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건축, 전쟁사를 말하다

전쟁 아픔 담은 ‘독일의 母子상’ 전쟁으로 아들 잃은 작가가 만들었다

입력 2019. 10. 04   16:24
업데이트 2019. 10. 13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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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독일의 노이에 바헤 추모기념관


1818년 지어져
군사·외교에 쓰이고
전쟁사 따라
부침 겪은 노이에 바헤
1993년 추모관 개축
콜비츠의 작품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설치
전쟁 희생자 기려  

노이에 바헤의 내부에 설치된 케테 콜비츠의 조각상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설치 전경.  사진=www.elephantinberlin.com
노이에 바헤의 내부에 설치된 케테 콜비츠의 조각상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설치 전경. 사진=www.elephantinberlin.com


  독일의 베를린에 있는 운터덴린덴 거리는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베를린 궁전까지로 독일 근현대사가 담긴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에서도 훔볼트 대학과 독일역사박물관 사이에 위치한 독일 전쟁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국립기념관인 노이에 바헤는 눈여겨볼 만하다.

이곳은 1818년 군사 건축물로 지어져 전쟁사에 따라 의미가 바뀌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931년부터는 전몰장병(적과 싸우다 죽은 장병)을 위한 추모관으로 사용되다가 독일 분단 후 동독 시절에는 파시즘과 군국주의 희생자 기념관으로 쓰였고 독일 통일 이후인 1993년부터는 독일에서 일어난 모든 전쟁과 독재에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됐다.


노이에 바헤의 내부에 설치된 케테 콜비츠의 조각상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설치 전경.  사진=www.elephantinberlin.com
노이에 바헤의 내부에 설치된 케테 콜비츠의 조각상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설치 전경. 사진=www.elephantinberlin.com


1818년 독일 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이 건축

건축가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이 1815년 나폴레옹과의 전쟁 승리 겸 왕실 경비대를 위한 건축물로 건립한 노이에 바헤는 정방형의 석조 건축물로 도리아식 기둥과 주랑 현관(건물 입구 앞에 기둥이 있는 현관 또는 신전이나 교회, 기타 건물에 부속돼 있는 지붕이 덮인 출입구), 부조 조각으로 장식된 낮은 삼각형 지붕 등으로 외관은 전형적인 고전주의 양식을 표방했으며 숙소와 무기고, 구금시설 등을 갖췄다. 건물 주변에는 나폴레옹과의 전쟁 승리의 주역인 샤른호르스트와 뷜로 장군 등의 조각상이 설치됐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이곳은 정치적 행사는 물론 외교적 의례 그리고 축제를 위한 장소로 활용됐는데 1897년 빌헬름 1세의 100세 생일 행사, 1901년 프로이센 왕국 건국 200주년 기념행사, 1913년 빌헬름 2세 즉위 25주년 기념행사 등이 이 장소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또한 1900년 오스트리아 황제 그리고 1913년 영국 국왕 부부가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는 외국 정상을 환영하는 행사의 중심지가 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몰장병 추도시설로 변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 지역의 동원 명령(1914년 8월 1일)과 해산 명령(1918년 11월 11일)이 이곳 노이에 바헤에서 하달됐다. 종전 후에 이곳의 새로운 활용 방안으로 카페와 은행, 전쟁기념비 등의 여러 제안이 나왔으나 1929년 오토 브라운 총리가 제1차 세계대전 전몰장병을 위한 추도시설로 바꿀 것을 제안해 독일 정부가 공모를 실시했고 건축가 하인리히 테세노의 개축 제안이 선정됐다.

창문을 비롯해 보조 출입문은 모두 벽돌로 막았고 지붕에만 둥근 창을 만들어 자연광이 들어오게 설계했다. 이로써 정면의 출입구만이 남게 돼 건물 내부는 추도라는 목적에 걸맞은 엄숙한 공간이 됐다. 내부 공간의 정중앙에는 1.67m 높이의 화강암으로 된 검은 정사각형 제단이 설치됐고 이 제단 위에 금과 은으로 만든 떡갈나무관이 놓였다. 1931년 6월 8일 개소식이 거행됐는데 이때 ‘세계대전의 전몰장병을 위한 추도시설’이라는 역할이 이 건축물에 부여됐다.


케테 콜비츠. 

 사진=뉴욕 공립 도서관
케테 콜비츠. 사진=뉴욕 공립 도서관


정치적으로 활용한 나치와 동독

1933년 히틀러의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그들은 노이에 바헤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는데 병사들의 죽음을 찬미하거나 나치 군대를 찬양하는 의식에 이용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베를린 공습으로 노이에 바헤도 심하게 파괴되면서 건축 일부가 무너졌고 내부가 불탔다. 이곳은 1945년 소련군에게 점령된 후 동독의 영토가 됐지만 동독은 파손된 건축물을 복구하지 않고 수년간 그대로 방치했다.

1956년 9월에 이르러서야 동독은 노이에 바헤를 ‘파시즘과 두 세계대전의 희생자를 위한 상기 기념물’로 재건하기 시작했고 내부에는 화강암 제단만이 남게 됐다. 그 후 동독은 건국 20주년을 맞은 1969년에 건축가 로타어 크바스니차로 하여금 다시 개축하도록 지시했다. 기존에 설치됐던 내부의 화강암 제단은 철거했다. ‘무명저항자’와 ‘무명병사’라고 새긴 금속판을 나란히 두었고 공간 내부의 중심에는 희생자를 상징하는 ‘영원한 불’을 설치했다. 또한 그 앞에 무명용사와 레지스탕스(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점령에 저항해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일어난 지하운동 및 단체)의 묘가 놓였다. 이후 1990년 독일 통일 시까지 큰 변화 없이 그 모습으로 유지됐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 공습으로 노이에 바헤는 내외부가 파괴됐다.사진=www.proto
 koll-inland.de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 공습으로 노이에 바헤는 내외부가 파괴됐다.사진=www.proto koll-inland.de


헬무트 콜 총리에 의해 내부에 케테 콜비츠 작품만 놓여

독일이 통일되고 3년이 지난 후 1993년 1월 27일 헬무트 콜(1930~2017) 총리는 노이에 바헤를 독일 국립 추모관으로서 전쟁과 압제의 희생자에게 헌정할 것이라는 결정을 발표했다. 동독의 흔적을 지우고 내부에는 화강암 제단과 월계관 대신 독일의 예술가 케테 콜비츠(1867~1945)의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 조각상을 원본 높이인 38㎝보다 확대된 152㎝로 더 큰 복제품으로 설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콜비츠가 1938년에 제작한 이 조각상은 성모 마리아가 죽은 아들을 무릎 위에 안고 있는 형상과 비슷해 피에타라고도 불린다. 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이며 조각가인 콜비츠는 사회적 약자들의 삶, 도시의 열악한 현실, 전쟁의 참상 등을 깊은 공감과 연민의 시선으로 다양한 작품에 담아낸 예술가이다. 1차 대전 당시 그녀의 아들 페터가 입대를 원하자 전쟁의 참상을 모른 채 남편을 설득해 아들이 군에 입대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은 불과 열흘 만에 플랑드르에서 전사했다. 콜비츠는 1차 대전 때인 1914년 아들을, 2차 대전 때인 1942년 손자를 전쟁으로 잃었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며 남은 일생 동안 반 나치와 반전 작품을 만들었으며 전쟁이 종식되기 16일 전인 1945년 4월 22일에 눈을 감았다.

사실 콜비츠의 조각상이 1차 대전과 관련됐었기 때문에 2차 대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에는 적절치 않다는 비판도 일었지만 독일 정부는 추도시설 건립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노이에 바헤가 정상적인 기능을 하면서 점차 이 비판은 힘을 잃었다.

1993년 4월부터 11월까지 노이에 바헤의 개축이 진행됐다. 건물 내부 바닥에 검은색 대리석으로 만든 정사각형 평판이 설치됐고 그 위에 콜비츠의 조각이 놓였다. 콜비츠의 조각을 떠받치고 있는 검은색 대리석 평판에는 ‘전쟁과 압제의 희생자들에게’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이곳은 1993년 11월 14일 독일의 민족추도일에 개소식을 열었다. 건물 내부로 들어가면 텅 빈 공간에 콜비츠의 조각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데 조각상의 어머니는 웅크린 채 죽은 아들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천장의 작은 구멍을 통해 내리는 비와 눈을 맞으며 오늘도 전쟁에서 희생된 모든 이들을 기리고 있다. 현재 2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매일 이곳을 찾는다.

<이상미  이상미술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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