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명

오늘의 전체기사

2021.06.13 (일)

HOME > 기획 > 군사 > 독립군의 전설 김좌진

러시아서 탈출… 북만주로 다시 돌아오다

기사입력 2019. 11. 19   16:05 최종수정 2019. 11. 19   16:10

<44> 제5부 시련과 재기 ④ 재기, 그러나 거듭된 난관

마적단 사건·서일 자결로 잇단 충격
살아남은 청년들 독립군단체 조직
구심점 필요해 김좌진 다시 전면에
1922년 8월 대한독립군단으로 통합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 맡아 

 
중국군 마찰로 ‘영고탑’ 본부 이전
군자금 확보 어려움 겪으며
사회주의자와 싸움 이어나가


대한독립군단이 동녕에서 옮겨와 자리 잡은 영고탑. 현재 유지비와 옛 성벽이 남아있다. 필자 제공
밀산 당벽진 입구에 있는 백포 서일의 자결 장소.

김좌진은 거의 홀몸이다시피 북만주로 돌아왔다. 우수리강을 건너 러시아로 들어갈 땐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었다. 돌아온 북만주의 독립 열기는 파괴된 마을만큼 황폐해져 있었다. 그래도 다시 일어서야 했다. 그것은 김좌진에게는 숙명이기도 했다. 

 
러시아에서 다시 북만주로 돌아온 독립군은 김좌진이 그랬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탈출’하는 수밖에 없었다. 직접 김좌진을 보필했던 이범석의 ‘자전’에는 이렇게 기술돼 있다. “가을이 눈앞에 다가오는 양력 10월 달 밝은 깊은 밤에 (중략) 다섯 동지와 함께 우수리강을 헤엄쳐 넘어오다 두 사람은 러시아 추격병들이 강변을 향해 쏘는 집단사격에 의해 물 가운데서 숨지고 셋만이 살아 탈출에 성공했다. 그해 겨울에 김좌진 장군도 단독으로 탈출해 왔다. (중략) 알몸뚱이로 탈출에 성공해 러시아를 빠져나온 것이다.” 이 기록으론 1921년 11월 이후 12월 중에 얼어붙은 우수리강을 걸어서 탈출했다는 말이 된다. 그 고독과 울분은 한겨울 우수리강을 훑어대는 시베리아의 모진 찬 바람만큼이나 한으로 가득했을 일이다.

그렇게 사지에서 탈출했으나 빛은 보이지 않았다. 이듬해 사월 ‘쾌당별(당벽진) 사건’으로 불리는 마적단 습격 사건이 발생했다. 서일이 있던 당벽진 일대의 독립군들이 거의 전멸당하자 ‘자유시 참변’으로 마음의 짐을 내려놓지 못하던 서일이 자결로 생을 마감하는 참담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김좌진이 러시아에서의 충격을 추스르기도 전에 대부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당시 김좌진은 동녕과 수분하 지역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재조직하고 있었다. 본부는 중·소 국경지대인 동녕현에 두었다. 이 사건이 일어날 때 이범석과 조성환 등은 서일과 같이 밀산에 있었고 김좌진은 서일과 별도로 북만주 전체 독립군 세력을 통합하고 있었다. 김좌진은 당시 연통과 보급을 위해 ‘행상대’를 별도로 편성 운영했다. 그 당시 행상대에서 활동한 대원 중 한 사람이 광복회장을 지낸 ‘이강훈’ 선생이다. 서일의 죽음과 쾌당별 사건으로 당백전 일대가 쑥대밭이 됐다는 소식을 이 행상대를 통해 들었던 것이다. 그런 시기에 서일의 죽음은 실로 충격이었다. 서일이 누군가? 만주 일대는 물론 당대 최대 교단이었던 대종교의 지도자이자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구심점이었던 인물이다. 김좌진을 초빙해 북로군정서를 만들 수 있도록 전권을 맡긴 후원자이자 동지였던 인물, 그가 자책의 의미로 스스로 숨을 끊어버렸다. 김좌진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좌절하고 주저앉아 있도록 시국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만으로 들어가지 않았던 독립군 병력이나 그나마 살아남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북만주에는 다시 독립군 단체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소규모 부대였고 군대의 면모를 갖추지도 못했다. 그들의 역량을 한군데로 모을 구심점이 필요했다. 밀산으로 집결할 당시만 하더라도 북만주는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경신 대토벌’과 ‘자유시 참변’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지역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항일의 의지마저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환경이 김좌진을 다시 항일무장투쟁의 전면으로 불러냈다. 이미 김좌진은 사삿사람으로 필부의 삶을 누리기엔 상징성이 너무 커져 있었다. 다행히 1922년 8월 북만주 제 독립군단체의 통합으로 결실을 보았다.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를 비롯해 의군부·독립단·광복단·국민회·신민단·의민단·대진단 등 기존의 북만주 독립군 단체를 모두 망라한 ‘대한독립군단’이 다시 탄생한 것이다. 동녕은 현재 목단강 시의 예하 현급 시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지금도 조선족 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며 당시에도 그러했다.

‘대한독립군단’의 총재는 연해주와 북만주에서 가장 먼저 항일투쟁에 나섰던 ‘이범윤’을 추대했다. 이범윤은 구한말 대한제국 정부에서 간도의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한 ‘간도관리사’였다. 을사늑약 이후 귀국을 거부하고 일찍이 13도의군을 이끌었던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며 강제 병탄 이후에는 대한의군부와 대한광복단을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그는 복벽주의자였지만 김좌진과 사상적 갈등은 없었다. 독립과 항일무장투쟁의 토대 구축이라는 당면과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점을 서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한독립군단에는 김좌진의 대한군정서가 추구하는 공화주의는 물론 복벽주의 계열까지 이질감 없이 모두 결집할 수 있었다. 이 점은 경신 참변과 자유시 참변이 준 또 하나의 변화였다. 이념적 명분으로 말미암아 모여서도 흩어졌던 과거였다면, 지금은 다시 뭉쳐야 한다는 당위성이 명분을 넘어섰던 것이다.

그런데 일은 엉뚱한 곳에서 꼬였다. 그해 겨울 목릉현 마교하에서 중국군과의 마찰이 발생했다. 장작림의 동북군은 일본의 암묵적 지원 속에 자란 친일 군벌이다. 당연히 경신년의 엄청난 사건을 재현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김좌진을 중심으로 무장세력이 결성됐다는 것을 모를 리 만무했다. 싹을 잘라야 후환이 없었다. 대한독립군단의 무장을 해제시켜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과 싸우기도 벅찬 판국에 중국군과 척질 수도 없었다. 김좌진은 좀 더 내륙 쪽이며 우리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영안현 ‘영고탑’ 지역으로 본부를 옮겼다. 영고탑은 강희제가 봉금령을 내릴 당시까지 동북 국경을 수비하고 행정을 총괄하던 ‘영고탑 사령부’가 있던 동북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주변에는 일대에서 가장 큰 들판인 신안들이 위치했고, 해림진 또한 연변 못지않은 동포들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곳 역시 여건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김좌진은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이었다. 따라서 군대를 양성하고 무기를 구해야 했다. 당연히 군자금은 절대 필요요소였다. 동포들의 선의를 기대했으나 여의치 못했다. 당시 영안 지역에는 두 개의 한인단체가 대립하고 있었다. 하나는 친일단체인 ‘조선인민회’가 있었고, 또 하나는 거기에 대항해 조직한 ‘입적간민호회(入籍墾民護會)’가 있었다. 문제는 오히려 입적간민호회에 있었다. 그들은 중국으로 귀화한 중국 국적의 한인들이 만든 단체였는데 중국 정부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이들이 오히려 중국 정부와 함께 군자금 모집에 반발하고 간부들을 밀고하는 일까지 발생했던 것이다.

김좌진은 어쩔 수 없이 1923년 5월 유정근을 국내로 파견해 군자금을 확보하는 한편 보천교 교주 차경석을 만주로 이주시켜 보천교의 교세를 독립운동에 활용하고자 했다. 다행히 김동진(김좌진의 동생)과 김항규(김좌진의 옛 동지)의 도움으로 유정근이 어느 정도 자금을 확보했고, 보천교로부터도 독립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항쟁에는 동포들의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쉬운 일이 없었다. 거기에다 다른 한쪽에서 사회주의가 마른 땅에 잔 물 스미듯 퍼지고 있었다. 이들도 군자금 조달을 방해했다. 비단 군자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자유시 참변으로 사회주의에 반감을 품고 있던 독립군단이다. 김좌진은 ‘적화방지단’을 조직해 사회주의자들과도 싸워야 했다. 악조건이 엎친 데 덮치고 있었다.  <김종해 한중우의공원관장/(예)육군대령>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