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장난기 넘치고 화려하게, 귀족의 삶 향락적으로 묘사

입력 2019. 05. 22   15:25
업데이트 2019. 05. 22   15:38
0 댓글

18 로코코 - 아카디안, 퐁텐블로파, 스투코, 살롱, 시누아즈리, 장식예술, 기목세공


로코코 어원, 불어로 ‘조그만 돌’
후대에 장식 과잉 조롱 의미로 붙여

 
루이 14세 죽은 뒤 귀족들 파리 귀환
집과 사교장 ‘살롱’ 치장하며 전성기
가구·시계·거울 호화로운 장식 특징

 
대표 화가 와토·부셰·프라고나르
인물 일부 또렷하게, 일부 흐릿하게
변화와 대비 통해 공간감 확장  

프라고나르의 ‘그네’.   사진=필자 제공
프라고나르의 ‘그네’. 사진=필자 제공


세상사가 모두 그렇듯 전성기를 누리고 나면 쇠퇴기에 접어들기 마련이다. 영원할 것 같던 르네상스도, 바로크도 같은 운명이었다. 루이 14세 시대를 거치면서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으로 올라선 프랑스 미술은 바로크의 장식적이며 우아하고 과장됐던 시대의 정점에 오른다. 화려함의 절정인 로코코 미술은 16세기 프랑스의 ‘퐁텐블로파’로 거슬러 올라간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초빙해 모나리자를 프랑스 수중에 넣은 프랑수아 1세(1494~1547)는 베르사유 궁전(1662~1715)이 지어지기 전 프랑스에서 가장 웅장하고 호화로운 퐁텐블로 궁전을 치장하는 데 공을 들였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에는 출중하고 재능 있는 미술가들이 없었던 터라 프랑수아 1세는 각국에서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불러들여 궁정을 우아하고 세련되게 꾸며 완전히 새로운 양식의 건물로 완성했다. 당시 그림은 프랑스와 플랑드르 화가들의 협업으로 그려졌다. 그림은 감수성 넘치며 예민한 장식적 감각과 여성적인 관능미·창백함·우아함이 돋보이는 특별한 매너리즘 양식으로 꾸며졌다. 벽은 소석회 또는 석고를 돌가루나 흙과 섞어 고부조를 완성했고, 금박을 올리는 스투코(Stucco) 기법으로 높고 낮음의 편차가 큰 장식 부조를 액자처럼 만들었다. 이렇게 퐁텐블로 궁전을 만든 방식과 양식을 중심으로 활동한 일군의 작가들을 퐁텐블로파라고 불렀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온 프리마티치오(1505~1570)는 얼굴이 작고 팔다리가 긴 인물을 우아하게 묘사했는데, 이는 16세기 말까지 프랑스 미술의 전형이 됐다. 신화적인 주제, 목가적 풍경, 복잡한 기교의 인공적 분위기도 퐁텐블로파의 특징이었다. 종교전쟁(1562~1598)으로 잠시 주춤했던 궁정 건축은 앙리 4세(1589 ~1610)에 의해 재개됐다. 이 시기에는 뒤부아(1542/43~1614/15) 등 많은 플랑드르 화가들이 초빙돼 1620년경까지 이어졌지만, 이들은 그리 창조적인 탁월함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태양왕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나고 볼모처럼 베르사유 궁에 가 살았던 귀족들은 오를레앙 공에 의해 궁정이 파리로 옮겨지자 속속 파리로 귀환했다. 이들이 새롭게 집을 정비하고 치장하면서 로코코는 전성기를 맞는다. 바로크가 절대왕정에 기반을 뒀다면 로코코는 귀족과 새롭게 등장한 사교장 ‘살롱’, 유력 귀족 부인들의 취미에 중점을 뒀다. 이로 인해 더 우아하고 경쾌했으며 S자형의 곡선과 비대칭 장식, 이국적 풍취가 유행했다. 특히 가구 등 세간에 중국풍을 반영한 ‘시누아즈리(Chinoiserie)’풍도 성행했다.


부셰의 ‘루이스 오머피의 누드’.
부셰의 ‘루이스 오머피의 누드’.


‘로코코’는 프랑스어의 ‘로카이유(rocaille)’ 즉 ‘조그만 돌’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는 궁전의 정원에 만든 작은 동굴 입구를 조개껍데기나 작은 돌을 붙여 장식했다. 로코코는 19세기 신고전주의 작가들이 이런 장식 과잉을 조롱하는 의미에서 붙인 말이다. 루이 15세가 어려서 섭정을 했던 1715년부터 1730년까지의 로코코를 레잔스식(Regence style, 1715~30), 루이 15세가 친정을 펼친 1730년부터 1745년까지를 로카이유식(Rocaille style, 1730~45), 그 이후인 1745년부터 1764년까지를 퐁파두르식(Pompadour style, 1745~64)으로 나눠 부르기도 한다.

로코코를 대표하는 화가로는 프랑스의 와토(1684~1721), 부셰(1703~1770) 그리고 프라고나르(1732~1806) 등이 있다. 와토는 변화와 대비를 통해 로코코 회화의 전형을 완성했다. 자연 속의 인물들은 개방적인 느낌을 주며 일부 인물은 뚜렷하게 또 일부는 흐릿하게 처리해 공간감을 증폭시켰다. 부셰는 매우 감각적인 모습의 여신 또는 반라의 여성들을 묘사했다. 부셰의 이름은 로코코 미술의 동의어처럼 받아들여진다. 부셰를 사사한 프라고나르는 로코코의 모든 것이 담긴 ‘그네’라는 작품을 통해 로코코 미술의 전모를 보여줬다. 그는 장난기 넘치며, 화려하고 관능적인 우화처럼 귀족들의 향락적인 삶을 묘사했다.

이들은 궁전 벽화뿐만 아니라 살롱에 전시할 작고 섬세한 그림들도 그렸다. 그림은 부드러운 파스텔 톤으로 윤곽선은 흐릿하게 처리했는데 요즘에도 포르노 취급을 받을 만큼 노골적이고 외설적인 그림들도 있었다. 사실 이런 경향은 이미 사치와 호사가 극에 달했던 베니스 화파의 화려한 색상과 에로틱한 주제 그리고 목가적이며 이상적인 아카디안(Arcadian) 풍경을 그린 조르지오네(1470~1510)와 티치아노(1506~1576)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725년부터 살롱에서 전람회가 열리면서 서민들도 그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화가들은 대중과 교감하기 시작했다. 그 후 엄격한 데생을 신봉하며 밝고 부드러운 파스텔풍으로 표현하는 푸생파와 색채를 강조하는 루벤스파가 경합했다. 결국 루벤스파가 득세하면서 경쾌한 필치와 풍요로운 색채, 화려한 구도와 정서적 표현 방식 등이 로코코의 특징이 된다. 또 샤르댕(1699~1779)의 실내화와 정물화, 그뢰즈(1725~1805), 베르네(1714~1789)의 풍경화도 유명하다. 조각에서는 팔코네(1716 ~1791), 피갈레(1714~1785) 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회화에서 좀처럼 유명 화가가 없던 영국은 로코코 시대에 들어 시민의 삶을 연극처럼 그린 호가스(1697~1764), 아카데미 초대원장이 된 초상화가 레이놀즈(1723~1792), 초상과 풍경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던 게인즈버러(1727~1788) 등이 영국 미술의 틀을 마련했다.

로코코의 가장 큰 특징은 가구와 시계, 거울 등 호화로운 생활용품 등을 중심으로 한 장식예술이다. 로코코 시대에는 전체적으로 화려한 통일감을 집안 전체에 부여하고자 했다. 가구가 발달하면서 작은 나무 조각들을 짜 맞추는 기목세공(Parquetry)이나 나무를 상감하는 목상감 기법, 도자기와 도자인형 등이 발달하면서 프랑스의 세브르, 독일의 로열 포슬린, 마이센 등 도자기 공장이 성황을 이뤘다. 부드럽고 우아하며 곡선이 두드러진 로코코 건축도 독일과 러시아, 스페인 등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이나 오스트리아의 벨베데레 궁전,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 스텔라 교회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도미니크 짐머만(1685~1766)이 활약한 독일에서는 비스 교회와 상수시 궁전, 아말리엔부르크 등이 지어져 지금도 관광객을 맞고 있다.

짧고 굵었던 로코코는 후원자인 퐁파두르(1721~1764)와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가 세상을 떠나면서 쇠퇴했다. 하지만 그 호화로움과 극도의 장식적인 흐름은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1820년대 ‘제2의 로코코 시대’를 맞아 영국과 미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여전히 오늘날에도 소위 ‘명품’이란 이름의 사치품으로 전해 온다. 그렇지만 이런 로코코 미술도 따져보면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등과 시대적으로 중첩돼 특정 시기를 완전하게 지배했던 것은 아니다.

<정준모 큐레이터/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