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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명예·충용…육군 정예간부 양성의 요람 ‘우뚝’

기사입력 2018. 09. 19   15:32

<34> ‘육군3사관학교’와 졸업생들



안보 위기 속 1968년 10월 15일 창설

세 번째 사관학교라는 의미

‘육군 제3사관학교’로 교명 정해

2004년 ‘육군3사관학교’로 변경


1970년 1월, 1기 771명만 소위 임관

박영하 육군대장 등 장군 180여 명 배출

2018년 현재 약 5만 명의 3사人

충성대 나와 국토방위에 헌신



육군3사관학교(Korea Army Academy at Young-Cheon)는 대한민국 육군의 정예간부를 양성하는 호국의 요람이다. 육군3사관학교는 옛 통일신라의 주역인 화랑(花郞)들의 활동무대였던 드넓은 ‘영천(永川) 벌’에 세워졌다. 바로 충성대(忠誠臺)다. 이곳 영천은 6·25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다. 그런 유서 깊은 곳에 대한민국 육군의 정예간부를 양성하는 육군3사관학교가 터전을 마련하고 오늘에 이르게 됐다.

육군3사관학교는 한반도가 극도의 안보적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을 때인 1968년 10월 15일 창설됐다. 1968년 북한은 대한민국에 각종 무력도발을 저질렀다. 청와대 기습 사건,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북 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등이 바로 그것이다. 북한의 이런 도발에 정부에서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육군3사관학교의 설치였다. 청와대를 기습한 북한군 특수부대(124군부대)를 능가할 정예간부를 양성하기 위해서다.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군에 강력히 대응할 정예 초급장교를 양성할 것”을 지시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육군3사관학교 창설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 1968년 8월 16일 육군본부 일반명령 제12호에 의해 ‘영천사관학교 창설위원회’가 꾸려지고, 10월 15일에는 육군3사관학교가 경북 영천에 설치됐다. 학교 명칭은 육군본부 정책회의에서 육군사관학교와 육군 제2사관학교에 이어 세 번째 사관학교라는 의미에서 ‘육군 제3사관학교(Korea Third Military Academy)’로 정했다. 하지만 2004년 개정된 ‘육군3사관학교 설치법’에 의해 학교 명칭을 ‘육군3사관학교’로 변경했다. 육군 제2사관학교가 없어진 마당에 굳이 서수(序數)를 지칭하는 제3사관학교라는 명칭을 쓸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육군 제2사관학교는 1972년 4월에 육군 제3사관학교에 통합됐다. 그래서 학교 명칭을 ‘육군3사관학교’로 바꾸고, 영문명도 영천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라는 의미에서 ‘Korea Army Academy at Young-Cheon’으로 표기했다. 이후 육군3사관학교는 육군사관학교와 함께 육군을 대표하는 사관학교로 거듭나게 됐다.

육군3사관학교는 1969년 3월 18일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1기생 924명의 입학식과 함께 개교식을 했다. 초대 교장은 정봉욱 육군소장이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이 깊었다. 박 대통령이 대령으로 육군3군단 포병단장이었을 때 그는 중령으로 부단장이었고, 박 대통령이 육군소장으로 1군사령부 참모장이었을 때 그는 준장으로 화력부장을 지냈다. 원래 정봉욱 장군은 6·25전쟁 때 북한군 중좌(中佐·중령에 해당)로 13사단 포병연대장이었다. 그는 1950년 8월 하순 낙동강전투 때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던 국군1사단 지역으로 귀순했다. 귀순 후 정봉욱은 국군중령으로 편입됐고, 포병인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됐다. 그런 인연으로 박 대통령은 자신이 군 시절 신뢰했던 정봉욱 장군을 초대 육군3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하고, 북한군을 능가할 강인한 정예간부를 양성하도록 했다.

그런 탓으로 육군3사관학교 생도들은 1기생부터 인간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강한 훈련을 받았다. 그 결과 1기생들은 최초 924명이 입학해 153명이 탈락하고 771명만 소위로 임관했다. 3사 출신 군번 1번(500001)은 중령으로 예편한 손부철 소위가 차지했다. 그때가 1970년 1월이다. 육군3사관학교 시대의 개막이다. 그로부터 2018년 현재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적지 않은 세월이다. 그 기간 약 5만 명의 ‘3사인(三士人)’들이 충성대를 나와 국토방위에 헌신했다.

반세기를 지나면서 충성대의 3사인들은 약진(躍進)했다. 학교 출범 20년째인 1990년대 초, 첫 장군을 배출한 이래 사단장, 군단장(김일생·권태오·황인권 등), 군사령관(박영하·박성규·박종진), 합참의장(이순진)을 배출하며 육군 최대의 정예간부 양성학교로 발전했다.

3사인들은 학교 교훈인 조국·명예·충용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고, 장교로서의 명예를 소중히 여기며,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용맹스러운 대한민국 정예간부로서의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했다. 그 결과 군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장군만도 180여 명을 배출했다. 여기에는 3사인 중 최초로 육군대장으로 진급해 2군사령관을 지낸 박영하 대장의 역할이 컸다. 그의 군 생활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소위 임관부터 육군대장이 될 때까지 진급과 보직에서 ‘최초’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살았지만 이면에는 말 못할 고초가 뒤따랐다. 그는 그것을 극복하고 마침내 육군대장에 오름으로써 3사인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줬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그의 신념이 빛을 발했다.

3사인들 중에는 모교를 빛낸 인물들도 적지 않다. 베트남전에 소대장으로 참전해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안케패스 전투의 영웅 이무표 대령과 교육훈련 중 부하가 잘못 던진 수류탄을 보고 소대원들을 살리기 위해 수류탄을 안고 산화한 차성도 중위가 있다. 차성도 중위는 강재규 소령처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영웅적인 행동을 했음에도 국가로부터 아무런 훈장을 받지 못했다. 늦었지만 국가 차원의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 또 강릉무장공비침투사건 때 3군단 기무부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해 전사한 오영안 장군도 있다.

3사인 가운데 전역 후 사회에서 더 활발히 활동한 사람들도 많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문재인 정부 초대 병무청장으로 임명돼 활동하고 있는 기찬수 장군과 남북군사회담 수석대표를 지내고 현재는 KBS를 비롯한 지상파 TV, 그리고 국방FM에서 사회자와 안보해설위원으로 맹활약하고 있는 문성묵 장군이다. 또 대령을 끝으로 36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최근 자신의 지휘경험 사례를 『지휘요결』이란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김기섭 대령도 빼놓을 수 없는 훌륭한 3사인이다. 그밖에 많은 3사인들이 대학교수를 비롯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육군3사관학교는 대한민국이 안보적으로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국토방위의 일선에서 방패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왔다. 그뿐만 아니라 전역 후에도 절대다수의 3사인들이 예비군지휘관으로서 여전히 조국 수호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군에 있든 군을 떠나든 국방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는 학교교훈인 조국·명예·충용을 잠시도 잊지 않고 간직해 왔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육군3사관학교와 3사인들은 대한민국 안보를 끝까지 책임지는 국토방위의 핵심세력으로서 그 역할을 다해 주기를 기대한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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