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 콘서트’가 21년 만에 막을 내린다. 사진은 개그 콘서트에서 선보였던 코너들.
1999년부터 시작되어 무려 20년이 넘게 사랑받았던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 콘서트(이하 개콘)’가 결국 폐지된다. KBS는 14일 “달라진 방송 환경과 코미디 트렌드의 변화 그리고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새로운 변신을 위해 ‘개그콘서트’가 잠시 휴식기를 갖는다”면서 “출연자들은 휴식기 KBS 코미디 유튜브 채널인 ‘뻔타스틱’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코미디를 위한 다양한 시도를 이어 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최근 주말 저녁에서도 밀려났던 ‘개콘’은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으며 결방 사태를 겪기도 했다. 겨우 방영이 재개됐지만, 공개 코미디의 기본 요소인 관객들을 빼고 녹화된 동영상을 보는 형식으로 전환했는데, 이는 사실상 ‘개콘’의 수명이 끝났음을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었다. 코로나19가 바꿔놓은 비대면 접촉 사회는 객석에 촘촘히 앉아 함께 환호하면서 웃음보를 터뜨리는 일을 터부로 만든 것이다. 현장에서 관객 반응이 사라지니 관객과의 소통에서 나오는 모든 재미, 즉 연기자들의 즉흥적 리액션과 특유의 아우라 등이 사라졌고, 라이브의 생동감이 없는 ‘개콘’은 이미 죽은 몸이었다. 시청률이 2%대로 떨어진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사실 ‘개콘’은 이미 2014년부터 흑역사를 쓰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이후 무려 6주간이나 결방됐고, 다시 방영이 시작된 후에도 강화된 간섭 탓에 ‘개콘’ 특유의 맛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급격히 찾아온 1인 미디어 시대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웃음을 자기 취향에 맞게 찾아가는 소비 방식을 정착시켰고, 밀착 카메라의 발전은 극적 상황에서 터지는 웃음보다 일상 속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웃음을 더 선호하게 했다. 예능의 중심은 지상파에서 1인 미디어로, 콩트 코미디에서 리얼리티 쇼로 옮겨간 것이다. 더욱이 2010년 이후 공영방송들에 가해진 소재에 대한 강력한 제재들은 성, 정치, 종교라는 코미디의 3대 요소를 모두 규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1999년 처음 ‘개콘’이 등장했을 때 서민들은 IMF 외환위기의 충격을 겨우 벗어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가장 살맛 나던 시절을 그리워했고,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던 시대를 다시 살아보고 싶었다. 그때 ‘개그맨’이란 칭호를 쓰면서 슬랩스틱 코미디에 익숙한 선배 코미디언들과는 다른 세대임을 선언했던 입담꾼들이, 자신들의 무대를 방송국으로 가져오는 도발을 감행했던 게 바로 ‘개콘’이었다. 공개 코미디라는 장르 명칭도 사실 이 ‘개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이런 도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방청객들을 두고 그 앞에서 공연하듯이 녹화를 해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코미디쇼가 대박을 터뜨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7년 봄에 등장해 대중문화 빅뱅의 1990년대를 열어젖힌 ‘쇼! 비디오자키’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유머 일번지’와 함께 지상파 코미디의 양대 산맥이 되었다.
‘유머 일번지’가 스튜디오에서 녹화되는 정통 콩트 코미디였다면 ‘쇼! 비디오자키’는 공개홀에서 공연 형태로 진행돼 순발력과 즉흥적인 리액션에 강한 개그맨들에게 최적의 무대였다. ‘쇼! 비디오자키’를 통해 희극인을 가리키는 말이 ‘개그맨’으로 대체됐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확실한 세대교체를 가져오게 한 프로그램이었다.
‘개그맨’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탁월한 기획자 전유성과 그의 후배 개그맨들은 공개 코미디 무대가 공영방송에서 밀려난 이후에도 대학가와 소극장 무대에서 이 라이브쇼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개그 콘서트’라는 이름은 컬트삼총사가 처음 사용했다고 하지만, 개그맨들의 재치와 순발력을 음악과 댄스 등과 접목해 콘서트 형식으로 버무린 무대들은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1960년대 TV 속으로 들어가 버렸던 악극단의 전통이 극장식 쇼 무대라는 이름으로 변칙적으로 명맥을 이어가다가 전혀 새로운 세대들에 의해 현재적으로 재해석된 이 무대들은, 익숙하면서도 신선해야 하는 대중문화 콘텐츠의 특성을 제대로 갖춘 상품이었다. 게다가 소재나 주제에 제한이 없는 철저히 브레인스토밍에 의해 탄생한 아이디어가 무대 공연을 통해 검증되면서 만들어진 코미디들은 살아 꿈틀거렸다.
규제로 인해 아이디어가 바닥난 방송가에서 이 무대에 주목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방송국으로 옮겨온 이 싱싱한 콘텐츠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것도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초기 제작자들은 최대한 ‘살아있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극장과 방송국의 네트워크를 유지시켰다. 브레인스토밍이 검증되는 이런 공연 현장과의 소통과 녹화 당일 또 한 번 검증되는 관객과의 소통, 이 수평적 피드백이 ‘개콘’의 전설을 만든 것이었다. 또 ‘개콘’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그 엄하다던 기수 문화와 여성 개그맨에 대한 편견이 깨지던 때였다. 그러니, 이 전설 또한 민주주의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한때 시청률이 30%대를 돌파했었고, KBS 연예대상에서 ‘시청자가 뽑은 최고의 프로그램상’을 무려 네 차례(2003, 2011, 2012, 2013년)나 받았던 21년의 역사는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단지 한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200여 명의 개그맨이 지상파 방송프로그램을 통해 검증될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며, 수많은 개그맨 지망생에게는 꿈의 무대가 사라지는 것이다. 수많은 예능프로그램과 예능화된 교양·시사 프로그램들은 패널을 검증할 기회가 더욱 사라지는 것이며 그야말로 1인 미디어들에 인재 발굴, 아이디어 개발, 콘텐츠의 생산까지 모두 떠넘기는 행위다. 그러면서도 계속 같은 수신료를 받는다면, 시청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야말로 공영방송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김성수 시사문화평론가>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 콘서트’가 21년 만에 막을 내린다. 사진은 개그 콘서트에서 선보였던 코너들.
1999년부터 시작되어 무려 20년이 넘게 사랑받았던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 콘서트(이하 개콘)’가 결국 폐지된다. KBS는 14일 “달라진 방송 환경과 코미디 트렌드의 변화 그리고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의 한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새로운 변신을 위해 ‘개그콘서트’가 잠시 휴식기를 갖는다”면서 “출연자들은 휴식기 KBS 코미디 유튜브 채널인 ‘뻔타스틱’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코미디를 위한 다양한 시도를 이어 갈 예정”이라고 밝혔다.
최근 주말 저녁에서도 밀려났던 ‘개콘’은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으며 결방 사태를 겪기도 했다. 겨우 방영이 재개됐지만, 공개 코미디의 기본 요소인 관객들을 빼고 녹화된 동영상을 보는 형식으로 전환했는데, 이는 사실상 ‘개콘’의 수명이 끝났음을 보여준 상징적 장면이었다. 코로나19가 바꿔놓은 비대면 접촉 사회는 객석에 촘촘히 앉아 함께 환호하면서 웃음보를 터뜨리는 일을 터부로 만든 것이다. 현장에서 관객 반응이 사라지니 관객과의 소통에서 나오는 모든 재미, 즉 연기자들의 즉흥적 리액션과 특유의 아우라 등이 사라졌고, 라이브의 생동감이 없는 ‘개콘’은 이미 죽은 몸이었다. 시청률이 2%대로 떨어진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사실 ‘개콘’은 이미 2014년부터 흑역사를 쓰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이후 무려 6주간이나 결방됐고, 다시 방영이 시작된 후에도 강화된 간섭 탓에 ‘개콘’ 특유의 맛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급격히 찾아온 1인 미디어 시대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웃음을 자기 취향에 맞게 찾아가는 소비 방식을 정착시켰고, 밀착 카메라의 발전은 극적 상황에서 터지는 웃음보다 일상 속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만들어내는 웃음을 더 선호하게 했다. 예능의 중심은 지상파에서 1인 미디어로, 콩트 코미디에서 리얼리티 쇼로 옮겨간 것이다. 더욱이 2010년 이후 공영방송들에 가해진 소재에 대한 강력한 제재들은 성, 정치, 종교라는 코미디의 3대 요소를 모두 규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1999년 처음 ‘개콘’이 등장했을 때 서민들은 IMF 외환위기의 충격을 겨우 벗어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가장 살맛 나던 시절을 그리워했고, 꿈과 희망에 부풀어 있던 시대를 다시 살아보고 싶었다. 그때 ‘개그맨’이란 칭호를 쓰면서 슬랩스틱 코미디에 익숙한 선배 코미디언들과는 다른 세대임을 선언했던 입담꾼들이, 자신들의 무대를 방송국으로 가져오는 도발을 감행했던 게 바로 ‘개콘’이었다. 공개 코미디라는 장르 명칭도 사실 이 ‘개콘’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이런 도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방청객들을 두고 그 앞에서 공연하듯이 녹화를 해서 프로그램을 만드는 코미디쇼가 대박을 터뜨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7년 봄에 등장해 대중문화 빅뱅의 1990년대를 열어젖힌 ‘쇼! 비디오자키’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유머 일번지’와 함께 지상파 코미디의 양대 산맥이 되었다.
‘유머 일번지’가 스튜디오에서 녹화되는 정통 콩트 코미디였다면 ‘쇼! 비디오자키’는 공개홀에서 공연 형태로 진행돼 순발력과 즉흥적인 리액션에 강한 개그맨들에게 최적의 무대였다. ‘쇼! 비디오자키’를 통해 희극인을 가리키는 말이 ‘개그맨’으로 대체됐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확실한 세대교체를 가져오게 한 프로그램이었다.
‘개그맨’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탁월한 기획자 전유성과 그의 후배 개그맨들은 공개 코미디 무대가 공영방송에서 밀려난 이후에도 대학가와 소극장 무대에서 이 라이브쇼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개그 콘서트’라는 이름은 컬트삼총사가 처음 사용했다고 하지만, 개그맨들의 재치와 순발력을 음악과 댄스 등과 접목해 콘서트 형식으로 버무린 무대들은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1960년대 TV 속으로 들어가 버렸던 악극단의 전통이 극장식 쇼 무대라는 이름으로 변칙적으로 명맥을 이어가다가 전혀 새로운 세대들에 의해 현재적으로 재해석된 이 무대들은, 익숙하면서도 신선해야 하는 대중문화 콘텐츠의 특성을 제대로 갖춘 상품이었다. 게다가 소재나 주제에 제한이 없는 철저히 브레인스토밍에 의해 탄생한 아이디어가 무대 공연을 통해 검증되면서 만들어진 코미디들은 살아 꿈틀거렸다.
규제로 인해 아이디어가 바닥난 방송가에서 이 무대에 주목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방송국으로 옮겨온 이 싱싱한 콘텐츠가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것도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초기 제작자들은 최대한 ‘살아있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극장과 방송국의 네트워크를 유지시켰다. 브레인스토밍이 검증되는 이런 공연 현장과의 소통과 녹화 당일 또 한 번 검증되는 관객과의 소통, 이 수평적 피드백이 ‘개콘’의 전설을 만든 것이었다. 또 ‘개콘’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그 엄하다던 기수 문화와 여성 개그맨에 대한 편견이 깨지던 때였다. 그러니, 이 전설 또한 민주주의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한때 시청률이 30%대를 돌파했었고, KBS 연예대상에서 ‘시청자가 뽑은 최고의 프로그램상’을 무려 네 차례(2003, 2011, 2012, 2013년)나 받았던 21년의 역사는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단지 한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200여 명의 개그맨이 지상파 방송프로그램을 통해 검증될 공간이 사라지는 것이며, 수많은 개그맨 지망생에게는 꿈의 무대가 사라지는 것이다. 수많은 예능프로그램과 예능화된 교양·시사 프로그램들은 패널을 검증할 기회가 더욱 사라지는 것이며 그야말로 1인 미디어들에 인재 발굴, 아이디어 개발, 콘텐츠의 생산까지 모두 떠넘기는 행위다. 그러면서도 계속 같은 수신료를 받는다면, 시청자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야말로 공영방송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김성수 시사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