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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통 무적해병 양성… 해양대군의 산실

기사입력 2018. 10. 03   11:28

36.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와 졸업생들

 

대한민국 해군사관학교(Republic of Korea Naval Academy)는 충무공(忠武公)의 후예들을 양성하는 우리나라 해양대군(海洋大軍)의 산실이다. 이뿐만 아니라 해군사관학교는 대한민국 해군과 해병의 최정예 간부를 배출하는 최고 군사교육 기관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1945년 11월 11일, 손원일 제독은 70여 명의 동지와 함께 신사도와 충무공 정신으로 해방병단을 창설했다.  필자 제공




충무공 후예 양성하는 최고의 군사교육기관

해군사관학교는 최초 해군병학교(海軍兵學校)로 출발했다. 그때는 미 군정 시기로 1946년 1월 17일이었다. 이후 해군사관학교가 정식 명칭을 갖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정부수립 이전까지는 해안경비대사관학교(海岸警備隊士官學校)와 해안경비대학으로 불리다가, 정부수립 이후에는 해사대학(海士大學)과 해군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됐다. 그러다 1949년 1월 15일 마침내 오늘날의 해군사관학교로 정식 출범하게 됐다. 이는 대통령령 제87호 해군사관학교령 공포에 따른 것이었다.

해군사관학교 초대 교장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지낸 손원일 소령이었다. 당시 손원일은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海防兵團) 단장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해군사관학교 교장도 겸직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해 3월 김일병(金一秉) 중위에게 교장직을 넘겨줬다. 새로 학교장으로 부임한 김일병 중위는 1949년 2월까지 만 2년간 교장 직책을 수행하며 대령으로 진급했고, 그 과정에서 “진리를 구하자, 허위를 버리자, 희생하자”라는 학교 교훈을 제정해 생도들의 생활규범으로 삼게 했다.

해군사관학교는 우리나라 육·해·공군 사관학교 중에서 가장 빨리 출범했다. 육군사관학교는 해군사관학교보다 4개월 뒤인 1946년 5월 1일 학교 문을 열었고, 육군에서 독립한 공군사관학교는 이보다 훨씬 늦은 1949년 1월에야 발족했다. 그렇게 보면 해군사관학교는 우리나라 3군 사관학교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사관학교인 셈이다.

해군사관학교 1기생은 총 113명이었다. 그들은 1년간의 교육훈련을 마치고 1947년 2월 7일 그 절반에 해당하는 61명이 소위로 임관했다. 1기생이 졸업한 날 2기생 86명이 입학해 그 절반인 48명이 임관했다. 3기생도 136명이 입학하여 54명이 임관했다. 기수마다 50% 이상의 엄청난 탈락률을 보였다. 해군사관학교는 처음부터 그런 혹독한 교육훈련 과정을 거쳐 충무공의 후예들을 길러냈다.

해군사관학교에서는 6·25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3기생까지 졸업해 소위로 임관했다. 6·25전쟁 발발 당시 4·5·6·7기는 생도 신분으로 교육 중에 있었으나, 해군사관학교는 학업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전쟁 이전 생도 신분이었던 4·5·6·7기생들은 전쟁 이전보다 더 긴 3년간의 교육을 마친 후 소위로 임관할 수 있었다. 해군과 해군사관학교의 저력(底力)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증거가 아닐 수 없다.


10기생부터 4년제 교육, 이학사 학위 수여

해군사관학교는 전쟁 중에도 미래의 충무공 후예들을 양성하기 위해 생도들을 모집해 혹독한 교육훈련을 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해군 소위로 임관시켰다. 교육 기간도 3년 5개월로 연장하여 더욱 짜임새 있고 알차게 교육했다. 그러다 1952년 4월에 입교한 10기생부터는 4년제 교육을 하고 이학사(理學士) 학위까지 수여했다. 대단한 발전이었다. 그런 자랑스러운 해군사관학교 10기생 졸업식에 이승만 대통령이 참석하여 축하했다.

해군참모총장 정긍모(鄭兢模) 중장도 치사를 통해 “새 정열, 새 힘, 새 지혜로써 해군 업무의 핵심을 추진하는 데 모든 심혈을 경주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 무렵 해군사관학교는 해군장교뿐만 아니라 해병장교 양성을 위한 준비도 해나갔다. 교수부에 해병과를 신설하여 육전(陸戰)과 해병에 대한 교육 훈련을 함으로써 무적해병의 후예들을 양성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해군사관학교의 또 다른 변화이자 커다란 도약이었다.

1946년 1월, 해군병학교로 출발

1949년 해군사관학교로 정식 출범

손원일 소령이 초대 교장

육·해·공사 중 역사가 가장 오래돼

참모총장 4명, 해병대사령관 1명 배출

해사인, 1960년대 초부터 두각

윤광웅·송영무 국방부 장관

최윤희 합참의장 배출‥군령 책임져



해사인, 충무공 정신을 생활 신조로 삼아

해군병학교로 출범한 해군사관학교가 2018년 현재 70년의 전통과 역사를 갖게 됐다. 그 기간 해군사관학교는 장족(長足)의 발전을 했고, 해군사관학교를 나온 해사인(海士人)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충무공의 정신이 투영(投影)된 학교 교훈을 생활신조로 삼았던 해사인들은 위기 때마다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전쟁 이전 몽금포전투의 영웅 공정식 장군과 함명수 제독을 비롯하여 6·25전쟁의 첫 승리인 대한해협전투에서 600명을 태운 적 무장수송선을 격침하는 데 크게 기여한 최영섭 대령, 베트남전에서 동굴 수색 중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베트콩이 던진 수류탄을 안고 전사한 이인호 소령, 짜빈동전투에서 중대장과 소대장으로 참전해 적 1개 연대를 섬멸한 정경진 대위와 신원배 소위, 1970년대 북한 땅굴 수색 중 전사한 김학철 중령, 제2연평해전의 영웅 윤영하 소령 등이 자랑스러운 해사인들이다.

해사 1기생, 10년간 해군 총수 맡아

해사인들은 1960년대 초부터 국방사(國防史)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해군의 총수(總帥)인 해군참모총장과 해병의 수장(首長)인 해병대사령관을 맡았다. 그 중심에는 해사 1기생들이 있었다. 해군사관학교 1기생들은 대단했다. 참모총장 4명에 해병대사령관 1명을 배출했다. 참모총장도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1969년보다 훨씬 빠른 1962년부터 해군총장 직책을 수행했다. 해사1기 출신의 최초 해군총장은 6대 이맹기 제독이다. 그 뒤를 이어 함명수·김영관·장지수 제독이 1972년까지 연달아 해군총장에 임명됐다. 국방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10년간을 해사 1기생들이 해군 총수를 맡아 바다의 사나이들을 호령했다. 해병대도 1964년 1기생인 공정식 중장이 최초로 6대 해병대사령관에 취임함으로써 해사 출신 해병대 시대를 열었다. 그 과정에서 해군에서는 대장 계급이 나왔다. 그때가 1969년 8대 해군총장인 김영관 제독 시절이다.

해사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해군총장과 해병대사령관에 이어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의 수장인 국방부 장관(윤광웅·송영무)과 합참의장(최윤희)도 배출했다. 해군의 영역을 넘어 국방부와 합참을 지휘할 역량을 갖추게 됐다. 그런 점에서 해사인들은 대한민국의 영해를 책임지는 바다의 사나이로 머물지 않고 대한민국 군정과 군령을 책임지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다.

해사인들은 이후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게 해군과 해병대를 이끌고 항진(航進)했다. 해군은 대양해군을 향해 거보를 내딛게 됐고, 해병대는 대한민국 유일의 해상 전략기동군으로서 위상을 굳혀 나갔다. 해군과 해병대가 국군의 핵심 전력으로 성장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해사인들의 역할이 컸다. 그들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진리를 구하자, 허위를 버리자, 희생하자!”를 실천 강령으로 삼아 조국과 영해수호(領海守護)에 헌신했다. 그런 해군과 해사인들의 장도(壯途)를 위해 뜨거운 갈채를 보낸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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