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노
<33> 충무급 구축함(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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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5월 16일은 대한민국 해군에게 역사적인 날이다. 그토록 소원했던 구축함(DD·Destroyer) 시대를 활짝 열어젖혔기 때문이다. 우리 해군은 전력증강계획의 하나로 1963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 해군의 플레처급(Fletcher Class) 구축함 3척을 도입했다. 충무·서울·부산함이 주인공이다. 이어 앨런 M. 섬너(Allen M. Sumner)급과 기어링(Gearing)급 구축함을 도입했지만 플래처급 구축함은 한국 해군 현대화의 상징적 존재다. 이 3척의 플래처급 구축함은 1980년대 후반까지 동·서·남해에서 해양주권 수호의 핵심 전력으로 활약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플레처급 개발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자 전승국들은 군함 건조를 경쟁적으로 추진했다. 특히 신흥국들은 앞다퉈 군함 건조 계획을 발표했고, 다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에 따라 전승국들은 1921년 미국 워싱턴에서 군축회의를 개최하고, 다음해 2월 6일 ‘해군 군비제한에 관한 조약’을 맺었다. 그 결과 미국·영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는 주력 함정의 총 톤수 비율을 제한하기로 했다.
미국 해군도 조약의 영향을 받아 구축함은 2000톤 내외의 규모로 건조했다. 그러는 사이 1939년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상황이 달라지자 미국 해군은 2500톤 규모의 플레처급 구축함을 개발한 뒤 1942년부터 순차적으로 175척을 취역시켰다.
플레처급은 미국 해군이 가장 많이 건조한 구축함이다. 그만큼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이전 구축함보다 대형화돼 작전지속 능력이 향상됐다. 선체를 평갑판(Flush Deck) 형태로 설계해 생산성과 내구성도 높아졌다. 터빈엔진은 최대 속력을 38노트(시속 70.4㎞)까지 끌어올렸다.
펀치력도 강화했다. 5인치(127㎜) 주포 5문에 40㎜ 2연장 대공포 10문, 20㎜ 단장 기관포 7문을 장착했다. 어뢰 발사기와 폭뢰투하대, 대잠수함용 전방투척식 박격포(헤지호그)를 갖췄다. 사격통제지휘장치를 구비했으며, 대공·대잠작전 수행 능력이 보강됐다. 바닷속에서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펼쳐지고, 바다 위에서는 함재기가 날아다니면서 취해진 조치였다.
1963년 첫 번째 구축함 획득…충무함 명명
플레처급 구축함은 2차 대전과 6·25전쟁에서 미국 해군의 주력함이었다. 한국 해군은 구축함의 활약을 가까이서 보았다. 연락장교들은 미국 해군 구축함에 편승해 임무를 수행했다. 해군사관생도들도 함상실습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뛰어난 기동력과 강한 화력을 갖춘 꿈의 군함이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한국 해군은 전력 증강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1958년 시작된 ‘새싹계획’은 구축함 획득에 중점을 두고 미국 해군의 구축함 도입을 명문화했다. 한국 해군은 이 계획을 수립할 때 주한 미 해군사령부에 구축함 도입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1955년 1월 29일 제정된 미국의 함정대여법에 의하면 구축함 이상의 함정 대여는 미국 의회의 별도 승인을 받아야 했고, 구축함 획득의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한국 해군은 포기하지 않고 미국을 계속 설득해 구축함 2척을 대여받기로 했다. 1959년 1척, 1962년 1척을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구축함 보유는 쉽게 이뤄지지 않았고 1963년 5월 16일이 돼서야 첫 번째 구축함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한국 해군은 이날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서 어빈함(USS Erben·DD-631)을 인수했다. 함명은 상징성을 고려해 충무함(DD-911)으로 정했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시호(諡號)를 딴 것이다.
두 번째 구축함 인수는 더 지연됐다. 원래 1959년과 1962년에 도입됐어야 했지만 1번함인 충무함이 1963년에야 도입됐고 2번함 인수는 기약이 없었다.
우리 해군이 구축함을 원활하게 운용하려면 최소 4척이 필요했다. 동해와 서해에 1척씩 배치하고, 훈련과 수리를 위해 2척이 더 있어야 했다. 새싹계획 수립 당시에도 한국 해군은 주한 미 해군사령부에 1개 분대(Division) 구축함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했었다.
알레이 버크 제독 도움 2·3번함 추가 도입
1967년 10월 20일 한국 해군에 대한 구축함 대여 안건이 미 의회 상원군사위원회에 올라갔다. 결과는 안타깝게도 ‘부결’이었다. 군사원조 삭감 정책을 추진 중인 상황에서 구축함의 대여는 역행이라는 것. 꿈이 멀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알레이 버크(Aleigh Burck) 제독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1923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버크 제독은 2차 대전에 구축함 전대장과 기동함대 참모장으로 참전해 수많은 공을 세웠다. 6·25전쟁에서는 5순양분대사령관으로 참전해 한국 해군과도 인연이 깊다.
특히 한국 해군의 박찬극(해사 3기·1976년 준장 예편) 제독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박 제독은 버크 제독이 있는 순양함 로스앤젤레스함(USS Los Angeles·CA-135)에서 6개월간 연락장교 임무를 수행했다. 미국 해군 유학 중에도 버크 제독과의 만남을 이어갔다.
박 제독은 구축함 대여 안건이 부결될 당시 해군 무관으로 부임했고, 버크 제독을 찾아갔다. 버크 제독은 예편한 상태였지만 상원군사위원회 러셀(Russel) 위원장과 중진의원들을 만나 한국 해군의 구축함 도입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로부터 5주가 흐른 1967년 11월 하순. 다시 상정된 한국 해군에 대한 구축함 대여 안건이 통과됐다.
그렇게 도입된 함정이 서울함(DD-912)과 부산함(DD-913)이다.
글=윤병노 기자/사진=해군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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