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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 불씨 되살리다가…스러진 청산리 영웅

기사입력 2019. 12. 24   16:06 최종수정 2019. 12. 24   16:20

<49·끝> 제5부 시련과 재기 ⑨ 새로운 길,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

아나키즘 수용, 새로운 실험 시작
무정부주의자 김종진 신민부 합류
김좌진 지시로 아나키스트 결집
새 독립운동 ‘한족총연합회’ 결성 

농촌자치조직 ‘농무협회’
금성정미소 운영 곡물가격 조작 차단
공동구매·금고 운영 등 획기적 조치
움츠려 있던 동포 사회에 새바람 

위협 느낀 공산주의자와 만주 공략 일제
1930년 ‘민족의 비극’ 암살 사건 벌여


재만무련이 조직된 해림시의 현재 모습.


1927년 10월 하순, 벌써 겨울바람이 플랫폼을 훑고 가는 북만주 ‘목단강’역. 북만주 한인 독립운동의 거두 김좌진이 젊은 청년을 감격적으로 맞고 있었다. 잘생긴 청년은 목단강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련미에다 유창한 중국말을 구사하는 엘리트였다. 그날 김좌진과 감격적인 상봉을 한 청년이 바로 ‘시야 김종진’이다. 

운남강무당 16기생. 김좌진의 6촌 동생. 우당 이회영이 총애했던 청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김종진의 신민부 합류는 신민부의 획기적 변화를 예고하는 첫걸음이었다.

김좌진을 찾은 김종진은 독립전쟁을 위한 둔전 시행의 시급함을 건의했다. 그리고 그를 위한 방안으로 만주 전역을 여럿으로 나누고, 정확한 지방 실정을 파악해 교포를 재조직하고 지도훈련을 강화해야 한다는 안을 제시했다. 얼핏 일반론적 제안인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김좌진은 김종진에게 당장의 과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수립해 볼 것을 지시했다. 그만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당시 북만주에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수립돼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거기에다 민족주의 계열에 대한 관심도 약화와 동포사회의 독립운동에 대한 열기 저하라는 삼중고에 직면해 있었다. 타개책이 절실했다. 다시 말해 독립운동의 방략을 달리해야만 했다.

김종진은 해림을 출발해 무려 8달 동안 목릉·밀산·영안·오상·액목·돈화·백두산·안도·장백·무송·연길·왕청을 순방한다. 김좌진의 대변인 역할을 겸하면서 주민 위무와 정확한 동포 실태 파악을 위해서였다. 참담한 동포들의 피눈물을 함께 담아 온 김종진의 순방 결과는 ‘교포의 조직화와 훈련계획안’이라는 보고서로 제시됐다. 동포 각자가 스스로 반공과 항일의 주인공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안이었다.

공산주의보다 더 강력한 혁신적 방편이 필요했다. 김종진은 방안을 구체화하기 위해 아나키즘을 소개했다. 김좌진은 상해에 있던 이을규와 대표적 아나키즘 이론가였던 유림을 불렀다. 치열한 토론 끝에 ‘반공 아나키즘’을 수용하게 된다. 아나키스트들의 자유의사와 자유합의를 존중하는 절차적 민주성과 무엇보다 민중 속에서 민중을 위해 민중과 함께 헌신하는 그들의 활동 형태를 긍정했다.

그렇다고 김좌진이 아나키스트가 된 건 아니었다. 유림과의 토론에 그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유림의 주장이다. “사상은 사상을 통해서만 막을 수 있다. 공산주의는 그 사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무정부주의로만 막을 수 있다.” 이에 김좌진이 반박했다. “주의는 주의로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주의가 궁극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 동시에 우리 민족이 복되게 잘 사는 것이 염원인 이상, 그 목적을 위하여 또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 알맞은 이론을 세워야 할 것이지 꼭 남들이 주장하여 오는 무슨 주장이라야 될 것은 아니다.” 전형적 민족주의자로서의 이념이 뚝뚝 묻어나는 말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절대 배격’이라는 공통분모는 이념적 이질성을 뛰어넘고 있었다.

김좌진은 김종진에게 아나키스트들의 결집을 지시했고 해림에 집결한 17명의 아나키스트들은 해림역 앞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재만무련)’을 결성했다. 여기에 신민부 군정파였던 이붕해·이종주·이강훈도 참여했다. 먼저 ‘재만무련’이 결성되자 기존의 신민부 조직과 연합을 시도했다. 일단 군사조직은 신민부의 조직을 그대로 적용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성향이 그동안 ‘군정’으로만 인식됐던 신민부의 이미지 제고에도 기여해 줄 것을 기대한 조치이기도 했다.

중국 흑룡강성에 복원된 산시진 순국지(금성정미소).  필자 제공

재만무련은 ‘우리는 한 개인의 농민으로서 농민대중과 공동 노작하여 자력으로 자기 생활을 영위하는 동시에 농민들의 생활 개선과 영농 방법의 개선 및 사상의 계몽에 주력한다’라는 강령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김좌진은 이에 통합의 실효성을 확신하며 마침내 대종교적 민족주의에 재만무련의 아나키즘을 수용해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한다. 1929년 7월 21일 산시역전에서 새로운 독립운동의 방략을 펼칠 새로운 단체가 출현한 것이다. 김좌진의 새로운 실험이 시작됐다.

김좌진은 희망에 부풀었다. 한족총연합회 집행위원장 취임사다. “우리 민족은 노예근성을 철거치 아니하면 안 됩니다. 만일 노예근성을 그대로 둔다면 장백산이 무장이요 압록강이 군량일지라도 우리의 앞에는 패배뿐이요 아사뿐입니다. 우리는 앞과 뒤에 일제와 공산, 양 적을 두고 있지 않습니까? 이 복배쌍전제단(腹背雙戰祭壇)에 김좌진이 먼저 제물이 될 것이매, 여러분은 일치보조로 ‘전자부후자계(앞사람이 죽으면 뒷사람이 계속 잇는다)’라는 민족 유일의 군호를 잊지 말아 주시오. 좌진은 친애하는 여러분의 사랑의 명령을 받아 죽고 거듭 죽는 전선을 향해서 마지막 걸음을 떠납니다.”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먼저 농촌자치조직으로 ‘농무협회’를 만들었다. 이 조직은 중앙집권적 조직이 아니라 농민 자치 조직이었다. 그리고 의식 고양을 위한 교육에도 대단한 열정을 쏟아부었다. 마을순회강연과 연극공연 등을 통해 자조 의식을 고양시켰다. 특히 성인 대상 문맹퇴치운동은 시간이 갈수록 호응이 대단했다.

경제력 향상을 위해서는 산시에 금성정미소를 열어 곡식의 도정뿐만 아니라 일본인이나 중국인 거간꾼에 의한 곡물가격조작도 방지했다. 당연히 형편이 나아졌다. 그뿐만 아니라 별동대의 지원으로 농촌자치 조직별로 공동구매, 공동판매, 상호금고를 운영하는 등 실로 획기적인 조치들이 실행돼 갔다.

‘이건 뭐지?’라던 동포사회의 숨결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민들은 김좌진의 공동농장으로 들어와 짐을 풀었다. 등을 돌리던 현실안주형 주민들이 스스로 야학을 찾고 공동노동에 품을 보탰다. 북만주 일대에 한족총연합회는 몰라도 신민부가 달라졌다는 이야기가 퍼져갔다. ‘카더라’ 통신의 위력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 발이 없어도 천리를 달렸다. 김좌진은 비로소 한 줄기 서광을 보았다. 일상에 끼친 변화가 거대한 거시적 조망을 불러온 것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김좌진의 활동에 가장 위협을 느낀 세력은 이제 막 뿌리를 내린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민심이 다시 김좌진계로 돌아서는 것은 곧 공산주의 세력 확장에 암초가 아니라 좌절이었다. 두 번째 세력은 친일파와 만주지역을 공략하던 일제였다. 중동선에서 세력이 더욱 커져 가는 김좌진의 한족총연합회는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송곳 같은 존재임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그 결과가 1930년 1월 24일 산시 금성정미소에서 벌어진 김좌진 암살 사건이다. ‘1회’에 그날의 사태를 서술한 바 있다.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민족의 비극이었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 관장/예비역 육군대령>


연재를 마치며

지난 1년간 ‘독립군 전설 김좌진’을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는 뜻깊은 해에 김좌진 장군의 생애를 국방일보에 연재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한 국군 장병의 벗 국방일보를 사랑해 주시길 당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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