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용어로 다시 읽는 미술사

하늘 향해 솟아오른 뾰족탑과 화려한 빛의 예술

입력 2019. 03. 27   16:22
업데이트 2019. 03. 27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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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딕미술-수태고지, 성직매매, 아비뇽 유수, 카노사의 굴욕, 스콜라철학, 공중부벽, 팀파눔, 고딕적 미소


13~15세기 고딕 미술의 중심은 신앙
벽돌 사용해 가늘고 긴 기둥 세우고
스테인드글라스로 사람들의 마음 홀려
조각·그림·창문에 성경 내용 담아 장식
성경 대중화 이전 문맹자들에게 신앙 전파
국내엔 명동성당이 대표적인 고딕양식

라생트샤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라생트샤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고딕건축의 백미인 영국 런던의 캔터베리 대성당.
고딕건축의 백미인 영국 런던의 캔터베리 대성당.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부벽.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부벽.
샤르트르 대성당의 팀파눔.
샤르트르 대성당의 팀파눔.
 부르고뉴의 마리아와 성모자상.
부르고뉴의 마리아와 성모자상.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 사진=필자 제공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 사진=필자 제공

 다시 한 번 되새기면 ‘로마네스크’나 ‘고딕’이란 용어는 그 시대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나중에 이름 붙여진 것이다. 로마네스크가 독일에서 시작됐다면 고딕(Gothic)은 프랑스, 그것도 파리에서 비롯됐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영국에 이어서 유럽 전역으로 확산했다. 이들 두 양식의 중심에는 건축이 있고 처음에는 양식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됐다. 

 
특히 ‘고딕’이란 말은 르네상스 시대 바자리(1511~1574)가 붙인 말로 처음 본 고딕양식이 낯설고 야만적이라 생각해 고대의 수준 높은 예술을 고트족이 파괴했다는 뜻에서 경멸조로 썼는데 대개 13~15세 무렵의 미술을 말한다.

1450년 구텐베르크(1400~1468)가 인쇄술을 발명해 성경을 대중화하기 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성경은 일일이 손으로 써야 하는 매우 귀한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그림과 건축을 중요하게 다뤘다. 문맹자들에게 성경을 공부시키고자 탄생한 종교화는 주로 ‘수태고지’와 ‘성모자상’이 그려졌다. 이즈음 부족하나마 원근법이 도입되고 인물에 감정이 실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고딕은 ‘신앙의 시대’였다. 중세 초기 부패한 교회는 베네딕트수도회 중심의 클뤼니개혁과 교회의 직책을 사고파는 성직 매매 타파로 교황권을 세워나갔다. 교황에 의해 시작된 1차 십자군(1096~1099)의 원정 성공은 교황권을 강화했지만 이후 2차(1145~1149), 3차(1189~1192)에 이어 4차 원정(1202~1204)부터 상업적 목적이 강화되면서 베네치아공화국은 상권을 다투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비잔틴을 멸하고 라틴제국(1204 ~1261)을 세웠다.

이후 5차(1217∼1221) 그리고 6, 7, 8, 9차 등 약 186년간 거듭된 원정에도 불구하고 성지 회복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 결과 세속 군주권이 성장하고, 교황권이 약화해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바티칸 교황이 프랑스 아비뇽에 머무는 아비뇽 유수가 일어났다. 200여 년 전인 1076년 세속 군주의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대립했던 서임권 투쟁에서 하인리히 4세(1050~ 1106)가 겪은 ‘카노사의 굴욕’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그러나 이후 교회의 방종으로 이어졌고, 이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에 의해 신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이성적 사유를 통해 논증하고자 했던 스콜라 철학이 발달하고 중세도시의 발달로 이어지면서 르네상스를 촉발했으며, 지리상의 발견과 계몽주의가 발현하고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성당은 종교의 중심이자 교육과 교류의 장

고딕에서 건축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 첨탑과 뾰족탑, 기괴하고 불필요한 장식이 과다하게 나타나는 건축은 디자인에서 비율과 대칭을 중시해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를 교회를 통해 구현함으로써 ‘하늘 위의 천국’을 지상에 재현하고자 했다. 화려한 빛으로 가득 찬 ‘천사들의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성당에서 스테인드글라스는 벽화를 대신하는 성령의 빛으로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은유였고, 창문은 고딕 시대의 신학교재였다. 성당은 종교의 중심이자 교육과 교류의 장이었다. 페스트와 같은 전염병과 대기근, 크고 작은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종교재판으로 마녀사냥이 성했던 무지·야만·몽매·폭력의 시대라 하지만 고딕은 ‘빛의 시대’였으며 한편으론 근대적 계몽의 씨가 발아했다는 점에서 ‘12세기의 르네상스’라고도 불린다.

고딕건축은 벽돌을 주로 사용해 첨탑을 세워 수직적인 느낌을 준다. 육중한 벽과 기둥을 버리고 가늘고 긴 기둥과 넓은 창을 만들어 가없는 빛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도록 했다. 따라서 신비롭고 경건하다. 이런 건축은 새로운 첨두아치(Pointed arch)와 늑골궁륭(Ribbed Vault), 공중부벽(Flying Buttress)이란 외부 버팀목이 발명됐기에 가능했다.

늑골궁륭은 천장의 무게를 분산시켰고 벽은 부벽을 만들어 또 다른 부벽으로 지탱하면서 건축물을 높이 지을 수 있었다. 특히 1144년 6월 11일 완공된 생드니 대성당은 새로운 건축물로 높은 천장과 가볍게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기둥, 섬세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홀렸다. 이런 건축물은 도시화가 이뤄지던 이 시절 각 도시의 자부심으로 여겨져 도시마다 서로 다투듯 크고 높은 성당 짓기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높이가 51m에 이르는 보베성당(1247~1568)도 건설됐다. 그러나 기술 부족으로 12년 만에 강풍에 지붕이 주저앉는 치욕을 당하기도 했다. 고딕성당 내부는 매우 밝고 경쾌하며, 석조 천장의 음향효과는 웅장함과 신성함이 느껴진다. 또 성당을 장식하는 사실적인 조각들은 건축에 비종속적인 존재로 르네상스를 예고하고 있다.


고딕미술의 중심, 건축

12세기 스콜라 철학을 바탕으로 각각의 단위 조각들이 질서와 조화를 통해 성당의 전체상을 깨지 않는 한 각각 독립성을 구가했다. 성경의 내용을 담은 조각상들은 성당의 정면, 입구 및 입구 위쪽의 팀파눔(Tympanum) 등에 장식됐다. 특히 등장 인물들의 인과관계가 분명하게 정리돼 알기 쉽게 만들어졌다. 기둥 꼭대기의 조각은 점차 사라지고 식물이나 단순한 기하학적인 장식으로 바뀐다. 또 민속신앙에 기반한 가고일(Gargoyle) 등 괴수도 등장하나 길고 가는 기둥에 새겨지는 인물상은 흥미로운 존재다. 특히 샤르트르 대성당은 4000여 점의 조각으로 장식돼 있는데 특히 ‘왕의 문’이라 불리는 성당 정문 조각은 시대의 백미다. 이 시절 인물상에서 나타나는 고딕적 미소도 특징인데 입술 끝이 올라가 미소를 머금을 뿐만 아니라 양 눈이 좁아지고 미간과 아래 눈꺼풀이 오므라들게 웃는 모습이 특징이다. 또한 전체적으로 사실적 묘사 기법을 선호했다. 너무 사실적인 관계로 장식성을 잃게 된 점은 아쉽다.

회화는 여전히 사본장식이 주종을 이뤘는데 기도서는 고딕 시대의 사치품이자 신앙의 징표였다. 플랑드르 지방에서 만들어진 ‘부르고뉴의 마리아’(1477)라는 사본은 고딕대성당의 아름다움과 신앙의 힘을 보여주는 경이로운 묘사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후 고딕양식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국제적인 고딕양식으로 전개되며 시대를 넘어 존재하는 하나의 양식이 된다. 서울의 성공회 서울대주교좌 성당(1926~1926)은 로마네스크양식의 건축물이며, 명동성당(1892~1898)은 고딕양식의 건축물이다.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다시 한 번 되새기면 ‘로마네스크’나 ‘고딕’이란 용어는 그 시대 사람들과는 무관하게 나중에 이름 붙여진 것이다. 로마네스크가 독일에서 시작됐다면 고딕(Gothic)은 프랑스, 그것도 파리에서 비롯됐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영국에 이어서 유럽 전역으로 확산했다. 이들 두 양식의 중심에는 건축이 있고 처음에는 양식을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됐다.  <정준모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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