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전통과 단절하고 기계 문명과 속도를 찬미하다

입력 2019. 09. 04   16:38
업데이트 2019. 09. 04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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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속도를 노래하라, 미래주의(futurism)-아방가르드, 구성주의, 다다이즘, 선언문, 소음주의 음악, 다이나미즘, 큐보 퓨처리즘, 소용돌이파


‘혁신’과 ‘현대’에 가치 둔 미래주의
공업화 늦었던 이탈리아서 일어나
스스로 이름 짓고 자체 이론 규정
전쟁 찬양 광기 파시즘과 연결
1차 세계대전과 함께 사라져
다다이즘·러시아 구성주의에 기여  

미래파는 역동성, 속도, 불안한 현대 도시생활에 관심을 가졌다. 역동성과 속도를 표현한 나탈리아 곤차로바의 ‘자전거 타는 사람’.
미래파는 역동성, 속도, 불안한 현대 도시생활에 관심을 가졌다. 역동성과 속도를 표현한 나탈리아 곤차로바의 ‘자전거 타는 사람’.
  
입체파는 혁명이었다. 사실주의 이후 등장한 거의 모든 미술사조가 전통적인 평면 회화의 한계를 극복해 회화의 본질을 탐구할 때 입체파의 새로운 방식으로 대상을 묘사할 때 드러나는 개방성으로 인해 1910년대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이즈음 ‘혁신’과 ‘현대’에 가치를 둔 미래파는 전통적인 예술 개념 대신 기계 시대를 찬미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때 입체파의 면 분할은 획기적인 발상이었고, 이내 이들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미래에 대한 독특하고 역동적인 비전을 만드는 데 중점을 뒀다. 따라서 기차·자동차·비행기 같은 새로운 기술뿐만 아니라 유리와 철의 등장과 함께 변화하는 새로운 도시풍경도 이들에게는 새로움이었다.

1899년 9월 19일 자 독립신문은 노량진과 제물포 사이에 철로가 부설되고 처음 영업을 시작한 것을 보도하면서 “화륜거의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굴뚝 연기는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라. 차창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움직이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리”라고 했다. 미래파에게 새로운 기술이란 이 기사처럼 경천동지할 일이었다. 철도와 자동차는 교통수단을 넘어 시공간을 초월하는 도구로 전통사회에 일격을 가하는 획기적인 기계였다. 따라서 이들은 속도와 폭력 그리고 노동계급 모두 변화를 진전시키는 방법이자 수단으로 인식했으며, 모든 영광을 집단에 돌렸다. 또한 이들은 건축·조각·문학·연극·음악, 심지어 음식까지 넓고 다양한 분야를 포함했다.

세베리니 피갈의 ‘댄서’.
세베리니 피갈의 ‘댄서’.


속도는 물론 폭력까지 변화 수단으로 인식

미래파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이유는 유럽 문화의 원류라는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 내내 반도 통일에 시간을 보내면서 공업화가 늦었던 이탈리아에 증기기관과 자동차는 한국인들의 놀람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다. 고루한 전통에 매달려 허송세월했다는 반성을 전제로 통일을 이루고 공업화를 서두르던 이탈리아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고 힘찬 것, 달리는 것에 대한 찬미를 통해 새로운 아방가르드(Avant garde)를 자처했던 미래주의는 결국 무솔리니(1883~1945)의 파시즘(Fascism)과 연결돼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1차 대전 후 다시 활기를 띠면서 세계 전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들은 다다이즘(Dadaism)과 러시아 아방가르드(Russian avant garde)라 부르는 러시아 구성주의에 크게 기여했다.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상징주의, 아르누보 등 새롭고 다양한 미술운동의 성과가 이탈리아에 전해진 것은 30여 년이 지난 1905년경이다. 따라서 유럽 문화의 종주국인 이탈리아는 새로운 서유럽 미술을 극복할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런 탓에 미래주의는 스스로 미학을 만들기 시작했고 모든 전통과 가치, 제도를 거부한 매우 급진적인 운동이었다. 미래주의는 여타의 미술운동이 비평가나 반대파에 의해 조롱조의 명칭을 얻은 것과 달리 스스로 이름을 짓고 자체 이론을 문학적 형태로 규정했다. 그들의 이런 입장은 1909년 2월 ‘피가로’지에 시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1876~1944)가 쓴 선언문이 실리면서 공식적으로 탄생한다. 이후 많은 예술집단이 탄생할 때마다 내놓는 소위 ‘선언문’이란 새로운 전통도 이때 시작됐다.



마리네티, 미래주의 ‘선언문’ 발표

마리네티는 선언 후 곧바로 움베르토 보치오니(1882~1916), 카를로 카라(1881~1966), 자코모 발라(1871~1958), 세베리니(1883~1966)와 작곡가 루이지 루솔로(1885~1947)와 함께했다. 마리네티는 모든 오래된 전통, 특히 정치적·예술적 전통에 대해 열정적인 혐오를 드러냈다. 그는 “우리는 과거를 원치 않는다”며 “미래파는 젊고 강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열정적인 민족주의자들인 동시에 과거와 모방을 거부하고 독창성을 중시했다. 또한 그들은 대담하고 폭력적인 광기 어린 집단이었다. 이들은 “오늘날까지 문학은 골치 아픈 정체성, 황홀경과 수면 상태를 찬양했다. 우린 공격적인 움직임, 열정적 불면증, 레이서의 활보, 대담한 도약, 따귀, 주먹질을 찬양한다”는 선언문을 통해 이런 급진적인 태도를 밝혔다. 따라서 이들은 “우리는 전쟁(세상의 유일한 위생학), 군국주의, 애국주의, 무정부주의자들의 파괴행위를, 그것을 위해 죽는 아름다운 이상주의를, 여성 경멸을 찬양한다”고 밝혔다.

루솔로는 “오늘의 음악은 더욱 불협화한, 귀에 비정상적으로 울리는 음의 결합을 추구하며 이윽고 전차나 자동차, 군중이 내는 소음을 이상적으로 구성시키는 편이 ‘에로이카’나 ‘전원 교향곡’을 듣는 것보다 더 흥미롭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소음주의음악(bruitism)을 실천에 옮겼다.

미래파 화가들은 독창적인 스타일과 주제를 개발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이들은 1910~1911년에 분할주의(Divisionnisme) 기법을 이용해 빛과 색을 점과 줄무늬로 표현했다. 그러나 1911년 세베리니가 파리를 방문해 입체파 화가들을 만난 후 그 영향으로 작품에 에너지를 부여하고 역동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수용했다. 이들은 기억과 현재의 인상 그리고 미래의 기대를 결합하는 ‘동시성’과, 방향성을 위한 ‘힘의 선’을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 활용했는데 1914년 밀라노 그룹과 피렌체 그룹 간의 갈등으로 인해 분열되기 시작했다.

이보 판나기의 ‘빠른기차’.
이보 판나기의 ‘빠른기차’.


대담하고 폭력적인 광기 어린 집단

전쟁을 불사했던 급진적인 미래주의 화가들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참전했는데 보치오니는 전사한다. 전후 마리네티는 미래주의의 불씨를 살려냈고 이는 1940년대 중반까지 지속됐다. 그 후 미술사가 조반니 리스타(1943~ )는 1910년대 초기 미래파를 조형적 다이나미즘(Plastic Dynamism), 1920년대 미래파를 기계적인 미술(Mechanical Art) 그리고 1930년대를 대기미학시대(Aeroaesthetics)로 구분했다. 특히 1차 대전 직후 고안된 에어로페인팅(Aeropainting)은 동양의 부감 투시처럼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본 광경을 그려 매우 독특한 양식을 만들었다.



러, 역동성·속도·불안한 도시생활 주제로

이런 속도와 움직임, 방향성에 바탕을 둔 새롭고 급진적이며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일군의 화가들은 러시아에도 나타났다. 이들을 러시아 미래파 또는 러시아 입체파라고 부르는데 문학과 미술에서 커다란 변화를 이끌었고 그 중심에는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1893~1930)가 있었다. 그는 다비드 불뤼크(1882~1967), 라리오노프(1881~1964), 곤차로바(1881~1962), 말레비치(1878~1935)와의 교류를 통해 영감을 주고받으며 성장했다.

이들은 하나의 혼성양식에 입체주의와 미래파를 결합한 레제의 초기 입체주의 회화와 닮은 큐보 퓨처리즘(Cubo-Futurism)을 따랐다. 이는 1913년 아리스타크 렌툴로프(1882 ~1943)가 파리에서 돌아와 모스크바에서 처음 전시할 때 채택됐다. 러시아의 미래주의도 입체파 형태에 운동을 결합한 작품으로 역동성, 속도, 불안한 현대 도시생활을 주제로 삼았다. 이후 1917년 혁명 후 일부 화가들은 죽고 일부는 이주하면서 세가 약해졌다.

이런 영향으로 영국에서는 소용돌이파(Vorticism)가 등장한다. 1913년 말 에즈라 파운드(1885 ~1972)가 혁신적인 이론들의 혼란 속에서 모든 긍정적인 요소들을 새로운 하나의 종합체로 만들어내기 위해 소용돌이치는 회오리 같은 힘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모든 예술적 창조는 감정적인 돌풍의 상태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보치오니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사진=필자 제공

<정준모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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