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역사속 그때 그는 왜?

히틀러의 세계 정복 야욕이 베를린 함락 불러

입력 2019. 06. 18   15:41
업데이트 2019. 06. 18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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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1941년 6월 히틀러는 왜 소련을 침공했을까?(下)


역사적 전쟁 ‘바르바로사 작전’
불가침조약 2년도 안돼
소련 침공한 히틀러의 독일군
‘서부전선 영국 지원 차단’ 목적 

 
초전 승리 불구 패배한 독일
추운 날씨·토질에 독일군 무력화
공업력 얻은 소련, 전세 역전 성공
애국심과 자신감도 ‘한몫’ 

 

소련으로 진군하는 독일군.
소련으로 진군하는 독일군.
베를린을 점령한 후 시청사 위에 선 소련군.
베를린을 점령한 후 시청사 위에 선 소련군.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체결한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불가침조약을 깨고 드넓은 소련 땅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는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작전이었다. 독일군이 동원한 병력만 30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여기에 약 4000대의 탱크와 2500대의 항공기까지 더해져 그 위세는 상상을 초월했다. 150년 전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실패 선례를 잘 알고 있던 히틀러와 독일군은 대(對) 소련전을 늦어도 연말까지는 끝낼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모험을 감행했다. 숙원인 소련 정복을 달성하기 위함이었다. 

 
히틀러는 이 역사적 전쟁에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번 싸움이 세계정복의 꿈을 실현하는 전환점이 되리라고 믿었으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는 초기 예상처럼 독일군의 신속한 최종 승리를 가져다주기는커녕 엄청난 살육전의 단초가 됐기 때문이다. 실제 1941년 6월 말 터진 독소전쟁은 1945년 4월까지 거의 4년 동안 이어지다 종국에는 독일군의 완패로 끝났다. 1942년 후반기 내내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수세에 몰린 독일군은 후퇴를 거듭한 끝에 결국 베를린마저 함락당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히틀러는 왜 바르바로사 작전을 감행했을까? 왜 전통적으로 독일군이 두려워한 양 전선에서의 동시 전쟁이라는 모험을 시도한 것일까? 더구나 브리튼 전투 실패로 서부전선에서 광대한 식민지 자원을 보유한 영국이 건재한 상황에서 말이다. 그는 이 작전이 향후 자신과 독일국민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점을 짐작이나 했을까? 아마도 히틀러는 크게 두 가지 판단에 이끌려 소련과의 전쟁을 결심했으리라 여겨진다. 우선, 그가 주장해 온 독일민족의 생활공간을 전격전 전술로 무장한 독일군의 우월한 전력을 이용해 단기간 내 차지할 수 있으리라 자신한 것이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현재 서부전선에서 완강하게 버티는 영국의 마지막 희망이랄 수 있는 소련의 지원 가능성을 아예 제거해 버림으로써 처칠 수상을 협상 테이블로 불러낼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었다.

크게 세 방향에서 소련 땅으로 진격한 독일군은 초전에 엄청난 승리를 거뒀다. 레에프 원수 휘하의 북부집단군은 울창한 삼림과 흩어진 늪지라는 자연장애물과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을 분쇄하며 진격, 8월 말경 발트 삼국을 관통해 레닌그라드를 고립시켰다. 룬트슈테트 원수가 지휘한 남부집단군은 소련군의 지연전을 극복하고 8월경 우크라이나를 초토화하면서 주도(主都) 키예프 포위전에 돌입했다. 복크 원수 휘하의 중앙집단군이야말로 기계화된 독일군의 위력을 한껏 발휘했다. 18일 동안 400마일 전진이라는 신기록을 세우며 광활한 러시아 중앙부를 가로질러 진격을 거듭한 독일군은 8월경 모스크바로 통하는 마지막 장애물인 스몰렌스크를 포위한 채 전열을 재정비했다. 만일 이대로만 전황이 이어졌다면, 독일군은 개전 시 히틀러가 제시한 대로 늦어도 그해 성탄절 이전에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막강한 전력을 보유했음에도 소련군은 마치 ‘눈사람’처럼 스르르 무너졌다. 영토 상실은 차치하고라도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로 고통당했다. 개전 후 두 달도 되지 않아 독일군은 북쪽으로는 레닌그라드, 중앙으로는 모스크바, 그리고 남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캅카스 자원지대의 지척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이처럼 그런대로 사기가 높았던 소련 적군(赤軍)이 초전에 무기력하게 무너진 이면에는 독일군의 공격 징후를 경고하는 다양한 첩보를 철저하게 무시한 스탈린의 실책이 숨겨져 있다. 스탈린이 끝까지 히틀러를 신뢰(?)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문제는 스탈린의 오판에 누구도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1939년 8월 독일과의 불가침조약 체결을 자신이 히틀러를 속여서 얻은 성과로 인식했던 스탈린이 일종의 자기 확증편향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당시 스탈린은 불가침조약 성사 덕분에 소련은 독일이 서쪽에서 동종의 자본주의 국가들과 긴 전쟁을 수행하느라 전력을 소진하는 동안 자국 군사력을 보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처절한 대숙청 기간에 용케 살아남은 자들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무오류의 존재인 스탈린에게 누구도 목숨 걸고 감히 간언할 수 없었으리라. 심지어 스탈린은 독일군이 침공을 시작한 이후에도 처음에는 이를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6월 22일 새벽 육군참모총장 주코프의 유선 보고를 받고서야 이를 수용했다. 이미 최전방에서는 소련군 주력이 빠르게 와해되면서 퇴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초전의 엄청난 승리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계획대로 단기간 내에 소련군을 완파하는 데 실패했다. 사실상 1940년대 초반의 소련은 볼셰비키 혁명 후 엄습한 내전과 기근, 당내 권력투쟁 등으로 만신창이가 됐던 1920년대의 모습이 아니었다. 전형적인 농업국이던 소련은 1930년대 초반 시동을 건 공업화 정책에 힘입어 빠르게 산업국가로 변모하고 있었다. 독재자 스탈린이 러시아인들의 모진 인내와 가혹한 희생을 담보로 추진한 공업화가 점차 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광대한 영토와 엄청난 인구, 러시아인 특유의 인내력에 미흡하나마 공업력이 더해지면서 소련은 강력한 군사적 잠재 역량을 갖추게 됐다. 이러한 저력을 토대로 1942년 겨울에 얻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를 계기로 전세 역전에 성공한 소련군은 점차 독일군을 자국 땅에서 몰아내기 시작했다.


역사적 영향

소련을 단기간에 제압할 목적으로 시도한 독일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은 왜 실패했을까? 흔히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영원한 우군인 자연조건, 즉 독일군의 기계화 부대를 무력화시킨 겨울철 동(冬)장군과 봄철 토(土)장군의 활약이 실패 요인으로 꼽힌다. 이를 인정하더라도 자연적 요인에 러시아인의 애국심이 더해졌기에 궁극적으로 독일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개전 이전부터 독일군은 소련군과 일반 러시아인들의 결연한 저항 의지를 과소평가하는 우(愚)를 범했다. 전쟁 직전까지 스탈린이 벌인 ‘대숙청’으로 불안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터지자 대부분의 러시아인은 ‘대조국전쟁’이라는 스탈린의 민족주의적 호소에 기꺼이 동참했다. 게다가 1930년대 초반 이래 온갖 희생을 딛고 지속해 온 공업화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쟁이 길어지면서 독일군의 인적·물적 자원은 빠르게 고갈된 데 비해 소련군은 정반대로 시간이 갈수록 강력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소련군이 얻은 자신감이었다. 초전에 파죽지세로 공격해 오는 독일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나, 마침내 1942년 후반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를 계기로 독일군의 불패 신화를 깰 수 있었다. 덕분에 독일군의 침공 첩보를 줄곧 부인하면서 전쟁 초반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초래한 원흉이던 스탈린은 어느새 대내적으로는 조국 방어의 화신으로, 대외적으로는 루스벨트·처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 지도자로 올라섰다. 1943년 봄부터 동부전선의 전세는 차츰 소련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나폴레옹은 실패했으나 자신은 성공해 독일민족의 번영에 절실한 ‘생활공간’을 확보하리라 믿고 바르바로사 작전을 벌였던 히틀러는 이제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 옛날 12세기에 십자군 원정 중 익사한 바르바로사 황제의 이름을 침공 계획의 암호명으로 택한 탓에 역사의 저주를 받은 것일까? 


<이내주 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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