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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장진호전투 등 맹활약…135명 전사

기사입력 2020. 05. 29   16:55 최종수정 2020. 05. 29   17:04

<114> 영원히 기억될 우리의 안보 유산 ‘재일학도의용군’

2015년 2월 일본 도쿄 주일본 한국대사관에서 열린 일본거주 재일학도의용군 호국영웅기장 수여식에서 재일학도의용군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사진=국가보훈처 홈페이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해외동포 참전

1967년 6월 3차 중동전쟁이 터지자, 이스라엘 유학생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전쟁터로 달려갔다는 일화가 재외국민 참전사례로 세계적으로 회자된다. 그러나 6·25전쟁 당시 자발적으로 참전한 우리의 재일학도의용군은 그보다 17년이나 앞섰지만, 세계는 물론 우리 국민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들은 징용으로 끌려간 재일동포의 2세들로 일본에서 태어나 이스라엘 유학생들과 달리 병역의무도 없었다. 그들은 고등학생부터 30대까지였는데, 20대 대학생들이 주류를 이뤘다. 올해는 재일학도의용군 참전 7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해 지난 3년간 무관 임무 수행 중에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를 지원하면서 현장에서 그분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들었던 재일학도의용군의 활동 모습을 알리고 숭고한 뜻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재일학도의용군의 조직과 참전 과정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 발발 사흘 만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재일동포 사회는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다고 한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불과 5년 만에 공산세력의 침입을 받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은 재일민단에 인정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에 재일동포들은 재일민단을 중심으로 발 빠르게 대응했다.

민단 중앙본부는 6월 26일 북한의 남침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이어 긴급회의를 통해 △청년학도 자원병을 조국 전선에 파견 △기술자의 한국 송환 △전선 장병과 피란민에게 위문품과 구호물자 보내기 운동 전개 △준동하는 공산 진영에 대비한 민단조직 수호 등을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자원병 지도본부’를 도쿄에 설치하고 지원서를 접수했다. 1000명 넘는 지원자 중에서 신체검사와 심사과정을 거쳐 자원병을 선발했다.

하지만 한국이 일본과 국교를 맺기 전이어서 정상적인 참전이 어려웠고, 미국 극동사령부(GHQ)에 참전 관련 편의 제공을 요청했지만, 작전상의 이유로 답신이 지연됐다. 그러던 중 8월 중순 GHQ에서 연락이 와 “한국 모처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준비 중인데, 통역과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는 한국 출신 요원 1000여 명을 모집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따라 영어와 한국어가 가능한 대학생 위주로 선발해 미군 부대에 소속시키고 속속 전개되는 미군 부대에 맞춰 200명씩 순차 입대하기로 했다. 일각에서는 카투사(KATUSA)의 원조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제1진 투입을 시작으로, 11월 중 원산상륙작전에 제5진이 투입될 때까지 순차적으로 642명이 참전했다.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은 주로 미 육군 7사단과 3사단에 배속됐다. 미군들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서울탈환작전·원산상륙작전과 갑산·혜산진 탈환작전, 장진호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에 참가해 싸웠고, 135명이 전사했다. 6·25전쟁에서 가장 혹독했으며, 군인들의 희생으로 흥남철수를 가능하게 했던 ‘장진호 전투’에서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를 추모해 매년 12월 초 일본 도쿄 민단본부에서 ‘장진호 전투 전사자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6·25전쟁 당시 자원입대해 89회 출격 후 전사한 공군 전투기 조종사 박두원(朴斗元·1926~1952) 대위. 사진=전쟁기념관 공식 홈페이지

재일학도의용군 출신 빨간마후라 박두원 대위

2014년 10월 3일 도쿄 민단본부 앞에 새로 건립된 ‘재일학도의용군 충혼비’의 전사자 명부 맨 상단에 유일한 장교로서 박두원 대위의 존함이 새겨져 있다. 1950년 10월 재일학도의용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영천전투 등 지상전에 참가하던 중 조종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비행 경력이 있었던 그는 공군으로 전군하게 된다. F-51 무스탕 전환훈련을 받고 1952년 3월 1전투비행단 10전투비행전대에 배속됐다. 강릉기지에서 출격해 원산·고성·간성지구 작전에 투입돼 8월 전사할 때까지 5개월 동안 89회의 전투출격을 하며 혁혁한 공훈을 세워 미 국방부의 특별수훈상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동부전선 보급집결지를 공격하다가 적의 대공포에 피격돼 전투기와 함께 공중에서 산화했다. 그가 염원했던 ‘100회 출격’을 이루지 못하고 전사하자, 동료 조종사들이 교대로 그의 영정사진을 품고 전투기에 올라 그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100회 출격을 선물했던 일화는 눈물겹다.

매일같이 출격하던 당시, 후배 조종사 이희근(15대 공군참모총장) 중위에게 보낸 편지에 그의 진솔한 마음이 담겨 전해지고 있다. “한 번 출격하면 두 번 출격하고 싶고, 세 번 출격하면 네 번째 출격이 안타깝게 기다려지네. 폭탄이 떨어지면, 눈 아래 보이는 적 고사포를 발길로라도 짓밟아 버리고 싶은 마음을 어찌할 수 없네. 굳은 결의로 나라를 지키는 것이 우리 젊은이들에게 맡겨진 위대한 사명이며 영광이 아니겠는가.” 그의 필승의 신념과 순결한 사명감은 현시대를 살고 있는 후배 군인들의 귀감이며 표상이라 하겠다.

참전자 중 265명은 순환 배치되는 미군에 속해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일본이 주권을 되찾자 전쟁 이후 일본으로의 귀국에 문제가 생겼다. 한국 국적을 회복한 재일학도의용군에 대해 일본 정부로부터 입국이 거부됐던 것이다. 따라서 242명은 가족과 생활터전이 있던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 잔류하게 된다. 재일학도의용군은 6·25전쟁에 642명이 참전해 전사자 135명, 일본 귀환자 265명, 한국 잔류자 242명이라는 것이 공식 기록이다.

일본 귀환자들은 재일동포 사회의 지도자가 돼 평생 재일본 교민사회의 정신적인 버팀목 역할을 담당했다. 



● 무관노트

동지회 90대 접어들어 세상 떠나시는 분 많아…다 함께 계승 노력 기울여야

주일 무관부는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 사무실을 수시로 찾아뵙고, 각종 지원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이제 막 광복이 됐는데, 공산 침략으로 나라가 망하게 되는가라는 위기감에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도의용군에 자원했다”는 동지회장님의 말씀, 장진호전투 전사자 위령제에 참석해 “나만 살아 나와서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노병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안타까운 것은 이분들이 90대에 접어들어 세상을 떠나시는 분들이 많다는 점이다. 재일학도의용군의 나라사랑과 호국정신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계승돼야 한다. 이들의 해외동포 참전 역사는 대한민국의 소중한 안보유산이며 명예다. 참전 유공자들을 존중하고 예우하는 문화가 우리 사회에 더욱 확산하고 영원히 계승되도록 다 함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김학준 공군대령
前 주일본 공군무관
現 합동참모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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