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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 미군 지원 임무 한미동맹 살아있는 증인

입력 2018. 10. 31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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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미군 속 대한민국 국군 ‘카투사’


지난 5월 15일 서울 용산미군기지 내 피크닉 에어리어에서 열린 카투사 위크에 참가한 카투사 장병과 주한미군 장병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지난 5월 15일 서울 용산미군기지 내 피크닉 에어리어에서 열린 카투사 위크에 참가한 카투사 장병과 주한미군 장병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한국전 투입 미군의 병력 턱없이 부족

맥아더 발상, 1950년 미7사단 첫 배치

인천상륙작전 8637명 투입 맹활약해


처음엔  미군과 임무 수행 ‘전우조’

경계근무·탄약운반 등 든든한 지원

현재 3000명 한미연합작전에 최선


지난 5월 15일 서울 용산미군기지 내 피크닉 에어리어에서 열린 카투사 위크에 참가한 카투사 장병과 주한미군 장병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방일보 DB

카투사(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는 주한 미군에 배속된 대한민국 국군을 일컫는다. ‘KATUSA’는 영문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용어다. 카투사는 6·25전쟁 발발 이후 생긴 일종의 병역제도로서 주한 미 육군을 지원하기 위해 미8군에 근무하는 국군 부사관과 병사들을 지칭한다. ‘국군 속의 미군’을 의미하는 주한 미 군사고문단(KMAG)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카투사 제도는 1950년 8월 15일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과 유엔군사령관 겸 미 극동군사령관이던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元帥)의 합의에 따라 이뤄졌다. 설치 이유는 미군의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고, 나아가 전쟁에 투입되는 미 지상군 부대의 전투 임무 수행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6·25전쟁 시 미 지상군이 투입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7월이었다. 그때 상황은 미군에게 최악이었다.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면서 한국에 투입된 미군 부대는 미 본토 병력이 아니라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8군 예하의 사단들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점령 임무를 위해서 미8군 예하 4개 사단이 있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남쪽 규슈(九州)지역의 미 24사단, 북쪽의 미 25사단과 미 1기병사단, 그리고 홋카이도(北海島)의 미 7사단이었다.

그런데 이들 일본 주둔 미군사단들은 전투력 발휘에 충분한 구조가 아니었다. 병력 3분의 1이 감소(減少)한, 전투에 부적합한 편성이었다. 원래 사단의 1개 보병대대는 3개 중대, 1개 보병연대는 3개 대대인데 반해, 6·25전쟁 발발 당시 주일 미군 사단들은 1개 보병대대가 2개 중대, 1개 보병연대가 2개 대대로 편성돼 있었다. 포병부대도 마찬가지였다. 평시체제에서 단순한 점령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1974년 4월 당시 미4유도탄사령부에 근무하는 카투사 장병들이 훈련하는 모습.     필자 제공
1974년 4월 당시 미4유도탄사령부에 근무하는 카투사 장병들이 훈련하는 모습. 필자 제공



그런 상태에서 1950년 6월 30일 워싱턴에서 미 지상군 참전이 결정되자,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규슈 지역의 미 24사단을 가장 먼저 한국전선에 보냈다. 이어 미 25사단과 미 1기병사단이 차례로 파병됐다. 이 모두가 인천상륙작전 이전인 1950년 7월 한 달 동안 이뤄졌다.

하지만 미 지상군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전선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선은 계속 남쪽으로 밀려 최후의 방어선이라고 할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그때 유엔군사령부가 설치돼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임명된 맥아더 장군은 “한국에서 던커크(Dunkirk)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던커크는 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의 구데리안(Heinz W. Guderian) 장군이 지휘하는 기갑군단에 밀려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제대로 전투 한 번 못하고 영국으로 철수하기 위해 프랑스 북부의 항구도시 던커크로 철수한 상황을 두고 한 말이다.

맥아더의 그런 ‘불퇴전(不退轉)의 의지’를 간파한 미 8군사령관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은 낙동강 전선을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각오에서 ‘사수명령(死守命令, Stand or Die)’을 내렸다. 죽음으로써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자는 결의였다.

당시 전선 상황이 미국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악화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6·25 이전 소련으로부터 전차와 전투기를 비롯한 현대식 무기와 장비를 지원받고, 중국으로부터는 중공군에 소속돼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전투 경험이 많은 5만∼6만 명에 달하는 한인(韓人) 병사를 지원받은 북한군의 전력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전선에 뛰어든 미 지상군의 전투력이 북한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미군에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병력 부족이었다. 원래 감소 편성돼 있던 주일 미군 사단이 병력이 부족한 상태로 투입된 데다, 본토 병력이 투입되기에는 시간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될 미 7사단은 앞서 투입된 미군 사단들에 병력을 지원해 줬기 때문에 병력 부족이 더 심했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어떻게 해서든지 당장 부족한 병력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래서 착안한 것이 바로 한국군을 미군에 배속시켜 싸우게 하는 것이었다. ‘미군 속에 국군을 만든다’는 기발한 구상이었다. 그렇게 해서 카투사 제도가 도입됐다. 맥아더 사령부의 요청을 받은 이승만 정부도 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해서 카투사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때가 1950년 8월 중순이었다.

카투사는 미 7사단부터 먼저 지원됐다. 1950년 8월 16일 313명이 미 7사단에 먼저 배속됐고, 이후 한국전선에 투입된 다른 미군 사단들까지 카투사를 지원하게 됐다. 특히 인천상륙작전에 선발된 미 7사단에는 카투사 8637명이 지원됐다. 미 7사단 전체의 3분의 1을 훨씬 넘는 엄청난 숫자였다. 이후 카투사는 미군 사단의 소총중대 및 포병중대에 100명씩 배치됐다. 그 결과 카투사가 가장 많이 배치될 때는 2만7000명에 이르렀다.

미군에 배속된 카투사들은 처음에는 ‘전우조(戰友組·Buddy System)’라 하여 미군과 함께 짝을 이루어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면서 카투사만으로 이뤄진 분대나 소대를 편성해 운영했다. 이때는 미군 장교나 부사관들이 카투사 부대를 지휘했다. 카투사 제도가 자리를 잡으면서 최초 도입됐던 전우조는 폐지됐다.

6·25전쟁 시 미군에 배치된 카투사들은 정찰이나 순찰 등 경계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고, 때로는 기관총·박격포·무반동총 등 중화기와 탄약을 험한 지형을 따라 운반하기도 했으며,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위장을 하는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미군의 작전을 지원했다. 특히 카투사들은 언어 장벽, 훈련 부족, 전술·전기 결여 등 어려운 전장 환경에도 불구하고 전투현장에서는 미군과 똑같이 위험을 무릅쓰며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2018년 현재 주한 미군 속에는 3000여 명에 달하는 카투사들이 ‘미군 속의 국군’으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오늘날 카투사는 한미동맹의 산증인으로서 동맹 발전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6·25전쟁 때 그들의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미연합작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카투사는 ‘한미동맹의 살아있는 상징’ 또는 ‘대한민국 국군과 미군의 실질적인 교량 역할’을 하면서 “같이 갑시다!”라는 한미동맹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그런 카투사들에게 힘찬 격려와 함께 박수를 보낸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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