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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탄생 이전 경비대 창설 함께 한 건군의 주역

기사입력 2018. 10. 24   17:23

39 대한민국 부사관들의 역할과 활동



국방부 장관 지낸 서종철·노재현 장군 등도 부사관 거쳐

6·25 때 최득수·안낙규·이명수 등 수많은 전쟁영웅 탄생

전쟁 승패 좌우할 창끝부대의 전투력 구심점 역할 맡아



대한민국 부사관(副士官·Non-commissioned Officer)은 장교단과 함께 군대의 근간(根幹)인 간부(幹部)들이다. 부사관은 군대에서 결코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도 중요한 임무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부사관은 부대의 전통을 유지하고 명예를 지키는 ‘부대의 주인’인 셈이다. 이뿐만 아니라 전투력의 근원인 병사들의 교육훈련을 지도하고 병영생활을 선도하는 부대 내의 ‘엄격한 형님’ 또는 ‘자상한 어머니’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전시엔 무서운 전사, 평시엔 병사들의 엄한 형이자 어머니

그렇지만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전쟁터에서는 ‘무서운 전사(戰士)’로 변신한다. 그때만큼은 용감하면서도 신뢰감이 가는 ‘믿음직한 분대장’ 또는 ‘노련한 선임하사’로 거듭 태어난다. 그들이 바로 이 땅을 지켜낸 부사관들이다.

대한민국 부사관들의 역사는 바로 국군의 역사였다. 어쩌면 국군의 역사보다도 더 오래됐다. 국군이 탄생하기 전에 부대가 먼저 편성되고, 그 편성의 주역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바로 부사관들이다. 그때는 ‘하사관(下士官)’이란 이름으로 통용됐다. 그러다 새로운 천년을 맞이한 2001년부터 명칭도 기존의 하사관에서 부사관으로 개칭됐다. 장교를 총칭하는 사관(士官)에 버금간다는 의미로 ‘부사관’이라는 명칭을 쓰게 됐다.


창군 초기 뛰어난 부사관 대거 사관학교 입교 장교 임관

대한민국 부사관들의 역사와 전통은 오래됐다. 광복 후 미 군정에서는 장차 세워질 나라의 군대를 편성하기 위해 경비대를 창설했다. 육군이 될 조선경비대와 해군이 될 조선해안경비대였다. 그때 이 땅의 많은 애국적 젊은이들이 대거 군대로 몰려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부사관으로 들어와 건군 대열에 합류했다. 그때가 1946년이었다. 부사관들의 계급조차 생소할 때였다. 육군은 일등중사·이등상사·일등상사·특무상사로, 해군은 삼등병조·이등병조·일등병조·병조장으로 불렀다. 그러다 한때는 하사·중사·상사로, 이후에는 하사·중사·이등상사·일등상사로, 그러다 1993년부터 하사·중사·상사·원사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한민국 부사관들은 창군 과정에서부터 장교가 되는 가교(架橋) 역할을 했다. 창군 초기 뛰어난 부사관들이 대거 사관학교 추천을 받아 입교해 장교로 임관했다. 그리고 6·25전쟁을 전후해 장군으로 진출하여 대한민국을 빛냈다. 국방부 장관을 지낸 서종철(徐鐘哲) 장군과 노재현(盧載鉉) 장군도 부산 5연대를 창설할 때 부사관이었다. 서종철 장군은 육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그리고 노재현 장군은 3기생으로 들어가 각각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국방부 장관까지 올라간 입지전적 인물들이다.

6·25전쟁 때 백골부대장으로 유명했던 임충식(任忠植) 장군도 원래는 부사관이었다. 그는 육군대장으로 합참의장을 지낸 후 육사1기생 중 가장 먼저 국방부 장관이 됐다. 또한 6·25전쟁 초기 춘천대첩과 동락리전투 승리를 이끌고 인천상륙작전 후 압록강에 제일 먼저 도달했던 6사단 7연대장 임부택(林富澤) 장군도 부사관 출신이다. 김영삼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던 황인성(黃寅性) 장군도 부사관으로 입대했다가 육군사관학교 4기생으로 들어가 출세한 인물이다. 베티고지전투의 영웅 김만술 일등상사는 뛰어난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소위로 승진했다가 나중에 육군대위로 전역한 전쟁영웅이다.

대한민국 부사관들은 정부 수립 이후 그리고 6·25전쟁을 거치며 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부 수립 이후 당시 남북한의 국경선 역할을 했던 38선에서는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중에서 개성 송악산전투가 유명하다. 그때 북한의 토치카가 국군1사단에 위협을 주자 서부덕 이등상사(중사)가 이끄는 10명의 특공대가 그곳을 파괴하고 모두 장렬히 산화했다. ‘육탄10용사의 탄생’이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1년 전의 일이다. 그때부터 부사관은 ‘감투정신과 용맹의 화신(化身)’으로 국민에게 또렷이 각인됐다.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부사관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용감한 분대장과 노련한 선임하사들이 전투 승리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어려운 국면마다 부사관들은 특공대를 꾸려 앞장섰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일들을 자청했다. 희생도 만만치 않았다. 많은 부사관이 막내 동생 같은 병사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또 부대의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선두에 서서 난공불락의 적진을 향해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돌진하다 적탄에 숨져갔다.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적 전차를 향해서는 수류탄과 박격포탄을 들고 함께 산화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베트남의 정글 속에서도 부사관들은 ‘믿음직한 분대장 또는 선임하사’로 맹활약했다. 가장 위험한 곳, 죽음이 도사린 곳에는 어김없이 부사관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국군의 희생은 크게 줄어들었고, 승리는 국군의 차지였다. 이는 부사관들의 특출한 역량이자 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의 특권이 됐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전쟁영웅이 탄생했다. 6·25전쟁 때는 최득수·안낙규·이명수·백재덕 등이 목숨을 바쳐 이룬 뛰어난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베트남전쟁에서는 지덕칠 해병중사와 이종세 육군상사가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무용(武勇)이 뒷받침한 전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군 기계화·전문화에 따라 부사관 확대 계획

대한민국 부사관들이 국군과 함께한 세월도 2018년 현재로 70여 년이 흘렀다. 그들은 부대의 주인으로서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국가와 군을 위해 맡은 바 소임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부사관은 육·해·공군 및 해병대를 합쳐 10만 명을 훌쩍 넘는 대가족이 됐다. 국군 60만의 6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숫자다. 명실상부 군대의 근간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다. 군의 기계화와 전문화에 따라 부사관은 더욱 늘어나는 추세다. 전투력이 부사관들의 역량에 비례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들의 역할과 활동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대의 전투력은 군의 제일 말단부대인 ‘창끝부대’에서 나온다. 창끝부대의 구심점은 예나 지금이나 역시 부사관이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할 창끝이 날카롭게 될 것인가, 무디게 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은 결국 부사관의 역량과 역할이다. 그런 대한민국 부사관들에게 국민과 함께 무한한 신뢰와 찬사 그리고 뜨거운 격려를 보낸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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