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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최초 구조함…한반도 해역 누비며 함정 구조

윤병노

입력 2018. 11. 21   16:16
업데이트 2018. 11. 21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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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ATA급 구조함<上>


ATA-2 용문함
ATA-2 용문함


선박 구조는 해군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1945년 11월 11일 해방병단 창설 때도 손원일 제독은 미 군정청의 카스튼(Carsten) 소령과 조난 선박 구조 등의 임무에 합의했다. 해양경찰이 창설되기 전에 조난 민간 선박을 구조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해군은 초창기 보조선을 활용해 선박 구조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구조장비가 탑재되지 않은 보조선은 일반 함정과 다름이 없었다.
6·25전쟁으로 구조·예인함 필요성 부각

전문적인 구조·예인함의 도입은 1950년부터 이뤄졌다. 1946년 해방병단이 법적 군사단체인 조선해안경비대로 발족하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으로부터 함정 도입이 대폭 증가했다. 더불어 일반 함정을 지원하고 구조할 수 있는 군함의 필요성도 부각됐다. 특히 전쟁으로 피격되거나 좌초하는 선박이 날로 늘어가자 구조·예인함 도입이 시급해졌다.

우리 해군은 1950년 7월 5일 교통부 산하 부산해운국으로부터 구조함 1척을 인수했다. 이 함정은 교통부가 정부 물자 수송을 위해 미군에서 지원받은 선박으로 예인에 필요한 장비를 구비했다. 해군은 이 함정을 인왕함(ATA-1)으로 명명하고 작전에 투입했다.

인왕함은 해군이 미 해군으로부터 직접 인수하지 않고 6·25전쟁 중 교통부를 거쳐 받은 함정이기 때문에 세부적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다만 1943년 미국 플로리다주 조선소에서 진수됐으며, 광복 이후 한국에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남아 있는 함정 톤수와 크기 등이 1960년대 도입된 ATA(Auxiliary Fleet Tug)급 구조함보다는 작아 서로 다른 급이라 추정된다.  





    

ATA-3 도봉함
ATA-3 도봉함


1962년 미 해군에서 구조함 2척 추가 인수

이후 해군은 AKL(Light Cargo Ship)급 소형 수송함을 구조함으로 임시 운영해오다 1962년 미 해군에서 구조함 2척을 추가 인수했다. 우리 해군은 양도받은 구조함을 용문함(ATA-2)과 도봉함(ATA-3)으로 명명했다.

용문함은 1944년 텍사스주 오렌지 카운티의 조선소에서 진수됐다. 1945년 ATA-198함으로 임무를 시작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 전선에서 활약했다. 1948년에는 키오산퀘(Keosanqua)함으로 명명됐다. 키오산퀘함은 6·25전쟁에도 참전했으며, 1956년 임무가 해제돼 대기상태로 전환됐다가 1962년 한국 해군에 양도됐다.

도봉함은 1944년 텍사스주 포트아서의 조선소에서 진수돼 1945년 ATA-206함으로 임무를 시작했다. 용문함과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1946년 임무가 해제된 뒤 1948년 파이놀라(Pinola)함으로 명명됐으며, 1949년 임무에 재투입됐다. 1956년 다시 대기상태로 전환된 후 1962년 한국 해군에 양도됐다.
 
두 함정은 미 해군에서 소토요모(Sotoyomo)급으로 분류됐다. 소토요모급은 1942년부터 예인구난함으로 건조한 함정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30여 척 이상이 건조됐고, 전후 다수의 동맹국으로 이전됐다. 고압 컴프레서와 크레인 등을 갖춰 우리 해군은 처음으로 구조함의 면모를 갖춘 함정을 운용하게 됐다.
 
인왕함은 노후로 1960년 10월 10일 퇴역했다. 용문함과 도봉함은 1990년대 후반까지 30년 이상을 한반도 해역을 누비며 많은 함정을 구조했다.

 

ATA-1 인왕함
ATA-1 인왕함



문산호 구출 시도·개성정 예인 등에 투입

인왕함은 6·25전쟁 발발 초기 해군에 인수됐다. 문산호 구출을 시도했으며, 목포 근해에서 기뢰에 손상을 입은 개성정(YMS-504)을 부산으로 예인하기도 했다.

1950년 9월 14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북한군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장사상륙작전을 전개했다.

장사상륙작전은 경북 영덕군 장사리에 육군 제1유격대를 상륙시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주력 부대를 유인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해군에 동원된 문산호가 태풍의 영향으로 좌초해 적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작전의 성공을 위해 상륙을 감행했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일주일 동안 혈투를 벌이며 적 200여 명을 사살했다.

해군은 문산호를 구출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문산호에 파견된 미 해군 쿠퍼 상사로부터 상륙부대의 위급한 상황을 보고받은 해군본부는 인왕함을 현지로 급파했다.

9월 15일 오후 10시 부산을 출항한 인왕함은 다음날 오전 7시 현지에 도착해 문산호 구출 작전에 착수했다. 그러나 치열한 전투 중이라 해상공작대의 원활한 작전 수행이 불가능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좌초된 문산호의 상황이 심각했다. 인왕함은 어쩔 수 없이 17일까지 대기하다 결국 철수했다. 이후 해군은 북진작전이 한창이던 1951년 해상공작대를 다시 투입했다.

또 인왕함은 1950년 10월 1일 목포 입구에서 북한군 기뢰에 접촉한 개성정을 부산으로 예인했다. 1953년 1월 5일에는 삼각산함(PC-703)을 진해까지 예인했다.

글=윤병노 기자/사진=해군본부 제공

윤병노 기자 < trylover@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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