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

일본군 침공 당한 다윈, 곳곳에 전쟁 유적

입력 2019. 12. 03   16:16
업데이트 2019. 12. 0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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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주(하)


태평양전쟁 당시 기습적 폭격 당해
미 군함 10척·항공기 23대 파괴돼
B-24 미군 폭격기 추락한 현장
호주 정부, 국가전쟁유적지 지정

호주 다윈항 맞은편 만돌라이반도 정글 지역에 추락한 B-24 미군 폭격기의 잔해. 호주는 폭격기가 추락한 지역을 우방국 전몰장병을 기리기 위한 국가전쟁유적지로 지정했다.
호주 다윈항 맞은편 만돌라이반도 정글 지역에 추락한 B-24 미군 폭격기의 잔해. 호주는 폭격기가 추락한 지역을 우방국 전몰장병을 기리기 위한 국가전쟁유적지로 지정했다.

세계에서 가장 평화로운 대륙에 살고 있는 호주인! 그러나 그들은 왜 지나간 전쟁역사에 이토록 관심이 많을까? “인류 역사는 전쟁 중이거나 아니면 다음 전쟁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라고 많은 역사가는 말한다. 인류 기록 역사 3700년 중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단 270년. 지구 상에서 한 번도 총성이 울리지 않았던 기간은 3주에 불과했다. 이기심, 종교 갈등, 독재자 오판, 국익 충돌 등 전쟁의 원인은 끊임없이 생겨난다. 이런 냉혹한 국제사회 현실에 일찍이 눈뜬 민족은 늘 전쟁에 대비해 왔다. 그러나 ‘평화’라는 달콤한 환상만을 상상하고 현실에 눈감은 민족은 침략자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누구보다도 이런 교훈을 잘 깨닫고 있는 국민이 호주인들이었다.
시내 전체가 전쟁 유적인 최북단 도시 ‘다윈’

적도에 가까운 ‘다윈’은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이지만, 시내와 주변이 전쟁 유적으로 덮여 있다. 도심 곳곳에서 전쟁기념비, 지하 유류저장소, 폭격 맞은 건물, 기총소사 총탄 흔적의 담벼락 등 전쟁 상흔을 쉽게 볼 수 있다. 일일 투어 코스의 절반이 전쟁기념관, 옛 군사시설이다. 1940년대 태평양전쟁 중 유일하게 일본군에게 침공당한 이 도시를 호주는 ‘호국의 성지’로 승화시켰다. 또 매년 2월 중순 이곳에서는 수일간 대대적인 전쟁 재현행사가 열린다.

1942년 2월 19일, 동티모르·파푸아뉴기니에서 발진한 300대의 일본군 전투기가 군사 요충지 ‘다윈’을 기습적으로 폭격했다. ‘호주판 진주만 공습’으로 수많은 민간인과 호주·연합군이 목숨을 잃었고 미 군함 10척, 항공기 23대가 파괴됐다. 이후 일본군은 호주를 100여 차례 폭격했고, 시드니로 침투하던 일본 잠수함이 항구 입구에서 격침당했다. 철저한 전쟁 준비를 했지만, 호주인들은 일본군의 무서운 공격 기세로 공포심에 휩싸였다. 호주 정부는 일본군 상륙 시 영토 일부를 양보하고 ‘브리즈번’ 북부에서의 결전을 계획하기도 했다.

위기에 빠진 호주는 다급하게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천만다행으로 미국은 영국을 대신해 호주·뉴질랜드의 생존을 책임지겠다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필리핀에서 탈출한 맥아더는 중부도시 브리즈번에 사령부를 차리고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했다. 호주는 나라 운명과 작전권을 맥아더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우방국 전몰장병을 위한 국가전쟁유적지

일본계 호주인 모리는 여행자 숙소 직원이다. 그는 다윈 건너편 동티모르에서 비정부기구(NGO) 활동도 했다. 동티모르·인도네시아·뉴기니 역사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졌고, 다윈의 전쟁유적지는 손금 보듯 환하게 알고 있었다. 모리는 다윈항 맞은편 ‘만돌라이반도’ 정글 지역의 폭격기 추락 유적지 답사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1945년 1월 17일, 훈련 중 B-24 미군 폭격기가 추락한 현장이란다. 유적지로 가는 직선도로를 따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페리로 20분 정도 걸려 반대편 선착장에 도착했다. 주차장 여행객에게 유적지를 물으니 자신의 차에 타라고 했다. 한참을 달려 목적지 입구에 내려주며 “충분한 식수를 가졌는지?” 몇 번이고 되묻는다. 작은 물병을 보여주며 걱정하지 말라며 손을 흔들었다. 표지판을 따라 좁은 길로 들어서니 군데군데 벌건 황토물이 차 있다. 꺾어지는 삼거리·사거리에서 계속 안내 화살표만 나타난다. 보물찾기 놀이 같았지만, 적막한 밀림 속에서 미아가 될 것 같은 두려움이 몰려왔다.

거의 3㎞ 정도 들어가니 갑자기 나무 위쪽이 부러진 수목군(樹木群)이 나타났다. 길이가 수백m에 달하는 추락사고 중 생긴 74년 전의 생채기다. 그 끄트머리에 산산이 조각난 항공기 동체·엔진·날개가 뒹굴고 있었다. 출격 직전 촬영한 승무원 9명의 활짝 웃는 사진 동판에서는 수 시간 후 닥쳐올 비극적 운명을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았다. 우방국의 자유를 위해 고귀한 목숨을 바친 이들을 기리고자 호주는 이곳을 국가전쟁유적지로 지정했다.


브리즈번 중심가의 무명용사 추모 시설.
브리즈번 중심가의 무명용사 추모 시설.

무모했던 정글 지역 답사

다시 복귀 선박에 승선하기 위해 큰 도로로 되돌아 나왔다. 주도로에 나오니 지나가는 차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밀림을 관통하는 일직선 2차로 도로뿐이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선착장까지 걷는 수밖에 없었다. 우선 일사병 방지를 위해 손수건을 물에 적셔 머리에 썼다. 정글 지대지만 더위를 피할 그늘도 없다. 남은 물은 입술만 축이면서 최대한 아꼈다. 혹시 행군 중 쓰러진다면…. 갑자기 여행정보를 대충 알려준 모리가 괘씸했다.

그 순간 까마득한 도로 끝 지평선에서 작은 점 하나가 움직였다. 점점 커지는 물체는 승용차였다. 염치 불고하고 도로를 가로막고 양팔을 벌렸다. 급정거한 자동차 안에는 흑인 부부가 타고 있었다. “웅덩이에 빠진 어린 양을 건져주소서”라는 간절한 부탁에 응답은 “I will jump!(최대한 빨리 가겠다!)”였다. 자동차를 돌리자마자 흡사 추락한 폭격기가 부활한 것처럼 시속 200㎞ 속도로 순식간에 선착장으로 날아갔다. 씩 웃으며 돌아가는 그 젊은 부부가 그날 나의 구세주였다.


호주 브리즈번 안자크 광장에 설치된 한국전쟁 참전 기념 동상
호주 브리즈번 안자크 광장에 설치된 한국전쟁 참전 기념 동상

태평양전쟁 발진기지 브리즈번

호주 중부 해안 도시 브리즈번은 세계적 관광명소 골드코스트로 유명하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당시 이곳은 맥아더사령부가 위치했고 연합군 병력·물자의 발진기지였다. 시내 중심부에는 전쟁역사기념관(맥아더사령부), 무명용사 추모 불꽃과 역대 전쟁 참전용사 동상들이 있다. 또 중앙역 지하보도에는 제1·2차 세계대전 때 수많은 애국청년의 자원입대 장면과 전시 생활 사진들이 걸려 있다. 심지어 시청사 도시홍보관 전시물의 절반 이상이 전쟁역사 사진이다. 특히 100년 전 1차 대전 당시 시청에서 출정을 기다리던 병사들의 벽면 낙서까지 복원해 당시 상황을 관람객들에게 소개한다.

이 관광도시에는 관심을 가지고 보면 육군박물관, 연합군 함정 정박 및 주둔지 기념비 등 전쟁유적이 뜻밖에 많다. 해양박물관 역시 전시물 대부분이 해군 역사 자료들이며 한국전쟁 참전 소형 군함도 계류돼 있다. 이처럼 호주인들은 쓰라린 과거 전쟁역사를 기억하며 미래를 통찰하는 지혜를 신세대에게 물려주고자 국가적 차원에서 애쓰고 있었다. 사진=필자 제공

<신종태 통일안보전략硏??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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