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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제왕’ 보라매 양성하는 막강공군의 요람

기사입력 2018. 10. 10   16:25

37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와 졸업생들

1949년 1월 육군항공사관학교 설립

같은 해 10월 육군서 공군 독립한 날

공군사관학교로 정식 발족

 

최용덕 장군 2대 교장 임명된 날

국민 성금으로 캐나다서 구입한

T-6형 항공기 10대 도입

 

1951년 8월 공군소위 83명 첫 배출

혹독한 훈련 속 보라매로 급성장

전쟁 중에도 중단 없이 교육 진행

 

1기생 윤자중 대장 14대 공참총장에

이양호 장군 이어 정경두 국방장관

공참총장·합참의장·장관 연속 맡아

 

 

1951년 8월 당시 공군사관학교 졸업·임관식 모습.

 


대한민국 공군사관학교(Republic of Korea Air Force Academy)는 장차 ‘하늘의 제왕(帝王)’이 될 보라매들을 양성하는 우리나라 ‘막강공군(莫强空軍)’의 요람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영공을 수호하는 공군 최정예 간부를 배출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공군 군사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공군, 미 군정하 육군 배속 항공대로 출발

공군사관학교는 최초 육군항공사관학교(陸軍航空士官學校)로 출범했다. 출발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경기도 김포비행장 내 미군 퀀셋 막사 2동을 빌려 어렵게 시작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공군이 육군·해군과 달리 독립된 하나의 군(軍)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육군에 배속된 ‘항공부대’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미 군정은 육군에 해당하는 조선경비대와 해군에 해당하는 조선해안경비대를 창설하면서 공군을 별도로 창설하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에 독자적인 항공대는 필요 없다. 육군과 해군만 있으면 된다. 항공대가 왜 필요한가?”라며 육군과 해군에 버금가는 독자적인 공군 설립에 적극 반대했다.

 

1989년 6월 30일 공군본부 계룡대 이전 보고회에서 초대 및 3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김정렬(왼쪽 앞) 장군과 정용후 공참총장이 석별의 아쉬움을 남기며 부대 열병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공군 창설 7인(최용덕·김정렬·이영무·장덕창·박범집·이근석·김영환)’의 활약과 그 당시 한국에 들어온 항공경력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요구로 마침내 육군 내에 항공대를 설치하게 됐다. 육군항공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독립된 공군의 모체가 됐다. 육군항공대가 설치되자 항공대 수뇌부는 미래의 공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육군항공사관학교를 설치했다. 그때가 1949년 1월 14일이었다. 그러다 1949년 10월 1일 공군이 육군에서 독립하게 되자, 육군항공사관학교도 그날부로 공군사관학교로 정식 발족하게 됐다.

공군사관학교 초대 교장은 후에 공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 그리고 국무총리를 역임하게 되는 김정렬(金貞烈) 중령이었다. 그는 1950년 5월 14일, 겸직하고 있던 공군사관학교장을 국방부 차관에서 물러난 최용덕(崔用德) 장군에게 인계했다.

최용덕 장군이 학교장으로 임명된 5월 14일은 공군사(空軍史)에서 매우 뜻깊은 날이다. 이날 국민의 성금으로 캐나다에서 구입한 T-6형 항공기 10대가 도입됐다. 그런 의미 있는 날에 ‘공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최용덕 장군이 공군사관학교장이 됐다. 제2대 공군사관학교장이 된 최용덕 장군은 ‘공사십훈(空士十訓)’을 제정해 생도들의 생활규범이자 ‘공사인(空士人)’으로서 견지해야 할 행동강령으로 삼았다. 이후 “배우고 익혀서 몸과 마음을 조국과 하늘에 바친다”라는 교훈(校訓)이 새로 제정될 때까지 공사십훈은 교훈 역할을 했다. 한때는 이승만 대통령이 휘호로 써준 무용(武勇)과 지·덕·용(知德勇)을 교훈으로 사용한 적도 있었다.

1986년 3월 공군사관학교 이전 청주 시민 환영 행사 모습.

2기생 피란지 대구에서 입교식

공군사관학교 1기생은 1949년 6월 10일 97명이 입학했다. 당시 경쟁률이 어마어마했다. 97명을 뽑는데 지원자가 무려 1400여 명이나 몰렸다. 15대 1의 경쟁률이었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들어온 공사1기생들은 2년간의 혹독한 교육훈련을 받고 1951년 8월 5일 경남 진해에서 83명이 공군소위로 임관했다. 그때는 6·25전쟁이 한창일 때였다. 전쟁 와중에 공군사관학교 시대가 열렸다. 그동안 1기생들은 6·25전쟁 발발로 서울에서 진해, 대구, 제주도 모슬포, 사천 등지를 오가며 혹독한 교육훈련을 받고 대한민국 영공을 수호할 보라매로 성장했다.

공군사관학교는 전쟁 중임에도 교육을 중단하지 않고 공사인들을 모집해 끊임없이 배출했다. 엄청난 생명력이었다. 2기생 171명은 1951년 12월 31일 피란지인 대구칠성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서 입교식을 했다. 이어 3기생들이 1951년 11월 10일 입교했는데, 이들의 교육 기간은 3년으로 늘어났다. 1952년 5월 5일에 입교한 4기생부터는 대학설치령에 의해 4년제가 되면서 비로소 공군사관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이때부터 졸업생들에게 이학사(理學士) 학위가 수여됐다.

6·25전쟁 중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공군사관학교는 이제 어언 70년의 전통과 역사를 간직하게 됐다. 그간 수많은 공사인이 성무대(星武臺)를 나와 조국 영공 수호의 불침번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그 이면에 는 수많은 공사인의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다.

1979년 4월, 1기생인 윤자중 대장이 공군 총수인 제14대 공군참모총장에 오르게 됐다. 공사 출신 공군참모총장 시대의 개막이었다. 뒤이어 공사 출신 합동참모의장과 국방부 장관도 배출됐다. 21대 공군총장을 지낸 이양호 대장은 25대 합참의장에 이어 국방부 장관에 발탁됐다. 우리나라 국방 역사에서 총장을 거쳐 연달아 합참의장, 국방부 장관에 오른 예는 매우 드물다. 물론 육군총장과 합참의장을 역임하고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난 후 국방부 장관을 지낸 최영희 장군과 한민구 장군도 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국군 70년 역사에서 총장-합참의장-국방부 장관을 연속으로 맡은 경우는 육군총장을 지낸 노재현 장군이 처음이고, 그다음이 공군총장을 지낸 이양호 장군이다. 이어 육군총장을 지냈던 김동진 장군이 셋째다.

그런데 2018년 공군에서 또다시 그 기록을 재현했다. 공군총장을 지낸 정경두 합동참모의장이 송영무 장관의 뒤를 이어 제46대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면서 공군 역사는 물론이고 국방사에 또 하나의 새로운 기록을 더하게 됐다. 정 장관은 총장을 거쳐 합참의장 그리고 국방부 장관까지 연속해 맡은 4번째 국방 인물이 됐다. 이는 공군은 물론이고 공사인들에게도 경사스러운 일이다. 공군사관학교 70년 역사 동안 공사인들이 절차탁마로 3군 통합지휘능력과 국방업무 총괄 역량을 배양해온 결과라 여겨진다. 공사인들의 노력과 열정에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공사인들은 결코 여기서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 선열들의 호국정신을 본받아 더욱 더 국방책무의 막중함을 생각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 대한민국의 국토방위와 국민의 안전에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와 함께 공군의 지상목표이자 공사인들의 미래 희망인 저 드높은 하늘로 그리고 끝없는 우주로 비약(飛躍)하는 막강공군으로 계속 발전하길 국민과 함께 기대해 본다.
<남정옥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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