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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10월 1일은 육·해·공 3군 체제 완성한 날

기사입력 2018. 09. 26   16:46

35 국군의 날 70주년을 맞아 그날의 의미를 되새기며

 

6·25전쟁 중 낙동강까지 밀렸던 국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북진을 거듭, 1950년 10월 1일 38선을 최초 돌파했다. 사진은 국군3사단이 38선을 돌파한 역사적인 현장에서 외신기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국군의 날은 10월 1일이다. 이날은 두 가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국군의 골격인 3군 체제를 완성한 날을 뜻한다. 다른 하나는 1950년 10월 1일 대한민국 국군이 단독으로 38선을 돌파했다는 것을 담고 있다. 국군의 날은 1956년 9월 21일 대통령령 제1173호에 의거 국가기념일로 정해졌다.

1956년 이전까지 각 군별로 창설 기념행사

국군의 날이 통합돼 실시될 때까지는 육·해·공군 및 해병대는 각각 자군(自軍)의 창설일에 맞춰 기념행사를 실시했다. 육군은 남조선국방경비대와 제1연대가 창설된 1946년 1월 15일에, 해군은 해방병단(海防兵團)이 창설된 1945년 11월 11일에, 해병대는 창설일인 1949년 4월 15일에, 공군은 육군에서 독립한 1949년 10월 1일에 창설기념행사를 했다. 그러다 보니 국군의 날 통합 제정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됐다. 그때가 1956년이다. 정부에서는 국방과 관련한 국민들의 대통합과 예산 절약 차원에서 3군 체제가 완성된 날이자, 국군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게 됐다. 국방사의 한 획을 긋는 뜻깊은 날이 아닐 수 없다.

국군의 날을 선정하는 데 역사적 배경이 된 38선 돌파는 국군에게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략을 받고, 전쟁 개시 나흘째에 수도 서울을 빼앗긴 국군은 땅을 치며 원통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전선은 계속 남으로 밀렸다. 국토의 10%에 해당하는 낙동강 방어선에 이르러서야 겨우 멈췄다. 대한민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북한군은 그들의 최종목표인 부산을 향해 최후 공세를 펼쳤고, 한미연합군은 이를 겨우 막아내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 당시 대구 북방 다부동(多富洞) 지역에서 싸웠던 국군1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그때의 전황을 “종잇장처럼 얇은 아군의 방어선을 북한군은 마치 뾰족한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공격했다”고 했다.

그만큼 전세는 국군과 미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전쟁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낙동강 전선의 불리한 전황을 지켜보던 워싱턴에서는 대한민국의 해외망명 정부 수립까지를 생각했다. 그만큼 전투는 치열했고, 전황은 불투명했다. 전선에서는 연일 치열한 전투로 인해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형성하는 시산혈해(屍山血海)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국군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학생들도, 여성들도, 징집연령이 지난 아저씨들도 전선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학도의용군, 여자의용군, 지게부대라는 이름으로 참전했다. 그럼에도 전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국군 장병들은 조국의 운명과 부모형제를 위해 낙동강 전선에서 다시 힘을 내 싸우고 또 싸우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을 피로써 지켜냈다.

1950년 38선을 넘어 진격하는 미군과 한국군.

인천상륙작전 성공하자 국군 38선 향해 돌진

때마침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이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해 성공했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만큼 어렵다는 ‘5000분의 1 확률’을 깬 것이다. 낙동강 전선에서 힘겹게 싸우고 있던 국군장병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국군은 낙동강 전선을 박차고 38선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쉴 틈이 없었다. 발이 부르튼 줄도 모르고 밤낮으로 걸었다. 밑창이 떨어져 나가고 발가락이 튀어나온 신발을 신고 국군장병들은 험한 산길을 달려갔다. 도망치는 북한군보다 추격하는 국군이 더 빨랐다. 6·25전쟁 발발 이후 계속 쫓기는 입장에서 추격하는 입장이 된 국군장병들로서는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다. 국군3사단이 38선에 제일 먼저 도달했다.

1988년10월 9일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38선휴게소에서 민족통일 강원도협의회 회원들이 38선 표지석 건립 제막식을 하고있다.

이승만 대통령 “지체 없이 북진” 명령

그런데 국군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던 유엔군사령부나 미8군사령부에서는 38도선 돌파에 대한 명령이 아직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그때 38선 돌파의 물꼬를 튼 사람이 바로 국군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서울 환도식이 끝난 후 이 대통령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에게 “지체 없이 북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맥아더는 “유엔에서 아직 38선 돌파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다”며 주저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이 이 문제를 결정할 때까지 장군께서는 휘하 부대를 데리고 기다릴 수 있지만, 우리 국군장병들이 밀고 올라가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오. 이곳은 우리 국군의 나라이기 때문에 내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그들은 북진할 것입니다”라고 강하게 말했다. 그 무렵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미8군은 재편성을 위해 그리고 돌파명령을 대기하기 위해 38선에서 정지할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한 상태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더 이상 38선 돌파 문제를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구의 육군본부를 방문한 후 육군수뇌부를 향해 “국군의 통수권자는 맥아더 원수냐, 그렇지 않으면 이 나라의 대통령이냐?”고 물었다. 이에 정일권 육군총장이 “그 문제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대통령께서 서명하신 문서에 의해 유엔군사령관에게 이양됐으므로 지금 또다시 이중으로 명령을 하시게 되면 혼란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니 유엔에서 결정이 있을 때까지 좀 더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대통령께서 국가의 대계(大計)를 위해 명령을 내리시면 저희들은 그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대통령은 “내가 이 나라의 최고통수권자이니 나의 명령에 따라 북진하라”고 쓴 명령서를 정 총장에게 줬다. 그렇게 해서 동해안의 38선에서 대기하고 있던 국군3사단 23연대 3대대가 1950년 10월 1일 최초로 38선을 돌파하게 됐다.

그로부터 7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과정에서 국군은 우리가 만든 현대식 무기와 장비로 무장한 60만 대군으로 성장하며 국민의 군대로 발전했다.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런 국군장병들의 어깨에는 거역할 수 없는 무거운 책무가 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것이다. 그것을 국민을 향해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하는 날이 바로 국군의 날이다. 그것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진=국방일보DB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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