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노
[대한민국 군함이야기] <39> 대초급 상륙함
北, 1958년부터 무장간첩선 침투 본격화…중형상륙함들 대간첩작전 동원
독도함·거문함·능라함 등 잇따라 북한 경비정 수장시키며 NLL 수호 앞장
대간첩작전부터 상륙작전까지 ‘다재다능’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신형 전차를 적진에 신속히 상륙시키기 위해 중형상륙함(LSM·Landing Ship Medium)을 개발했다. 중형상륙함은 상륙함에 탑재해 운용하는 소형의 전차상륙정(LCT : Landing Craft Tank)과 외양이 유사하지만, 선체의 크기와 재질 등을 강화해 대양에서 단독 항해가 가능한 규모로 건조됐다. 미국은 1944년부터 550여 척의 중형상륙함을 건조했으며, 전쟁 후 다수의 함정을 연합국에 양도했다.
우리 해군은 1955~1956년 중형상륙함 12척과 이를 개조한 상륙로켓함(LSMR:Landing Ship Medium Rocket) 1척을 도입했다. 중형상륙함은 대간첩작전부터 상륙작전까지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우리 해군은 이 함정들을 ‘대초급 상륙함’으로 분류했다.
신형 전차 상륙 목적 탄생…12척 인수
우리 해군은 1955년 진해에서 중형상륙함 4척을 인수했고, 이듬해 미국 시애틀에서 다시 8척을 인수했다.
중형상륙함은 새로 개발한 신형 전차를 상륙시키기 위해 탄생했다. 기존의 상륙주정(LCU : Landing Craft Utility)은 덩치가 커진 전차를 탑재하기에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병력수송용 상륙주정의 크기를 늘릴 수도 없었다.
이에 미국은 먼바다에서 운용할 수 있고, 전차상륙함(LST·Landing Ship Tank)보다 빠른 함정을 건조했다. 승조원과 전투 병력의 숙소도 갖췄다. 그러나 상륙주정의 형태를 유지해 대양에서는 탑재 전차와 보급품에 방수포를 씌워야 했다.
중형상륙함은 20·40㎜ 포로 무장했다. 최대 속력은 13노트. 전차 또는 상륙장갑차와 함께 병력 50여 명을 실을 수 있다. 중형상륙함을 개조한 상륙로켓함은 상륙함정이 해안에 접근할 때 화력지원을 했다.
중형상륙함은 2차 대전 때 태평양 전선에서 활약했으며, 일부는 6·25전쟁과 배트남전쟁에 투입됐다.
섬 이름으로 함명 부여…개조 버전도 도입
우리 해군은 박옥규(중장 예편, 2대 해군참모총장, 1971년 작고) 참모총장 때 수립한 ‘해군력 증강 5개년(1954~1958) 계획’에 따라 중형상륙함 12척을 인수했다. 박옥규 참모총장은 상륙작전 능력 발전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한국함대 예하에 상륙전대를 신설했고, 중형상륙함들을 배치했다.
중형상륙함 함명에는 섬 이름을 부여했다. 대초함·여도함·독도함·가덕함·거문함·비안함·풍도함·월미함·기린함·능라함·신미함·울릉함이 주인공이다. 풍도함과 울릉함의 경우 기뢰부설함(LSML)으로 개조·운용했다. 1960년에는 미국에서 중형상륙함 개조 버전인 상륙로켓함 시흥함을 도입했다.
중형상륙함은 다양한 작전에 활용됐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까지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 경비작전과 대간첩작전을 수행했다. 배트남전쟁에서는 ‘백구부대’의 해상수송 전력으로 활약했다. 이후에는 한반도 전 해역의 도서를 누비는 수송작전을 펼쳤다.
빠른 속력 바탕 간첩선 격퇴·수장 등 전과
6·25전쟁 이후 전력을 가다듬은 북한은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무장간첩선을 침투시켰다. 초창기 무장간첩선은 12노트 속력의 자동차 엔진을 탑재한 10톤급 소형 선박이었다. 그 때문에 1960년대 20노트 이상의 무장간첩선이 등장하기 전까지 최대 13노트의 속력을 낼 수 있었던 중형상륙함도 대간첩작전에 참가했고 수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1958년 9월 17일 서해 NLL 인근. 어둠이 짙게 내려앉을 무렵 가덕함 레이더에 북상 중인 의아선박이 잡혔다. 가덕함은 의아선박을 전속으로 추적해 나포했다. 승조원들이 의아선박에 올라 검문검색한 결과 권총과 실탄, 수류탄 등이 발견됐다. 가덕함은 간첩 3명을 생포하고, 간첩선을 예인해 백령도 근해에서 두만함(PF-61)에 인계했다.
독도함은 소연평도 근해에서 간첩선을 격침했다. 1959년 7월 24일 연평도 서쪽 근해를 경비하던 독도함은 남하하는 의아선박을 발견했다. 독도함은 정선을 명령했지만 의아선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속력을 높인 의아선박이 지그재그 기동으로 도주했고, 독도함이 추격에 나섰다.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간. 독도함의 40㎜ 포가 불을 뿜었다. 독도함의 위협사격에 의아선박도 화기로 대응했다. 치열한 사격전이 전개됐다. 그 결과 간첩선은 엔진이 파괴돼 서서히 침몰했다. 독도함은 간첩 2명을 생포하고 5명을 사살했다.
독도함은 1960년 8월 22일 대연평도 서쪽 해역에서 NLL을 불법으로 남하한 북한 경비정을 교전 끝에 격침하기도 했다.
거문함도 북한 경비정을 격퇴했다. 안개가 짙게 깔린 1959년 8월 18일 아침. 거문함은 백령도 전탐감시대에서 인근에 불명확한 의아선박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안개가 서서히 개면서 시야가 확보됐다. 북한 경비정을 포착한 거문함은 전투배치 명령을 발령한 뒤 추적의 고삐를 죄었다. 그러던 중 북한 경비정 함포에서 불꽃이 일었다. 거문함 앞뒤로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거문함은 즉각 응사했고, 북한 경비정은 북으로 도주했다.
베트남전쟁 해상수송작전에도 2척 파병
능라함은 간첩선을 수장시켰다. 1961년 9월 4일 서해 NLL 근해를 경비 중이던 능라함은 밤 10시를 넘겼을 즈음 레이더에는 잡히지만 불은 켜지 않고 항해하는 의아선박을 발견했다. 30분 정도 추격전이 벌어졌다.
의아선박에 가까이 접근한 능라함이 위협사격을 가했다. 의아선박도 기관총으로 응사했다. 능라함은 격파사격에 돌입했고, 20·40㎜ 포탄이 간첩선 선체를 벌집처럼 만들었다. 간첩선은 버티지 못하고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중형상륙함은 베트남전쟁에도 참가했다. 베트남전쟁 초기 해군은 전차상륙함만을 파병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해상수송 임무가 증가하자 해군은 중형상륙함 2척을 추가 파병했다. 우리 해군은 배트남에서 철수할 때까지 전차상륙함 3척, 중형상륙함 2척을 해상수송작전에 투입했다.
중형상륙함은 이후 군항과 도서지역에 보급물품을 수송하거나 해군·해병대 상륙훈련에 참가했다. 1981년에는 신미함이 독도 헬기착륙장 건설을 위한 물자수송작전인 ‘멸구작전’에 파견돼 임무를 완수했다.
<윤병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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