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제 국내 최초 복막염 수술 등 명의
1941년 백병원 전신 외과의원 개원
납북 후 조카 백낙환 3대 원장 취임
이태석 신부 20년간 남수단 의료활동
백 박사의 ‘인술제세’ 정신 이어 실천
2018년 12월 7일 언론에서 일제히 의료계의 거목인 백낙환(白樂晥) 박사(1926~2018)의 타계 소식을 알렸다. 그는 소아 선천성 거대결장 치료법인 스완슨 수술법, 골반내장 전적출술 등을 국내 최초로 시행한 외과의사로 백병원과 인제대학교의 인제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새삼 그를 있게 한 ‘백인제(白麟濟) 박사’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백’병원과 ‘인제’대학교도 백인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백인제는 1899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졸업했다.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에 1기로 입학해 줄곧 수석을 차지했지만 1919년 인생의 변곡점이 찾아온다.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퇴학과 동시에 10개월여 옥살이를 하고 만다.
암담한 현실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할까 했지만 친구가 붙잡았다. 이후 총독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유화 조치로 1920년 4월에 다시 4학년으로 복학할 수 있었다. 이듬해 3월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하지만 3·1운동에 가담한 전력 때문에 당시 졸업과 동시에 자동으로 받게 되는 의사면허증을 받지 못한다. 결국 2년간 총독부의원에서 아무 보수도 없이 외과 마취를 돕는 보조 일을 한 뒤에야 의사면허증을 받을 수 있었다.
시련의 시간이었지만 훗날 마취과 전문의가 없던 시절 마취 기술까지 겸비한 외과의사로 대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핍박 속에서도 그의 나라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1930년 조선의사협회 창립을 주도했고,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백인제 박사, 당대 최고의 명의
그는 당대 최고로 손꼽히는 명의였다. 1928년 4월 구루병 연구로 일본 동경제국대학(도쿄대학교의 전신)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인으로는 세 번째였다.
같은 해 모교인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교수로 임명돼 많은 후학을 배출한다.
백인제는 큰 수술에도 능했다. 위궤양, 위암, 유방암, 간담도계 질환, 갑상선 질환 환자 등이 그의 손을 거쳐갔으며, 1936년에는 세계 최초로 장 감압술에 성공한다. 1931년부터 수술 환자에게 수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1938년 혈액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등 미래를 내다보는 시야를 가졌다.
위와 십이지장 질환, 간담도계 질환, 충수돌기염, 복막염 등 외과수술 전반에서 국내 최초, 국내 최다라는 타이틀과 함께 마취와 수혈 경험도 풍부해 그의 명성이 일본과 만주까지 퍼졌다.
그가 병원 경영에 뛰어든 것은 1932년부터다. 의학전문학생 시절 그를 가르친 일본인 스승 우에무라 준지(植村俊二)는 부인이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고향인 일본 나고야로 돌아가기로 하고 1924년부터 서울에서 운영해 오던 외과의원(현 서울백병원 위치)을 애제자인 백인제에게 넘기기로 한다. 당시에는 교수도 개인의원을 운영할 수 있었는데, 백인제는 조선식산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인수할 수 있었다.
1936년 11월부터 1937년 1월까지 미국 메이오 클리닉(Mayo Clinic)을 방문한 백인제는 진료, 연구, 교육이 통합된 세계 최고의 비영리 의료기관 형태의 사립병원처럼 조국에 메이오 클리닉에 버금가는 병원을 세우겠다는 꿈을 키운다. 인수한 의원을 1941년 백인제 외과의원으로 정식 개원하면서 이곳에 더욱 집중하려고 교수직을 떠난다.
백인제 외과의원이 개원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환자가 더욱 몰렸다. 30여 병상의 입원실이 부족해 1942년 수술실, 외래진료실, 병실을 증축했다. 광복을 맞이하면서 1946년 12월 17일 자신이 머물던 집을 제외한 모든 사재를 털어 백인제 외과의원을 재단법인화한다. 이것이 사립병원으로는 국내 최초로 민립 공익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이다.
백병원 3대 원장 백낙환, 후학 양성에 힘써
1950년 6·25전쟁은 백인제의 운명을 바꾼다. 같은 해 7월 19일 흥사단원 박현환의 집에서 공산당 정보원에게 동생인 백붕제 변호사와 함께 납북되고 만다.
광복 후 6·25전쟁 발발 이전까지 북의 지식인들이 대거 남으로 내려왔지만 전쟁 중에 납북된 이들이 적지 않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도 백인제를 포함해 외과의 이재복, 김시창, 내과의 이정복, 이돈희, 이종두, 박창호, 생리학교실의 이갑수 교수 등이 납북됐다.
백인제의 빈자리는 컸다. 1951년 백인제의 동서 김희규가 백병원 2대 원장에 취임했지만 재정적 어려움으로 법인 해체 위기에 몰린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최근 타계한 백낙환이다.
백낙환은 백인제의 동생인 백붕제의 아들이다. 백낙환은 출생 5개월 차에 모친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뒤 돌아와 재혼해 지방에서 근무해 백낙환은 중학생 시절부터 큰아버지인 백인제의 집에서 통학하며 지냈다.
그는 공학도를 꿈꿨지만 사실상 아버지나 다름없었던 백인제의 권유로 의학의 길에 접어든다. 1961년 백병원 3대 원장으로 취임한 백낙환은 1972년 기존의 백병원을 ‘종합병원 서울백병원’으로 견고히 다진다. 나아가 1979년에는 부산백병원과 인제의과대학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상계백병원(1989년), 일산백병원(1999년), 해운대백병원(2010년)까지 개원해 전국 5개 대형병원 3500여 병상으로 성장시킨다. 이미 부산에 백병원이 있었지만 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오면서 부산 사람들에게 진 신세를 갚기 위해 해운대백병원을 세웠다.
이태석 신부, 사랑의 의술 남수단에 전달
의술로 세상을 구한다는 백인제의 인술제세(仁術濟世) 정신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이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1962~2010) 신부다. 10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난 이태석은 9세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1987년 인제의과대학 3회 졸업생이 된 그는 부산백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마친 뒤 육군 군의관으로 군 복무를 하였다. 이때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제대 후 본격적으로 신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2001년 아프리카 케냐로 건너간 뒤 20년 동안 내전의 아픔에 있던 수단으로 옮겨 의료활동을 시작한다.
이태석은 남수단 톤즈에서 반경 100㎞ 내 유일한 의사였다. 마른 풀과 대나무로 급히 만든 움막 같은 진료소에서 한센병, 결핵 등 하루에 200~300명의 환자를 돌봤다. 2004년에는 직접 벽돌을 구워서 건물을 올려 병실 12개의 진료소를 만든다. 학교와 기숙사를 지어 틈틈이 아이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2008년 10월 한국에 들러 건강검진을 받다가 대장암 4기 판정을 받고 만다. 대장암이 간으로 전이되면서 2010년 1월 14일 47세의 삶을 마감한다. 이태석은 세상을 떠났지만 마치 백인제처럼 또 다른 씨앗을 뿌렸다.
이태석의 주선으로 남수단 톤즈 출신의 청년 토마스 타반 아콧과 존 마옌 루벤이 2012년 외국인 특별 전형으로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의사가 되어 봉사하고 싶어 한 두 청년을 위해 이태석이 수단어린이장학회와 국내외 후원자들에게 편지를 쓴 결과 두 청년은 2009년 12월 한국 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고 의과대학에 입학하면서 인제대학교는 두 청년의 학비와 기숙사비를, 수단어린이장학회는 생활비를 지원했다. 이 가운데 토마스 타반 아콧은 최근 한국 의사국가시험에 합격했다.백인제가 뿌린 씨앗을 시작으로 백낙환이 꽃피운 사랑의 향기는 이 땅에 계속 전해질 것이다. 사진=필자 제공
백인제 국내 최초 복막염 수술 등 명의
1941년 백병원 전신 외과의원 개원
납북 후 조카 백낙환 3대 원장 취임
이태석 신부 20년간 남수단 의료활동
백 박사의 ‘인술제세’ 정신 이어 실천
2018년 12월 7일 언론에서 일제히 의료계의 거목인 백낙환(白樂晥) 박사(1926~2018)의 타계 소식을 알렸다. 그는 소아 선천성 거대결장 치료법인 스완슨 수술법, 골반내장 전적출술 등을 국내 최초로 시행한 외과의사로 백병원과 인제대학교의 인제학원 이사장을 지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새삼 그를 있게 한 ‘백인제(白麟濟) 박사’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백’병원과 ‘인제’대학교도 백인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백인제는 1899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졸업했다.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에 1기로 입학해 줄곧 수석을 차지했지만 1919년 인생의 변곡점이 찾아온다.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퇴학과 동시에 10개월여 옥살이를 하고 만다.
암담한 현실에 중국 상하이로 망명할까 했지만 친구가 붙잡았다. 이후 총독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유화 조치로 1920년 4월에 다시 4학년으로 복학할 수 있었다. 이듬해 3월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하지만 3·1운동에 가담한 전력 때문에 당시 졸업과 동시에 자동으로 받게 되는 의사면허증을 받지 못한다. 결국 2년간 총독부의원에서 아무 보수도 없이 외과 마취를 돕는 보조 일을 한 뒤에야 의사면허증을 받을 수 있었다.
시련의 시간이었지만 훗날 마취과 전문의가 없던 시절 마취 기술까지 겸비한 외과의사로 대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핍박 속에서도 그의 나라 사랑은 멈추지 않았다. 1930년 조선의사협회 창립을 주도했고,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백인제 박사, 당대 최고의 명의
그는 당대 최고로 손꼽히는 명의였다. 1928년 4월 구루병 연구로 일본 동경제국대학(도쿄대학교의 전신)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30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인으로는 세 번째였다.
같은 해 모교인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교수로 임명돼 많은 후학을 배출한다.
백인제는 큰 수술에도 능했다. 위궤양, 위암, 유방암, 간담도계 질환, 갑상선 질환 환자 등이 그의 손을 거쳐갔으며, 1936년에는 세계 최초로 장 감압술에 성공한다. 1931년부터 수술 환자에게 수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1938년 혈액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등 미래를 내다보는 시야를 가졌다.
위와 십이지장 질환, 간담도계 질환, 충수돌기염, 복막염 등 외과수술 전반에서 국내 최초, 국내 최다라는 타이틀과 함께 마취와 수혈 경험도 풍부해 그의 명성이 일본과 만주까지 퍼졌다.
그가 병원 경영에 뛰어든 것은 1932년부터다. 의학전문학생 시절 그를 가르친 일본인 스승 우에무라 준지(植村俊二)는 부인이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고향인 일본 나고야로 돌아가기로 하고 1924년부터 서울에서 운영해 오던 외과의원(현 서울백병원 위치)을 애제자인 백인제에게 넘기기로 한다. 당시에는 교수도 개인의원을 운영할 수 있었는데, 백인제는 조선식산은행에서 융자를 받아 인수할 수 있었다.
1936년 11월부터 1937년 1월까지 미국 메이오 클리닉(Mayo Clinic)을 방문한 백인제는 진료, 연구, 교육이 통합된 세계 최고의 비영리 의료기관 형태의 사립병원처럼 조국에 메이오 클리닉에 버금가는 병원을 세우겠다는 꿈을 키운다. 인수한 의원을 1941년 백인제 외과의원으로 정식 개원하면서 이곳에 더욱 집중하려고 교수직을 떠난다.
백인제 외과의원이 개원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환자가 더욱 몰렸다. 30여 병상의 입원실이 부족해 1942년 수술실, 외래진료실, 병실을 증축했다. 광복을 맞이하면서 1946년 12월 17일 자신이 머물던 집을 제외한 모든 사재를 털어 백인제 외과의원을 재단법인화한다. 이것이 사립병원으로는 국내 최초로 민립 공익법인인 ‘재단법인 백병원’이다.
백병원 3대 원장 백낙환, 후학 양성에 힘써
1950년 6·25전쟁은 백인제의 운명을 바꾼다. 같은 해 7월 19일 흥사단원 박현환의 집에서 공산당 정보원에게 동생인 백붕제 변호사와 함께 납북되고 만다.
광복 후 6·25전쟁 발발 이전까지 북의 지식인들이 대거 남으로 내려왔지만 전쟁 중에 납북된 이들이 적지 않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도 백인제를 포함해 외과의 이재복, 김시창, 내과의 이정복, 이돈희, 이종두, 박창호, 생리학교실의 이갑수 교수 등이 납북됐다.
백인제의 빈자리는 컸다. 1951년 백인제의 동서 김희규가 백병원 2대 원장에 취임했지만 재정적 어려움으로 법인 해체 위기에 몰린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한 사람이 바로 최근 타계한 백낙환이다.
백낙환은 백인제의 동생인 백붕제의 아들이다. 백낙환은 출생 5개월 차에 모친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뒤 돌아와 재혼해 지방에서 근무해 백낙환은 중학생 시절부터 큰아버지인 백인제의 집에서 통학하며 지냈다.
그는 공학도를 꿈꿨지만 사실상 아버지나 다름없었던 백인제의 권유로 의학의 길에 접어든다. 1961년 백병원 3대 원장으로 취임한 백낙환은 1972년 기존의 백병원을 ‘종합병원 서울백병원’으로 견고히 다진다. 나아가 1979년에는 부산백병원과 인제의과대학을 세워 후학을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상계백병원(1989년), 일산백병원(1999년), 해운대백병원(2010년)까지 개원해 전국 5개 대형병원 3500여 병상으로 성장시킨다. 이미 부산에 백병원이 있었지만 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 오면서 부산 사람들에게 진 신세를 갚기 위해 해운대백병원을 세웠다.
이태석 신부, 사랑의 의술 남수단에 전달
의술로 세상을 구한다는 백인제의 인술제세(仁術濟世) 정신을 펼친 대표적인 인물이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1962~2010) 신부다. 10남매 중 아홉째로 태어난 이태석은 9세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1987년 인제의과대학 3회 졸업생이 된 그는 부산백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마친 뒤 육군 군의관으로 군 복무를 하였다. 이때 신부가 되기로 결심하고 제대 후 본격적으로 신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2001년 아프리카 케냐로 건너간 뒤 20년 동안 내전의 아픔에 있던 수단으로 옮겨 의료활동을 시작한다.
이태석은 남수단 톤즈에서 반경 100㎞ 내 유일한 의사였다. 마른 풀과 대나무로 급히 만든 움막 같은 진료소에서 한센병, 결핵 등 하루에 200~300명의 환자를 돌봤다. 2004년에는 직접 벽돌을 구워서 건물을 올려 병실 12개의 진료소를 만든다. 학교와 기숙사를 지어 틈틈이 아이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2008년 10월 한국에 들러 건강검진을 받다가 대장암 4기 판정을 받고 만다. 대장암이 간으로 전이되면서 2010년 1월 14일 47세의 삶을 마감한다. 이태석은 세상을 떠났지만 마치 백인제처럼 또 다른 씨앗을 뿌렸다.
이태석의 주선으로 남수단 톤즈 출신의 청년 토마스 타반 아콧과 존 마옌 루벤이 2012년 외국인 특별 전형으로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의사가 되어 봉사하고 싶어 한 두 청년을 위해 이태석이 수단어린이장학회와 국내외 후원자들에게 편지를 쓴 결과 두 청년은 2009년 12월 한국 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고 의과대학에 입학하면서 인제대학교는 두 청년의 학비와 기숙사비를, 수단어린이장학회는 생활비를 지원했다. 이 가운데 토마스 타반 아콧은 최근 한국 의사국가시험에 합격했다.백인제가 뿌린 씨앗을 시작으로 백낙환이 꽃피운 사랑의 향기는 이 땅에 계속 전해질 것이다. 사진=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