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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이야기] 대구함, 섬과 섬 사이 전속력 추적…간첩선 잡는 ‘저승사자’

윤병노

입력 2019. 02. 15   13:33
업데이트 2019. 02. 17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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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대구급 구축함


2개 5인치 단장포 한 포탑에 배치
포신 움직일 수 있는 각도 높아져
플레처급에 비해 무장 대폭 강화

항해 중인 인천함.
항해 중인 인천함.


우리 해군은 1973년 미국 해군의 섬너급(Allen M. Sumner Class) 구축함(DD: Destroyer) 2척을 도입했다. 섬너급은 한국에서 충무급으로 불린 플레처급(Fletcher Class) 구축함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섬너급 구축함은 플레처급에 비해 무장이 대폭 강화됐다. 5인치 주포를 5문에서 6문으로 늘렸으며, 포 형태도 단장포에서 양장포(2연장)로 교체했다. 이로 인해 ‘작은 전함’이라고 불렸다.


1973년 두 척의 섬너급 구축함 도입

섬너급의 양장포는 5인치 단장포 두 개를 묶어 한 포탑에 배치한 형태다. 포신이 움직일 수 있는 각도가 넓어져 고각의 대공 사격도 가능했다. 이 양장포는 함수에 2기(4문), 함미에 1기(2문)가 배치됐다. 양장포의 배치로 여유 공간도 넓어졌다. 미국 해군은 여유 공간에 대공 기관포를 장착했다. 함수 중간부터 함미까지 2연장과 4연장의 40㎜ 기관포 12문이 설치됐다.

섬너급은 플레처급보다 전폭이 50㎝ 정도 더 넓게 건조됐다. 만재톤수도 500톤가량 증가했다. 전폭은 늘어났지만 항속거리는 짧아졌다. 연료 적재 공간을 줄여 무장을 강화한 결과다.


진해 군항에 정박해 있는 대구급 구축함.
진해 군항에 정박해 있는 대구급 구축함.


섬너급 구축함은 모두 58척이 건조됐다. 우리 해군은 1973년 12월 4일과 5일 이틀에 걸쳐 두 척의 섬너급 구축함을 도입했다. 이들 함정은 각각 ‘대구’와 ‘인천’을 함명으로 부여받았다.

대구함은 원래 1944년 월리스(Wallace L. Lind)함으로 명명돼 임무를 시작한 함정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태평양 전선에서, 종전 이후에는 6·25전쟁에 참전해 많은 활약을 펼쳤다.

인천함은 1944년 헤이븐(De Haven)이라는 함명을 부여받고 임무에 투입됐다. 월리스함과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에는 태평양 전선에서, 종전 이후에는 6·25전쟁에서 맹활약했다.






대함·대지·대공전 능력 뛰어난 작은 전함

주포의 고각을 높이고, 대공포까지 장착한 대구급 구축함은 대함·대지·대공전 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서해에서는 ‘저승사자’로 불릴 만큼 두드러진 활약을 펼쳤다. 1980년 6월 20일의 전과가 그 좋은 사례. 당시 대구함은 서해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승조원들이 저녁 식사를 시작할 무렵 해군 제5해역사령부에서 작전명령이 하달됐다. 안면도 남쪽 해역에서 육군전탐감시대에 사격을 하고 도주하는 간첩선을 추격하라는 것.

제5해역사는 가용 전력을 모두 동원했다. 대구함은 어청도 서남쪽에 배치됐다. DE(Destroyer Escort)급 호위구축함 충남함을 비롯한 다수의 함정과 공군기도 긴급 출동했다. 그러나 간첩선은 보이지 않았다. 작전 해역에 수십 개의 작은 도서가 산재하고, 고기잡이 소형 어선이 촘촘히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자정이 지났다. 그때 전탐감시대가 외해로 고속 기동하는 의아선박을 포착했다. 제5해역사는 탐지 지점을 기준으로 해군 함정을 재배치했다.

얼마 후 대구함이 30노트(시속 55㎞)가 넘는 속도로 기동하는 의아선박을 탐지했다. 대구함은 전속으로 추적하며 조명탄을 발사했다. 공군기도 인근으로 출격했다.

섬과 섬 사이에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대구함은 인근의 고속정을 지휘해 포위망을 좁혀가며 격파사격을 가했다. 약 세 시간에 걸쳐 교전이 이어졌다.

작전은 대구함의 완승으로 끝났다. 대구함의 집중 포화에 간첩선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간첩들은 바다에 뛰어들었다. 수류탄으로 자폭하는 인원도 있었다. 이 작전에서 우리 해군은 간첩선 1척을 격침하고, 간첩 9명을 사살했다.

해상기동훈련에 투입된 인천함이 파도를 가르며 항진하는 모습.
해상기동훈련에 투입된 인천함이 파도를 가르며 항진하는 모습.


서해 해상 간첩선 격침 임무 완벽 수행

인천함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1974년 7월 20일 인천함 통신실에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다. 서해 경비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던 PCE(Patrol Craft Escort)급 호위초계함 신성함이 격렬비열도 남서쪽에서 의아선박을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인천함은 신성함과 정보를 교환하며 의아선박을 추적했다. 시계의 시침이 새벽 2시를 가리킬 즈음 인천함 레이더에 외해로 고속 기동하는 의아선박이 잡혔다.

인천함이 의아선박에 접근해 조명탄을 발사했다. 의아선박이 응사하며 속도를 높였고, 인천함은 적성을 선포한 뒤 격파사격에 돌입했다. 그러면서 간첩선의 기동력을 무력화하기 위해 충돌침로로 접근했다.

약 100야드(91m)까지 접근한 인천함은 전포를 동원해 포탄을 퍼부었다. 인근에 도착한 충무함도 힘을 보탰다. 우리 해군의 물샐틈없는 협동작전에 간첩선이 전복됐다. 작전 결과 우리 해군은 간첩선 1척을 나포하고, 간첩 1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인천함은 1978년 6월 27일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온 북한 어선을 나포하기도 했다. 이날 저녁 6시쯤 어선 한 척이 북방한계선을 월선했다. 해군은 인천함과 고속정편대를 현장으로 출동시켰다. 북한 경비정도 그 어선을 따라 내려왔다.

인천함과 고속정편대는 북한 경비정을 감시하며 북방한계선을 넘어온 선박의 나포를 시도했다. 깜짝 놀란 어선이 북쪽으로 선수를 틀면서 우리 고속정 선미와 충돌했다. 어선이 침몰하면서 선원들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우리 해군은 표류하는 선원 7명 중 5명을 구조했다. 뒤따라 내려오던 북한 경비정이 선원을 구조하던 우리 해군 함정에 사격을 가했다. 인천함과 고속정은 즉각 응사해 북한 경비정을 서해 북방한계선 북쪽으로 퇴각시켰다.

글=윤병노 기자/사진=해군본부


윤병노 기자 < trylover@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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