데 나도 죽임을 당하는 게 아닌가.’ 전지는 뱃머리를 돌려 왜로 향하려 했으나 백제 왕실 근위병이 침소를 지키고 있어 포기했다. 황망 중에도 팔수 부인이 아들을 순산해 전지는 기뻤다. 뒷날의 19대 구이신왕(재위 420~427)이다.

전지왕은 인구에 회자되는 빈도가 드물어 일반인에겐 다소 생소한 임금이다. 그러나 사학계에서는 전지왕 즉위를 백제 역사의 중대한 분기점으로 인식하고 있다. 678년(BC 18~AD 660) 백제 역사를 통사적으로 고찰할 때 전지왕 재위 시부터 국운 쇠퇴기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외척 세력 발호에 왕권은 위태로웠고 일본 왕실의 피가 섞인 백제 왕실의 정체성에 백성들은 외면했다. 장자 승계의 순수 혈통을 고수하던 완고한 백제인들에겐 용납되지 않는 적국과의 혼혈이었다.

혈례의 용상 탈취로 백제 조정은 혼미를 거듭했다. 혈례를 옹호하는 진씨 외척과 태자 전지의 해씨 세력 간 일진일퇴 공방전이 계속됐다. 내전이었다. 백성들은 삼촌을 참살하고 왕이 된 혈례를 축출하라며 전지에게 힘을 보탰다. 대세가 글렀음을 감지한 혈례가 야반도주하다 해씨 세력에게 추포돼 현장에서 참수됐다. 진씨 외척들도 몰살됐고 이후 백제 왕실에서 진씨는 영원히 사라지고 만다.

역모 진압 소식을 접한 전지 일행이 비로소 한성에 입성했다. 일각이 삼추 같았던 긴장의 나날이었다. 405년 9월. 천신만고 끝에 전지가 백제 18대 왕으로 즉위했다. 귀국과 등극의 환희도 잠시였다. 국내의 정치적 기반이 전무한 상태서 용상에 앉다 보니 모두가 신세 진 사람뿐이었다. 왕은 해씨 외척의 핵심 인물인 해충·해수·해구에게 정사를 위임하고 사냥과 잡기로 소일했다. 해씨 왕실에서 해씨 부인의 왕비 간택을 압박해 새로 맞아들였다. 이듬해 왕자를 출산하니 20대 비유왕(재위 427~455)이다.

전지왕은 전쟁을 극도로 혐오했다. 부왕의 거듭된 패전으로 대륙의 백제 영토를 거의 상실했고 자신은 전쟁 피해 당사자로 왜에 인질로 잡혀가 숱한 생사고비를 넘겼다. 조정 신료들에게 전쟁만은 피하라고 국정 지침을 하달했다. 전지왕 재위 14년 동안 전쟁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같은 전지왕의 온건 화평 정책은 약체 백제군 양성으로 이어지며 전투능력 저하를 초래했다.

전지왕은 고구려·신라·가야는 물론 왜와도 화친 관계를 유지하며 고구려에 잡혀간 인질 송환은 도외시했다. 아신왕이 광개토왕에게 항복할 때 인질로 보낸 왕족과 장수들을 방치해 버린 것이다. 인질들은 절치부심하며 백제를 잊고 고구려 귀족과 맹장으로 변신했다. 전지왕의 인질 실정(失政)은 뒷날 상상을 초월하는 부메랑이 돼 백제 국체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금강 옆 공산성 안의 영은사. 전형적인 백제 양식의 고찰이다.  필자 제공

세월이 흘렀다. 백제에선 전지왕·구이신왕·비유왕이 죽고 고구려의 광개토왕도 죽었다. 백제에는 21대 개로왕(재위 455~475)이 즉위하고 고구려에는 20대 장수왕(재위 413~491)이 즉위했다. 두 임금은 영토 확장을 위해 전쟁을 일삼았다. 개로왕과 장수왕이 한강을 목전에 둔 아차산성(사적 제234호·서울시 광진구)에서 운명의 한판 승부를 겨뤘다. 475년 9월. 개로왕이 제증걸루 장군에게 생포돼 장수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증걸루는 고구려에 끌려간 백제 장군의 후손이었다.

제증걸루는 왕에 대한 예의를 갖춘 뒤 얼굴에 침을 뱉고 개로왕의 목을 쳤다. 장수왕은 개로왕 시신을 볼모로 잡고 백제군 사기를 꺾었다. 백제 왕실과 신료들은 앙천통곡하며 복수를 다짐했지만, 국고는 바닥났고 민심도 떠났다. 새로 등극한 22대 문주왕(재위 475~477)은 500년 넘는 도읍지 한성을 버리고 웅진(충남 공주)으로 천도(475)했다. 문주왕은 비유왕의 차남으로 개로왕의 동생이다.

백제 왕실은 금강 변 공산성(충남 공주시 산성동·사적 제12호)에 성벽을 수축하고 전성기 영광을 되찾으려 했다. 문주왕은 성 안의 연지(蓮池)에 물을 가둬 가뭄에 대비했고 고구려에 빼앗긴 영토 회복을 도모했지만, 재위 2년 만에 살해되고 만다. 외척인 해구의 역모였다. 문주왕이 찾았던 연지(충남기념물 제42호)는 길이 21m, 너비 15.3m, 깊이 7.7m 크기로 백제 초기의 초대형 연못이다. 성 안의 영은사 앞에 있으며 고대 축성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지왕 즉위 시부터 쇠락기에 접어든 백제 국운이 개로왕 대에 와 망조가 든다.

<이규원  시인 『조선왕릉실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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