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참전단체 릴레이 탐방 리멤버 솔저스

[참전단체 릴레이 탐방]② 갑종장교 전우회

김상윤

입력 2020. 02. 26   16:59
업데이트 2023. 08. 17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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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당시 맹활약했던 청년들 이제는 안보활동 앞장


1950년 신설…6·25서 805명 산화 
4만5000여 명 배출 육군 전력 근간
현재 전국 230개 동기회 등 구성
증언록 발간·추모제 등 사업 전개 

 

2019년 동춘상 시상식에서 갑종장교전우회·보병학교 관계자들과 수상자들이 갑종장교 호국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부대 제공
2019년 동춘상 시상식에서 갑종장교전우회·보병학교 관계자들과 수상자들이 갑종장교 호국탑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부대 제공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쏟아지는 포탄 속에 목숨 걸고 전쟁터를 누볐던 이들이 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 이들의 이름과 숭고한 발자취를 기억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보훈이자, 눈부시게 발전한 대한민국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의무다. ‘리멤버 솔저스’, 오늘은 갑종장교전우회를 만나본다.

6·25전쟁 참전장교 중 약 32% 갑종장교

‘하루살이 소위’. 6·25전쟁 당시 소대장들에게 붙은 별명이다. 보직 명령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전사하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였다.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가장 위험한 선두에 섰던 장교들 중 다수가 갑종장교였다.

1950년 1월 육군보병학교에 ‘갑종간부 후보생 과정’이 신설된다. 그해 6월 6·25전쟁이 발발했다. 갑종장교 후보생 1기 387명과 2기 150명 등 537명이 임관도 하기 전 후보생 신분으로 전장에 나섰다. 군번도, 계급장도 없이 ‘사(士)’ 자 마크를 달고 참전했고 67명이 초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갑종장교는 이후 휴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7월까지 1~49기 1만550명이 임관해 대부분 중·소대장으로서 전장의 최일선에서 용맹하게 싸웠다.

6·25전쟁 참전장교 가운데 갑종장교가 약 32%에 달했다. 전장에서 산화한 갑종장교는 805명으로 추정된다.

갑종장교는 6·25전쟁 이후에도 국가의 위기 때마다 가장 위험한 선두에 섰다. 베트남전 파병 당시에는 갑종장교 1만4712명이 소·중·대대장 등으로 참전했다. 전체 참전장교의 65.7%가 갑종장교였고, 전사자는 174명에 이른다.

1950년 7월 15일 1기부터 1969년 8월 30일 제230기까지 4만5424명의 갑종장교가 배출됐다. 이들은 육군 장교 전력의 근간이자 호국의 주역으로서 국가안보 및 조국 현대화에 큰 버팀목 역할을 했다. 갑종장교 가운데 국가유공자는 9980명이며 이 중 태극무공훈장 3명, 을지무공훈장 46명, 충무무공훈장 430명 등 무공훈장 수상자가 무려 5314명에 달한다.

전우회, ‘동춘상’ 제정에 결정적 역할

갑종장교전우회는 갑종장교의 명예를 선양하고, 국가안보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국가발전에 기여하며, 회원 간의 친목 도모와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결성된 예비역 안보단체다. 170기 김영갑 회장을 필두로 한 본회와 전국 230개 동기회, 14개 광역시·도지회, 2개 해외 지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전우회는 1971년 창립됐다가 1년 뒤 해체의 아픔을 겪었고, 이후 1991년 5월 재창립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우회는 보병학교 동춘관 기념관 설치, 갑종장교 호국탑 건립, 갑종장교 증언록 발간, 호국영령추모제 개최, 안보강연 등 다양한 기념사업 및 안보활동을 통해 호국정신의 중요성을 국민과 후배들에게 알리고 갑종장교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려 노력해 왔다. 특히 전우회는 우수한 육군 소대장에게 수여하는 ‘동춘상’ 제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매년 시상식에서 대견한 후배들에게 직접 상을 전달하며 시대를 초월한 공감을 나눈다. 


갑종장교 창설 70주년 맞아 발자취 재조명 


2020년은 6·25전쟁 70주년인 동시에 갑종장교 창설 70주년이다. 전우회는 기념비적인 해를 맞아 국가와 군을 위해 헌신한 갑종장교의 발자취를 재조명하고, 노병들의 명예를 선양할 수 있도록 조형물 건립, 증언록 제작 등 다양한 기념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회상의 벽’과 ‘추모의 집’ 건립이다. 회상의 벽 옆에는 갑종장교 출신 호국인물 10인을 기리는 흉상도 세워질 예정이다.

또한 전우회는 오는 5월 보병학교에서 열리는 갑종장교 70주년 기념식과 추모제를 준비하며 70년사 편찬 작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모든 사업은 회원들의 자율적 모금활동을 기반으로 추진 중이다. 

 

“후손에게 ‘전쟁 참상’과 ‘평화 중요성’ 전하려 노력”

 
 김영갑 갑종장교전우회장

 

 

“갑종장교와 6·25전쟁은 불가분의 숙명적인 관계입니다.”

 

갑종장교전우회 김영갑(사진) 회장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엄숙했다. 김 회장은 “6·25 참전 장교 3명 중 1명이 갑종장교였다”며 “전쟁의 포성이 울린 지 70년, 갑종장교가 창설된 지도 70년이 흘렀으니 나이도 같은 셈”이라고 말했다.

 

‘나를 따르라’. 육군보병학교의 교훈이자 보병 소대장을 상징하는 말이다. 갑종장교들은 6·25전쟁 당시 대부분 중·소대장으로 참전해 최전선에서 많은 피를 흘렸다.

 

김 회장은 “6·25전쟁의 고지전은 소대장이 선두에 서서 빗발치는 총알을 향해 달려가지 않으면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전투였다”며 “수많은 청년 장교가 쓰러졌고, 이들 중 다수가 우리 갑종장교였다”고 설명했다.

 

이후에도 갑종장교는 베트남전, 대간첩침투작전 등에서 맹활약했다.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가장 위험한 최전선에 섰던 갑종장교의 희생과 공훈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 갑종장교란 단어 자체를 낯설게 느끼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현실이다.

 

4만5000여 갑종장교 중 3만2000여 명이 위관 출신으로 전역했다. 장성까지 오른 이는 단 200명에 불과하다. 그만큼 전역 이후 어렵게 생활을 이어간 노장들이 많다. 생활고에 병환까지 겪는 노장들의 사연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김 회장은 “어려운 생계에 병까지 얻어 가족도 없이 홀로 요양원에 머무는 전우도 있다”며 “매년 총회 때 가장 어려운 전우 서너 명을 선정해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있다”고 말했다.

 

6·25전쟁 당시 20대 청년이었던 갑종장교들은 70년이 흐른 오늘날 90대 노장이 됐다. 매년 초 총회가 열리는데 최근에는 200명 정도가 모였다. 참석자 숫자는 안타깝게도 매년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김 회장은 “올해가 우리의 마지막 10주기란 비장한 각오로 70주년 행사를 추진 중”이라며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후손들이 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해 미래 평화의 씨앗을 심겠다”고 다짐했다.

 

우리 군의 원로로서 후배들에게 염려되는 점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김 회장은 따끔한 지적보다는 따뜻한 격려를 남겼다.

 

“장병들의 사고 방식이 크게 달라졌고 무기체계도 크게 진보하고 있습니다. 시대적인 흐름이죠. 우리 군의 혁신적인 변화에 처음엔 걱정도 했지만 나름대로 잘 정착돼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수많은 호국영령의 희생과 역사의 교훈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후배들이 실전적인 교육훈련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강한 군대를 만들어갈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김상윤 기자 < ksy0609@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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