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명

오늘의 전체기사

2021.06.13 (일)

HOME > 기획 > 군사 > 국군 건설의 아버지 이범석

정치권 견제로 장관직 사임… 15개월 후 6.25 발발

기사입력 2018. 11. 20   16:21 최종수정 2018. 11. 20   16:25

<41> 국방부 장관 퇴임과 6·25전쟁

6개 연대 증편 등 육군 10만 명으로
병기공장 보수.설립 장비 자급자족 추진
여군 창설 등 8개월간 다대한 업적
장관 물러나면서도 국방력 강화 강조
1951년 자유중국 대사로 발령 받아
  

북한군의 침략으로 6·25전쟁이 벌어지자 남쪽으로 피란하는 국민들.

 

철기의 국방부 장관 재임 기간 8개월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가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국방건설을 위해 이루었던 업적들은 대부분 지금까지도 국군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정책들이었다. 철기는 국군을 창설하면서 국군의 정체성 확립, 이념과 사상의 정립, 정통성 확립 등 국군의 기본과 본질을 확립하는 정책들을 거침없이 추진했다. 그가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철기는 그 외에도 국군의 확장, 장비의 확보, 여군 창설 등 다대한 업적을 남겼다.
철기는 6·25전쟁 발발 바로 1년여 전 국방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가 만든 국방조직 중 국방부 대북정보국과 호국군은 적과 싸우기 위해선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조직이었으나 해체되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다. 이후 국무총리직마저 내려놓은 철기는 반연금 상태에 있다가 전쟁이 발발하자 자유중국(대만)대사로 나가게 된다.

  

국군의 확장과 장비 자급자족 추진

국군부대의 확충에 역점을 둔 철기는 1948년 10월 28일 이후 제16, 17, 18, 19, 20, 21연대 등 6개 연대를 증편했다. 이어 제7여단을 창설함으로써 육군을 10만 명으로 증강했다.

또한 장비의 자급자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국군이 보유했던 장비는 일본군이 남겨놓은 구식 무기와 주한미군이 철수하면서 이양한 소규모의 낡은 장비들뿐이었다.

당시의 재정 형편상 국군의 장비 확보는 미국의 대한(對韓) 군사원조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미군의 지원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다. 철기는 장기적 안목에서 자급자족의 기틀을 단계적으로 준비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이 사용하던 국내 병기 생산공장을 보수하는 한편, 새로운 공장의 설립계획을 서둘러 확정했다. 1948년 11월 25일에 육군 병기공장을, 1949년 초에 해군 병기공장을 설립했다. 병기 자급자족을 위한 준비와 기술 습득을 위한 기초 작업에 착수한 것이었다. 



한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국군.

여군 창설해 인적 자원 활용 확대

철기는 여성 인적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가용 인적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현대전의 성격을 고려한 조치였다. 대한민국 사회구조에서 과거의 봉건사회 유풍을 이른 시간 내에 지양하고, 남녀동등의 민주사회를 건설해 하루속히 선진사회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철기의 지론이었다.

현대사회의 축소판으로서, 또한 남녀협력의 상징적 존재로서 여군 창설을 철기는 결심했다. 마침 미군에도 여군제도가 있어서 군내 반대의견을 무마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숙소, 복장 문제 등은 물론 내무생활 면에서도 지휘관에게 불필요한 신경을 쓰게 한다는 이유로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군제도가 국군 전력에 큰 도움이 된다는 철기의 소신은 부인 마리아와 독립무장투쟁 일선에서 고락을 같이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철기의 이러한 여성관이 국군 내 여군 창설에 반영됐고, 김현숙·김정례 여사 등이 초창기 여군 발전을 이끌었다.

그 후 여군은 많은 발전을 했고, 군 행정 운영 면에도 커다란 공헌을 했다. 나아가 여군제도가 한국 전통사회의 현대화에 기여한 면도 대단히 컸다. 지금은 전투부대 지휘관으로 보임되는 등 여군의 역할과 규모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철기의 심모원려(深謀遠慮)의 결과다.



국방부 장관에서 물러나다

철기는 1949년 3월 21일 퇴임식을 하고 국방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철기의 지나친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정치권의 견제에 따른 결과였다.

철기는 물러나는 마당에서도 국방력 강화를 강조했다. 그는 퇴임사에서 “군은 본래 질만 가지고는 안 되며, 양만 가지고도 안 되는 것이다. 양은 유형의 존재이며, 질은 무형의 존재로서 이것이 함께 종합되어야 한다. 제아무리 질이 우수하더라도 양이 극도로 부족하면 어려움을 능히 극복하지 못한다. 탱크 1대는 잘해야 탱크 3, 4대를 격파할 뿐, 10대나 20대를 제압하지는 못하며, 우수한 포 1문은 적의 포 3, 4문을 제압할 수 있어도 10, 20문을 제압하지는 못한다. 이것은 곧 적합한 양의 필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질의 우열(優劣)에서도 꼭 같은 이치가 적용될 것이다. 질이 졸렬하면 아무리 넉넉한 양을 가져도 소용이 없다. 총을 쏠 줄 모르는 사람은 총을 쏠 줄 아는 사람에게 패하기 마련”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줄곧 주장하던 지도방침인 사병 제일주의와 질과 양의 중요성을 신신당부했다.



6·25전쟁과 철기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은 38선 전 전선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

국방부 장관직과 이어서 국무총리직도 사임한 철기는 서울 북아현동 자택에서 6·25전쟁을 맞았다. 당일 철기는 집에 머물면서 철기를 찾아온 손님들로부터 군 병력이 전방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정작 라디오에서는 별다른 소식을 전하지 않고 있었다. 이 당시 철기는 헌병들에 의해 반연금 상태였다.

6월 26일, 전쟁 발발 바로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에 철기는 대통령 비서로부터 경무대로 급히 들어와 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철기는 대통령을 만나러 경무대로 들어갔다. 이승만은 “아무래도 지금 정세가 긴급하게 되었네. 남의 일처럼 보지 말고 마음속의 모든 감정을 잊어버리고, 오직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와주게”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이어 오전 10시에 국방부에서 대통령의 지시로 국방부 장관 주재의 ‘긴급 현역과 원로 군 경력자 합동회의’가 열렸다.

철기 외에도 신성모 국방, 육·해·공군 참모총장, 참모학교장 김홍일, 전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전 통위부장 유동렬, 전 광복군사령관 지청천, 전 1사단장 김석원 등도 참석했다. 여기서 철기는 김홍일·김석원 장군과 함께 한강선 방어를 강력히 주장했다. 38선을 연한 방어선이 붕괴된 상황에서 시·공간적으로 전선을 수습할 수 있는 방책은 한강선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미 무너진 서울 북방에서의 결전을 주장하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을 설득하지 못했다. 작전을 해본 사람과 해보지 못한 사람의 상황을 보는 안목의 차이였다. 결국 서울이 무너진 후 시흥지구 방어사령부가 급조 편성됐다. 광복군 출신인 김홍일 장군이 사령관이 되어 한강방어선을 그나마 사흘간 지켜냈다. 이로 인해 낙동강방어선이 형성될 수 있었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조야에서 나오는 국방부 장관 교체를 주장하는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이승만 참모들은 철기의 복귀를 건의했다. 이승만은 존 무초 미국대사와 상의했는데, 무초 대사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철기를 상당히 꺼리는 입장이었다. 무초 대사는 영어에 능통한 신성모를 유임시키기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에 이승만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신 육군참모총장을 경질했다.

1951년 1월, 전쟁이 한창인 상태에서 철기는 자유중국 대사로 발령을 받아 출국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에도 철기가 국내에 있는 것을 불편해했다. 철기는 8개월 뒤에나 고국으로 귀국한다. 사진=필자 제공

<박남수 철기 이범석장군 기념사업회장>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에 대한 의견 개 있습니다. 로그인 후에 작성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