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미 육군 개혁이야기

장군들에게 ‘야전교범 직접 작성·훈련할 것’ 지시

입력 2018. 11. 05   15:41
업데이트 2018. 11. 0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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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환영받지 못한 혁신가, 윌리엄 드푸이 장군 (상)-1976년판 야전교범 100-5 [작전] 비하인드 스토리

1974년 각 병과 학교장 등에 서신
미팅날 부실한 숙제에 ‘과업’ 강조
“군대도 교육훈련 통해 미래대비”
마찰·갈등 끝 ‘육군 교과서’ 탄생 
  
윌리엄 드푸이 장군
윌리엄 드푸이 장군
윌리엄 드푸이 장군

1976년판 [작전]의 초판본
1976년판 [작전]의 초판본
1976년판 [작전]의 초판본

제1대 미 교육사령관 윌리엄 드푸이(William E. DePuy) 장군이 1974년 10월 10일, 예하 병과 학교장 8명에게 서신을 보냈다. “나는 우리가 함께 미 육군의 주요 야전교범을 썼으면 합니다. 

그 기한은 1976년 6월 30일까지로 하겠습니다. (중략) 조만간 미팅을 열겠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야전교범 100-5’의 초안을 감수할 것입니다. 미팅 일주일 전에 교범 초안을 보내겠습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과업을 부여합니다. 항공학교장은 ‘육군항공’ 교범 초안을 완성해 일주일 전에 참석자들에게 보내시오. 보병학교장은 ‘대전차 작전’에 대해 기갑학교장과 토의해 마찬가지로 결과물을 일주일 전에 보내시오. 여러분이 보낸 내용을 가지고 미팅 날 토의할 것입니다.” 

드푸이 장군은 각 병과 학교장에게 직접 분야별 야전교범을 쓰고, 한데 모여서 감수할 것을 지시했다. 서신을 받은 장군들은 황당함을 넘어 이를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관의 지시인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드푸이 장군은 초대 교육사령관으로 육군장관과 참모총장으로부터 교리 및 전투 발전의 전권을 위임받은 상태였다. 

드푸이 장군은 융통성 없는 원리원칙주의자로 유명했다. 그런데도 장군 중 일부는 ‘설마 진짜로 교범을 쓰게 하
고 개인별 과제를 내주겠어?’ 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정된 미팅 날, 어떤 이는 골프채를 들고 오고 또 어떤 이는 부하들을 시켜 만든 개조식 안을 가지고 왔다. 

드푸이 장군은 ‘골프채를 사용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면박을 주었고, 개조식 안에 대해서 ‘애들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조금이라도 교리와 관련 없는 말을 하면 “나중에 다른 데 가서 하시오” 하고 대번에 잘랐다. 

첫 미팅 말미에 드푸이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충분한 토의, 충분한 보고를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육군이 어떻게 싸울 것인가(how the Army intended to fight)’에 대한 권위 있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이 결정은 군사교리 발간물을 통해 제도화되고 지속돼야 합니다. 다음 번 미팅에 여러분이 각자의 안을 가지고 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직접 작성할 것을 권장합니다. 내가 지시한 각 병과별 야전교범 작성은 여러분 개인의 과업입니다.” 그는 ‘개인의 과업’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고 한다.
이렇게 미 육군 주요 직위자들이 1974년 말부터 1976년 중순까지 자신에게 부여된 ‘숙제’를 수행했다. 참모부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야전교범 초안의 상당 부분을 장군들이 직접 썼다. 그리고 지정된 날에 정기적으로 모여 함께 감수하고 밤늦게 남아 직접 수정했다. 타자를 못 치는 사람은 손으로 일일이 썼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드푸이 장군은 ‘자신이 작성한 야전교범대로 직접 훈련해 볼 것’을 지시했다. 장군들은 생도나 병사와 똑같은 입장이 돼 교육훈련을 받았다. 

1976년판 [작전(Operations)]은 군사교리의 대표적 혁신 사례로 꼽히며 현대적 야전교범의 전형으로 평가받는다(발간과 함께 치열한 비판과 논란이 일었는데 교범의 내용이 야전에서 이슈가 된 그 자체도 혁신이었다). 1976년판 [작전]은 ‘군사교리’가 군의 중심이며 핵심 도구라고 규정했으며, 육군이 팀으로 싸워 이기기 위한 활동의 기준과 절차를 과학적으로 제시한 공이 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도 자주 사용하는 ‘하우 투 파이트(How To Fight)’ 개념도 이 교범에 처음 등장했다.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마찰과 갈등, 노골적인 반대가 얼마나 컸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드푸이 장군은 ‘21세기를 준비한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었기에 뜻을 굽히지 않고 밀어붙였다. 그는 국가의 미래 대비 투자가 교육에서 시작되듯, 군대도 교육훈련을 통해 장차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믿었다. 

야전교범은 육군의 교과서였다.
드푸이 장군은 야전교범의 내용이 가르치기 쉽고 배우기 쉬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를 ‘입문 편람(how to handbook)’ 수준으로 기술하기로 했다. 기존 교범에 있던 클라우제비츠·손자병법 관련 내용을 ‘현학적’이라며 빼기까지 했다(이 결정을 놓고 전우였던 잭 쿠쉬맨 장군과 대립하다가 의절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흔히들 말하는 ‘중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교범을 써야 한다’는 말이 이때 유행했다. 

그러나 작전과 전술이 어디 그리 쉬운가? 전장에서의 사고와 실천은 복잡하고 어렵다. 이에 드푸이 장군이 고른 해법은 ‘선택과 집중’이었다. “유럽 전장에서 미 육군이 어떻게 싸울 것인가(HTF; How To Fight)”에 초점을 맞춘 교범을 구분 발간하기로 한 것이다(예를 들자면 100-5 [작전], 7-10 [보병소총중대], 71-2 [전차 및 기계화보병 특수임무대대], 90-3 [사막 작전] 등이 HTF 교범이었다). 

드푸이 장군은 ‘모든 것에 다 대비하는 것은 아무것도 대비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부연 설명했다. (계속)

남보람 소령/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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