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포함, 해사30기 생도 순항훈련서
인도·이란·사우디·오만 최초 방문
고속수송함 대부분 1980년대 퇴역
경남함은 41년여간 해양수호 매진
경남함, 선상 반란 ‘포리호’ 탑승객 인수 우리 해군의 5인치 함포 시대를 열어젖힌 APD(Auxiliary Personnel Destroyer)급 고속수송함은 1980년대 퇴역할 때까지 ‘해상 수호신’ 역할을 했다. 대간첩 작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이색적인 사연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남함(APD-81)이다.
1960년 12월 16일 밤. 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여객선 ‘포리호’에서 선상 반란이 일어났다. 탑승객 일부가 모의해 포리호를 납북시키려 한 것이다.
그로부터 10시간이 흐른 뒤 경찰이 이 같은 사실을 해군에 통보했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연락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12월 17일에는 국방부 장관이 해군본부까지 찾아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붙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해군은 미 해군에 협조 요청을 하고, 중국 청도와 북한 진남포로 향하는 두 항로에 함정을 배치했다. 이틀 후 포리호의 행방이 전해졌다. 중국으로 향하던 포리호가 대흑산도 부근 해상에서 거센 파도에 침몰했다는 것.
다행히 탑승객들은 근처를 지나가던 일본 어선 ‘동해환’에 구조됐다. 동해환 선장은 구조 사실을 일본 정부에 보고했고, 이는 다시 미군을 거쳐 한국 정부에 통보됐다. 경남함은 제주도 근해에서 일본 어선 동해환을 만나 반란을 일으킨 납북 기도자를 포함한 탑승객 전원을 넘겨받았다.
공군과 합동작전…대간첩 작전 임무 수행 1970년 7월 27일 밤 11시 무렵. 경북 강구면 육군 해안초소 근무자가 미식별 선박을 발견하고 위협사격을 했다.
의아선박은 대응사격을 하면서 동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주했다. 간첩선이었다. 육군 해안초소는 이러한 상황을 전파했고, 해군은 인근을 경비하던 함정에 추적·차단을 지시했다. 공군 전투기도 급발진했다.
다음 날 오전. 속초 동북쪽 해상에서 차단작전을 수행하던 경남함 레이더에 간첩선이 잡혔다. 전투배치를 발령한 경남함은 전속 기동하며 공군 전투기를 현장으로 유도했다. 거리가 1만 야드로 가까워지자 경남함의 5인치 함포가 불을 뿜었다. 전투기도 공격에 가세했다. 한 시간 후 전투기가 화염에 휩싸인 채 침몰하는 간첩선을 확인했다.
1971년 10월 29일 의아선박이 있다는 신고가 목포경찰서에 접수됐다. 목포경찰서는 해군에 이를 통보했다.
해군은 10월 30일 소허사도 인근 해상에서 경비 중이던 경남함에 탐색을 지시했다. 오전 8시 무렵 목포경찰서는 소허사도에서 간첩선과 간첩의 은신처를 발견하고, 해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경남함이 현장으로 향했다. 소허사도 인근에 도착한 경남함은 상륙주정으로 해상기동타격대를 상륙시킨 뒤 함포 사격 위치로 이동했다. 이어 경남함이 5인치 함포를 발사하고, 해상기동타격대가 간첩이 숨어 있는 동굴로 진입했다. 상륙주정은 간첩선을 나포했다. 해상기동타격대는 동굴 수색 작전을 펼쳐 간첩 4명을 사살했다.
1960~70년대 해사 생도 순항훈련 함정 1975년 2월 26일 오후 소청도 서남쪽 해상에서 경비 중이던 아산함(APD-82) 레이더에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남하하는 북한 어선 2척이 포착됐다. 아산함은 인근 경비함에 관련 내용을 통보하고 북한 어선을 추적했다. 오후 6시 무렵 아산함이 정지하라는 명령에 불응한 북한 어선에 위협사격을 했다. 북한 어선은 인근의 어선단과 합류했다. 아산함이 북한 어선단에 900야드까지 접근해 탐조등을 비췄다. 선명은 신의주, 연통에는 인공기가 그려져 있었다. 아산함의 통보를 받고 도착한 서울함(DD-92)이 북한 어선을 나포하기 위해 접근했다. 그 순간 북한 어선 1척이 서울함을 향해 돌진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시도한 북한 어선은 순식간에 침몰했다. 인명을 구조할 틈도 없었다. 나머지 북한 어선은 모두 북쪽으로 도주했다.
고속수송함은 1960~70년대 해군사관학교(해사) 생도 순항훈련의 주력 함정이었다.
1964년 경남함이 해사 19기를 태우고 동남아를 다녀온 이래 1965년 경남함, 1969년 아산함·제주함, 1970년 경북함·전남함, 1971년 아산함·웅포함, 1972년 경북함·제주함, 1973년 웅포함·전남함, 1974년 경북함·제주함, 1975년 웅포함, 1976년 전남함, 1977년 경남함, 1978년 경남함이 뒤를 이었다. 특히 웅포함은 1975년 해사 30기 생도와 함께 최초로 인도·이란·사우디·오만을 방문했다.
대부분의 고속수송함은 노후화로 1980년대 중반에 퇴역했지만 경남함은 2000년 12월 29일 퇴역했다. 1959년 한국 해군에 도입됐으니 무려 41년여를 해양 수호에 매진한 것이다. 글=윤병노 기자/사진=해군본부 제공
전문가 해설 근해 방어 수준서 인접국 전력투사로 해군력 업그레이드
전후 정비기(1953~1964) 한국 해군의 전력 증강은 순조롭게 추진됐다. 6·25전쟁을 계기로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원동력이었다. 이 기간 한미 해군은 어느 때보다 활발히 교류했고, 유대관계를 끈끈히 유지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 해군은 해군력 증강 5개년 계획(1954~1958)에 이어 4개년 계획(1959~1962)을 수립하고, 미국으로부터 많은 함정을 도입해 질적·양적으로 성장했다.
이 계획에 따라 도입된 함정이 5인치 함포를 장착한 APD(고속수송함)와 DD(구축함)였다. 이를 통해 우리 해군은 근해 방어 해군력 수준에서 인접국 전력투사 해군력으로 능력을 강화했다.
APD 1번함인 경남함은 이색 기록이 많았다. 사관생도 순항훈련 함정은 연속으로 참가하지 않는 것이 통상적인데, 경남함은 1977~1978년 연속으로 참가했다. 이는 전년도 순항훈련과 함정 전비태세검열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경남함은 1978년 순항훈련에서 해사 33기 생도를 태우고 미국-캐나다-괌-하와이-샌프란시스코-시애틀-캐나다 밴쿠버-하와이-괌을 거쳐 진해로 복귀하는 장거리 항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웅포함, 해사30기 생도 순항훈련서
인도·이란·사우디·오만 최초 방문
고속수송함 대부분 1980년대 퇴역
경남함은 41년여간 해양수호 매진
경남함, 선상 반란 ‘포리호’ 탑승객 인수 우리 해군의 5인치 함포 시대를 열어젖힌 APD(Auxiliary Personnel Destroyer)급 고속수송함은 1980년대 퇴역할 때까지 ‘해상 수호신’ 역할을 했다. 대간첩 작전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이색적인 사연도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경남함(APD-81)이다.
1960년 12월 16일 밤. 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여객선 ‘포리호’에서 선상 반란이 일어났다. 탑승객 일부가 모의해 포리호를 납북시키려 한 것이다.
그로부터 10시간이 흐른 뒤 경찰이 이 같은 사실을 해군에 통보했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연락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12월 17일에는 국방부 장관이 해군본부까지 찾아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붙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해군은 미 해군에 협조 요청을 하고, 중국 청도와 북한 진남포로 향하는 두 항로에 함정을 배치했다. 이틀 후 포리호의 행방이 전해졌다. 중국으로 향하던 포리호가 대흑산도 부근 해상에서 거센 파도에 침몰했다는 것.
다행히 탑승객들은 근처를 지나가던 일본 어선 ‘동해환’에 구조됐다. 동해환 선장은 구조 사실을 일본 정부에 보고했고, 이는 다시 미군을 거쳐 한국 정부에 통보됐다. 경남함은 제주도 근해에서 일본 어선 동해환을 만나 반란을 일으킨 납북 기도자를 포함한 탑승객 전원을 넘겨받았다.
공군과 합동작전…대간첩 작전 임무 수행 1970년 7월 27일 밤 11시 무렵. 경북 강구면 육군 해안초소 근무자가 미식별 선박을 발견하고 위협사격을 했다.
의아선박은 대응사격을 하면서 동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도주했다. 간첩선이었다. 육군 해안초소는 이러한 상황을 전파했고, 해군은 인근을 경비하던 함정에 추적·차단을 지시했다. 공군 전투기도 급발진했다.
다음 날 오전. 속초 동북쪽 해상에서 차단작전을 수행하던 경남함 레이더에 간첩선이 잡혔다. 전투배치를 발령한 경남함은 전속 기동하며 공군 전투기를 현장으로 유도했다. 거리가 1만 야드로 가까워지자 경남함의 5인치 함포가 불을 뿜었다. 전투기도 공격에 가세했다. 한 시간 후 전투기가 화염에 휩싸인 채 침몰하는 간첩선을 확인했다.
1971년 10월 29일 의아선박이 있다는 신고가 목포경찰서에 접수됐다. 목포경찰서는 해군에 이를 통보했다.
해군은 10월 30일 소허사도 인근 해상에서 경비 중이던 경남함에 탐색을 지시했다. 오전 8시 무렵 목포경찰서는 소허사도에서 간첩선과 간첩의 은신처를 발견하고, 해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경남함이 현장으로 향했다. 소허사도 인근에 도착한 경남함은 상륙주정으로 해상기동타격대를 상륙시킨 뒤 함포 사격 위치로 이동했다. 이어 경남함이 5인치 함포를 발사하고, 해상기동타격대가 간첩이 숨어 있는 동굴로 진입했다. 상륙주정은 간첩선을 나포했다. 해상기동타격대는 동굴 수색 작전을 펼쳐 간첩 4명을 사살했다.
1960~70년대 해사 생도 순항훈련 함정 1975년 2월 26일 오후 소청도 서남쪽 해상에서 경비 중이던 아산함(APD-82) 레이더에 북방한계선(NLL)을 넘어 남하하는 북한 어선 2척이 포착됐다. 아산함은 인근 경비함에 관련 내용을 통보하고 북한 어선을 추적했다. 오후 6시 무렵 아산함이 정지하라는 명령에 불응한 북한 어선에 위협사격을 했다. 북한 어선은 인근의 어선단과 합류했다. 아산함이 북한 어선단에 900야드까지 접근해 탐조등을 비췄다. 선명은 신의주, 연통에는 인공기가 그려져 있었다. 아산함의 통보를 받고 도착한 서울함(DD-92)이 북한 어선을 나포하기 위해 접근했다. 그 순간 북한 어선 1척이 서울함을 향해 돌진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시도한 북한 어선은 순식간에 침몰했다. 인명을 구조할 틈도 없었다. 나머지 북한 어선은 모두 북쪽으로 도주했다.
고속수송함은 1960~70년대 해군사관학교(해사) 생도 순항훈련의 주력 함정이었다.
1964년 경남함이 해사 19기를 태우고 동남아를 다녀온 이래 1965년 경남함, 1969년 아산함·제주함, 1970년 경북함·전남함, 1971년 아산함·웅포함, 1972년 경북함·제주함, 1973년 웅포함·전남함, 1974년 경북함·제주함, 1975년 웅포함, 1976년 전남함, 1977년 경남함, 1978년 경남함이 뒤를 이었다. 특히 웅포함은 1975년 해사 30기 생도와 함께 최초로 인도·이란·사우디·오만을 방문했다.
대부분의 고속수송함은 노후화로 1980년대 중반에 퇴역했지만 경남함은 2000년 12월 29일 퇴역했다. 1959년 한국 해군에 도입됐으니 무려 41년여를 해양 수호에 매진한 것이다. 글=윤병노 기자/사진=해군본부 제공
전문가 해설 근해 방어 수준서 인접국 전력투사로 해군력 업그레이드
전후 정비기(1953~1964) 한국 해군의 전력 증강은 순조롭게 추진됐다. 6·25전쟁을 계기로 체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원동력이었다. 이 기간 한미 해군은 어느 때보다 활발히 교류했고, 유대관계를 끈끈히 유지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국 해군은 해군력 증강 5개년 계획(1954~1958)에 이어 4개년 계획(1959~1962)을 수립하고, 미국으로부터 많은 함정을 도입해 질적·양적으로 성장했다.
이 계획에 따라 도입된 함정이 5인치 함포를 장착한 APD(고속수송함)와 DD(구축함)였다. 이를 통해 우리 해군은 근해 방어 해군력 수준에서 인접국 전력투사 해군력으로 능력을 강화했다.
APD 1번함인 경남함은 이색 기록이 많았다. 사관생도 순항훈련 함정은 연속으로 참가하지 않는 것이 통상적인데, 경남함은 1977~1978년 연속으로 참가했다. 이는 전년도 순항훈련과 함정 전비태세검열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경남함은 1978년 순항훈련에서 해사 33기 생도를 태우고 미국-캐나다-괌-하와이-샌프란시스코-시애틀-캐나다 밴쿠버-하와이-괌을 거쳐 진해로 복귀하는 장거리 항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