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압도적인 전투능력…북방한계선 근해 철벽 방호
북방한계선 등 최전방서 경비 임무
베트남전쟁 때 수송함 베트남까지 이동 지원도
▶ 해상 보급 중인 DE-72 강원함(왼쪽)과 LST-816 화산함.
DE급 호위구축함은 1960년대 중반까지 한국 해군의 주력 전투함으로 활약했다. 최대 속력이 20노트(시속 37㎞)에 달하고, 함포에 사격통제레이더가 연동돼 정확한 사격이 가능했던 경기함과 강원함은 북한 해군이 넘어설 수 없는 존재였다.
6·25전쟁 이후 북한은 무장 간첩선을 남한 해역에 지속적으로 침투시켰지만 경기함과 강원함은 최전선에서 효율적으로 막아냈다.
경기함, 일발필중 사격으로 간첩선 수장시켜
특히 경기함의 공적이 두드러졌다. 1958년 11월 24일 북방한계선 근해를 경비 중이던 경기함은 새벽 2시쯤 불빛을 가리고 항해하는 의아선박을 포착했다. 경기함은 불을 밝히고 정선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의아선박은 이를 무시하고 속력을 높였다.
경기함은 20㎜ 포로 공포탄을 발사한 뒤 1000야드(914m)까지 접근해 “정지하라! 총원 갑판상에 나와 손을 들라”고 방송을 했다. 의아선박은 이에 불응한 채 도주했다. 경기함의 3인치 함포가 불을 뿜었다. 명중된 의아선박은 반파되고 기관이 정지됐다.
경기함은 “총원 갑판상에 나와 손을 들라”고 재차 방송하며 라이프 재킷을 던져줬다. 혹시 모를 저항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간첩 1명이 수류탄을 투척했다. 경기함은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이 작전으로 경기함은 간첩 2명을 생포하고, 4명을 사살했다. 아군 2명이 부상했지만 경미했다.
1960년 7월 18일 경기함은 간첩선이 남파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경기함은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포항 근해를 집중 경비했다. 그러던 중 경북 강구 근해에서 남하하는 정체불명의 선박을 발견했다. 경기함은 선박에 접근해 정선을 명령했다.
의아선박은 도주를 선택했다. 경기함은 전속력으로 추적하며 3인치 함포로 조명탄을 발사했다. 19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 의아선박은 도주를 포기하고 정선했다. 경기함은 단정을 내려 검색요원을 투입했다. 간첩 2명은 검색요원이 다가오자 바다로 뛰어들었다. 검색요원들은 바다에 뛰어든 2명을 구조한 뒤 선박에 숨어 있던 3명을 생포했다.
1961년 8월 27일 경기함은 동해 저진 동남쪽 18마일 해상에서 고속으로 남하하는 선박을 레이더로 포착했다. 경기함은 속력을 높여 의아선박에 접근했다. 의아선박은 방향을 바꿔 북으로 향했다. 경기함은 의아선박을 쫓아가며 발광신호로 정선을 명령했다. 의아선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기함은 3인치 포를 발사했다. 굉음을 내며 날아간 포탄은 의아선박의 선미를 가격했다. 피격된 의아선박은 응사하며 도주했다. 경기함은 북방한계선 근해까지 추격하며 모든 포를 동원해 사격했다. 40㎜ 포탄이 명중됐다. 경기함은 북방한계선을 넘을 수 없어 나포를 단념했지만 의아선박은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바닷속으로 가라앉은 것이다.
▶ DE급 호위구축함 경기함(왼쪽)과 강원함.
강원함, 北 경비정과 치열한 접전 후 격파
강원함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1960년 7월 30일 강원함은 거진 동쪽 북방한계선 근해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동이 틀 무렵. 북서쪽에서 선박 한 척이 강원함에 접근했다.
강원함의 견시 승조원이 ‘PB-371’이라는 선체번호를 식별했다. 북한 경비정이었다. 강원함은 대공방송과 발광신호 등을 활용해 정선을 명했다. 그 순간 북한 경비정이 기습 공격을 해왔다. 강원함이 즉각 반격하면서 25분 동안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강원함의 전투력은 압도적이었다. 강원함은 북한군 3명을 생포하고 11명을 사살했다. 기습 공격을 받은 강원함도 1명이 전사하고 9명이 부상했다.
1961년 4월 12일 새벽 2시쯤. 동해 거진 동북쪽에서 북한 어뢰정(PT정) 6척이 남하했다. 3척씩 2개 편대로 나뉜 북한 어뢰정은 21노트(시속 39㎞) 속도로 강원함에 접근했다. 2~3분 이내에 강원함 좌현 3000야드(2743m)까지 접근할 수 있는 빠른 속도였다.
강원함은 자함을 한 번에 격침시킬 수 있는 적의 어뢰 공격에 대비해 자위적 차원에서 북한 PT정에 사격을 가했다. 강원함의 강력한 대응에 북한 PT정들은 도발을 멈추고 북으로 도주했다.
한국서 사이공까지…파병부대 안전 호송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자 일본이 점령했던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베트남 간에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베트남이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면서 막을 내렸다.
남베트남은 정권의 부패와 공산세력의 게릴라 활동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미국과 남베트남은 한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한국 정부는 군사원조단 파병을 결정하고, 1964년 7월 31일 국회 동의를 얻었다. 이어 1964년 9월 11일 군사원조단을, 1965년 3월 2일 ‘비둘기부대’를 파병했다.
한국 해군은 상륙함(LST)을 파견해 병력 수송을 지원했다. 이후 베트남전쟁이 확대되자 미국은 지상군 투입을 결정했으며, 한국 정부에도 전투부대 파병을 요청했다. 한국 정부는 맹호부대와 청룡부대를 파병하기로 했다.
1965년 10월 3일 한국의 청룡부대와 맹호부대는 미 수송함을 이용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한국에서 베트남까지 수송함의 이동을 지원했던 함정이 경기함과 강원함이다.
경기함은 1965년 2월 14일 부산을 출항한 덕봉함·비봉함·화산함을 호송했다. 비둘기부대 선발대는 경기함의 호위 속에 베트남에 안착했다. 강원함은 1950년 3월 10일 인천항을 출항한 계봉함과 미 수송함을 호송했다. 이 수송함에는 비둘기부대 본진이 타고 있었다.
또 강원함은 1965년 9월 29일 한국 수송함 5척으로 구성된 특별수송전대를 베트남까지 호위했다. 이 수송전대 함정에는 청룡부대와 맹호부대가 타고 있었다. 이 병력은 1965년 10월 9일 깜란만에 안전하게 상륙했다.
글 = 윤병노 기자
사진 = 해군본부 제공
■ 기사 원문
국방일보 ‘대한민국 군함이야기’, 윤병노 기자
2018년 10월 25일자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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