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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단에 日·만주군 출신 다수…육사 키워 세력 줄여

기사입력 2018. 11. 13   15:31 최종수정 2018. 11. 13   15:36

<40> 국군의 정통성 확립

 광복 후 미 군정이 조선경비대 창설
일본군·만주군 출신 적극 참여 반해
독립군·광복군 “정통성 없다” 기피
철기, 국군 인적 정통성 세우기 주력
육사 입교 확대·특별기 임관제도 실시
日·만주군 출신 75%→20% 대폭 감소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이 국군으로 편입된 조선경비대 일선 부대를 순시하고 있다.

광복 1주년을 맞아 분열식을 하고 있는 조선경비대.

국군의 인적 정통성이란 대한민국 독립에 기여한 세력이 신생 국군의 중심이냐 하는 문제다. 우리 국군 역사에서 이 부분은 시비와 왜곡의 대상이었다. 그 이유는 국군 창설 시 편입시킨 조선경비대에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다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광복 직후 설립된 군사영어학교와 조선경비대사관학교의 주축 세력이기도 했다.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돼 새롭게 국군으로 편입된 이후에도 자신들이 우리 군의 리더 집단이라고 생각했다.

이 문제는 광복 후 군사경력자들이 매우 부족했던 상황에서 광복군 출신들의 미 군정 조선경비대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됐다. 당시 미 군정은 조선경비대를 만들면서 희망자 중심으로 이들을 수용했다. 그리고 이때 국내로 들어와 있던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은 여기에 적극 참여했다.

이들 모두가 일제에 부역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독립국가의 군대로서 대한민국 독립의 탄압세력이었던 일본 제국주의 군대나 그 아류인 만주군에 있었던 사람들이 신생 독립국가 국군의 중심세력이 되는 것은 분명 모순이었다.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의 철기는 국방부 장관 부임과 동시에 이 문제를 적극 해결하고자 했다.


조선경비대 1연대 장병들이 ‘조선경비대’ 현판이 붙은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국군 출범 전 조선경비대의 실상

광복 직후 조선경비대 창설 이전에는 군사영어학교가, 경비대 창설 이후에는 조선경비대사관학교와 조선해안경비대사관학교가 장교 양성 기관이었다. 국군 출범 시 편입시킨 조선경비대에는 군사영어학교 출신과 조선경비대사관학교 6기까지의 출신들이 장교단의 주축을 이루었다.

미 군정 당국이 경비대 창설을 계획하고 있을 당시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은 간부 양성 문제였다. 미 군정 당국은 필요한 간부를 양성할 목적으로 우선 과거 군사경력을 가진 사람 중 희망자 중심으로 기회를 부여했다. 미 군정은 이들에게 기초 군사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1945년 12월 5일 군사영어학교를 개설했다.

그런데 군사영어학교 창설 시 광복군 출신들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응시를 거부했다. 따라서 군사영어학교 입교자들은 자연히 당시 군사영어학교 부교장(교장은 미군)이었던 만주군 중교(중령) 출신 원용덕과 미 군정 고문이었던 일본군 대좌(대령) 출신인 이응준이 추천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군사영어학교는 1946년 4월 30일 폐교될 때까지 총 200명이 입교해 110명이 졸업했다. 졸업생 출신별로 보면 일본육사 출신 13명을 포함한 일본군 출신이 87명, 만주군 출신이 21명, 광복군 출신이 2명으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압도적이었다.

한편, 미 군정은 군사영어학교를 1946년 4월 30일에 해체하고, 5월 1일부로 태릉에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를 창설했다. 이날 남조선경비대사관학교 첫 입학생 88명이 입학선서를 하고 1기생으로 입학했다. 초대 교장은 일본육사 출신으로, 군사영어학교를 나온 이형근 소령이었다.

이후 정부 출범 전까지 6개 기수 1254명이 남조선경비대사관학교를 거쳐 장교로 임관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은 1968년까지 한국군의 수뇌부를 형성했다. 훗날 이들과 함께 미 군정하의 경비대사관학교를 졸업한 군 간부들은 그들 세력의 기반인 경비대가 국군의 모체임을 강력히 주장했다.



육군사관학교 입교 확대로 인적 정통성 확립

국군의 장교단은 정부 출범 시 해군을 제외하고 군사영어학교 출신 110명과 경비대사관학교 출신 1254명이 장교단의 전부였다.

철기가 국방 최고책임자로 부임하면서 국군의 인적 정통성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핵심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반도를 식민 지배했던 일본군 출신과 그 아류인 만주군 출신이 군의 주력이라는 현실의 해결과, 경비대에 참여하지 않고 아직도 군 밖에 있는 군사경력자들의 군내 흡수였다.

철기는 이를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바로 육군사관학교 입교생 확대와 특별기 임관제도였다.

국방부 장관에 취임하자마자 철기는 미 군정 협력을 거부하며 정부 수립을 기다리고 있던 광복군 출신들에게 대거 입대를 요청했다. 해외에 체류하고 있던 김홍일 장군과 신성모의 귀국을 알선하고, 오광선·안춘생·이준식·박영준·권준·장흥·김관오 등을 끌어들였다. 한편 유승열·안병범·신태영·김석원·백홍석·이대영·이종찬·이형석·이용문 등 일본군 출신이지만 능력 있는 사람들도 영입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1948년 8월 9일 입교한 육군사관학교 7기생은 당일 입교한 602명 외에도 정부 출범 직후인 8월 17일부터 특별기와 후기를 추가로 받아들여 1096명이 임관했다. 그리고 8기생은 정기 입교자 외에 특별기 4개 기가 추가돼 1848명이 입교, 임관했다.

군사영어학교 수료 2개 기 110명과 경비대사관학교 1~6기까지의 졸업생 1254명을 합해 모두 1364명이란, 기존 장교단을 2배 이상 압도하는 숫자가 군 장교단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제7기 특별반에는 김관오·김국주·장흥이 등이 입교했다. 8기 특별반에는 이준식·오광선·안춘생·박영준·권준·장호강·김영일·전성호 등이 입교했다. 그 외에도 철기 후임으로 광복군 참모장을 지냈던 김홍일 장군, 제1지대장을 지낸 채원개가 특임으로 임관했다. 최용덕과 김구 선생의 자제 김신은 공군으로 군에 들어왔다.

이로써 그동안 군 참여에 은인자중하던 군 유경험자들 그룹이 대거 군에 들어오게 됐다.

또한, 사회의 청년단체 요원들도 대거 군에 들어왔다. 철기의 민족청년단, 지청천 장군의 대동청년단, 이북에서 월남한 서북청년회·대동강동지회·압록강동지회 등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 그들이다.

철기가 육군사관학교와 관련한 조치로 군과 사회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하다.

첫째, 군의 인적 정통성과 정체성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기존 장교단이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으로 75%가량 채워졌던 비율을 일거에 역전시켰다. 이로 인해 6·25전쟁 직전에는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20% 수준으로 희석됐다.

둘째, 육군사관학교 7기생과 8기생들은 6·25전쟁 때 최전선에서 대한민국을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구해내는 주역이 됐다. 특별기 임관자들은 사단장 이상 고급지휘관으로, 정규 기수 임관자들은 중·소대장으로서 공산주의 침략을 몸으로 막아냈다.

셋째, 이들이 군에서 체득한 선진 미국의 행정과 조직관리 능력은 이후 대한민국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넷째, 철기는 국군이 광복군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광복군 출신을 육군사관학교장으로 임명하는 전통을 세웠다.

미 군정 시절 경비대사관학교까지는 일본군 출신들이 사관학교 교장을 했다. 그러나 이범석 장관 재임 후부터는 광복군 정신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광복군 출신들이 학교장을 이어서 맡았다. 6대 학교장 최덕신(광복군), 7대 김홍일(광복군 참모장), 8대 이준식(광복군 제1지대장), 9대 안춘생(광복군 2지대) 장군이 그들이다.

군의 인적 정통성은 국군 정통성의 핵심이다. 독립군과 광복군 출신인 철기가 국방부 장관이었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박남수 철기 이범석장군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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