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미래지향적 리더십과 건설적 경쟁의 모범-미 육군항공의 도약과 혁신
항공기 개발 처음엔 지지부진
맥나마라, 몸사리는 지휘부 설득
‘헬리콥터통’ 주도 ‘하우즈위원회’
최고 브레인 소집 ‘명품기술’ 탄생
베트남전 헬기 맹활약 역량 증명
육·해·공 경쟁…발전 긍정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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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9월 15일 미 육군은 ‘육군항공’의 청사진을 담은 이른바 ‘하우즈 위원회 보고서(Howze Report)’를 국방부에 제출했다. 보고서를 작성한 ‘하우즈 위원회’는 1961년에 구성됐으며 공식 명칭은 ‘전술 기동 소요 위원회(Tactical Mobility Requirements Board)’였다.
위원장은 초대 육군항공처장 해밀턴 하우즈(Hamilton H. Howze) 장군이 맡았다. 그는 1950년대부터 육군항공기 설계에 참여했고 관련 전술교리를 개발했으며 항공학교 설립을 주도한 이른바 ‘헬리콥터통’이었다.
총 214쪽의 ‘하우즈 보고서’는 위원회 소속 현역 장군과 고위 관료들이 직접 작성했다. 육군항공 기체 개관, 부대 구조, 사업 계획, 인력 및 예산 소요, 핵심 고려 사항, 기대 효과를 구체적으로 담았다. 규모로나 기간으로나 전례 없는 대규모 육군항공 개발 사업이 이 보고서로부터 시작됐다.
육군 지휘부가 처음부터 육군항공 육성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공군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몸을 사리는 모습이었다. 오죽하면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trange McNamara)가 “육군은 위험할 정도로 보수적”이라고 평가했을까.
맥나마라 장관이 육군의 ‘항공기 사업 계획’을 처음 보고받은 것은 취임하고 두 달 후인 1961년 3월경이었다. 계획은 ‘하우즈 위원회’와 유사한 성격의 ‘로저스 위원회(Rogers Board)’가 만들었다. 장관은 1961년 9월 “전통적인 관점, 정책과 완전히 결별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연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육군은 연말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장관은 육군참모총장에게 직접 메모를 보냈다. “지금 육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헬기(Bell UH-1)가 정말 그렇게 많은 장점이 있다면 획득 규모를 더 늘리십시오. 그리고 이 헬기가 꼭 필요하다면 어째서 배치 시기를 더 앞당기지 않는 겁니까?”
국방장관은 1962년 4월 19일 육군부 장관에게 지침서를 만들어 보냈다. 육군이 왜 헬리콥터를 늘려야 하는지 기동성 증대, 효율성 제고, 전장환경 변화의 측면에서 설명한 뒤 ‘각 군의 시각이 아닌 국방 경영, 국가 이익, 세계 안보의 관점에서 효율을 추구하고 기회를 포착하라’고 강조했다. 말미에 국방부가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제야 육군은 사업 재평가를 위해 하우즈 위원회를 꾸리고 시험부대를 선정했다.
베트남전에서 육군항공은 역량을 증명했다. 1964년 8월 미군이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이래 전장에서 활약한 미 육군 헬리콥터는 총 1만2000대(50종)에 이른다. 병력 수송, 군수 보급, 화력 지원, 수색 정찰 등 거의 모든 분야에 투입됐다. 전쟁 기간 동안 5600대의 헬리콥터가 격추됐고 4800명의 조종사와 탑승자가 사망했다. 이 때문에 베트남전을 ‘헬리콥터 전쟁(Helicopter War)’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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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항공 발전 과정에서 불가피했던 육·해·공군의 경쟁은 각 군 발전과 합동성 강화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해군은 헬리콥터 확보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수색구조 작전 교리를 정립하고 무인 대잠헬기를 개발했다. 공군은 예산을 전투기 쪽으로 끌어오기 위해 ‘근접 항공 지원(CAS; Close Air Support)’ 능력을 연구하고 교리를 발전시켰다.
하우즈 위원회는 미 육군에 만연한 ‘반지성주의’를 흔들었다.
“당시 미 육군 구성원의 사고는 군사 기술의 발전을 전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기 제1항공여단장이었던 조지 세네프(George P. Seneff) 장군의 비판이다. 하우즈 위원회에 소집된 현역 장군들은 당대 최고의 브레인이었다. 이들은 군사 지식과 참전 경험을 살려 새로운 전술을 창안했다. 전진 교대, 공중 엄호, 공중 강습 등이 그것이다. 또한 최신의 전투 실험, 워 게임 절차와 도구를 사용했다. 그래서 미군의 ‘기술 견인 혁신’의 시발점을 하우즈 위원회로 보기도 한다.
불확실성과 위협이 가중될수록, 기회 상실의 위험이 클수록 리더의 역할은 중요해진다. 맥나마라가 아니었다면 육군항공의 도약과 혁신은 크게 늦어져 시기를 상실했을 것이다. 조직의 비전, 발전전략, 예산과 제도, 운용 교리는 두뇌 집단으로부터 나와 톱-다운(Top-Down) 식으로 하달돼야 한다. 하우즈 위원회 소속 장군들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최고의 작품을 내놓았다.
한반도 안보에 불확실성과 위협이 가중되고 있다고 입 모아 말한다. 이대로 두면 기회를 상실할 것이라는 우려도 많다. 이에 각 군이 다양한 방식으로 팀을 꾸려 미래에 대비하고 있다. 하우즈 보고서에 버금가는 좋은 성과가 있길 기대해본다. <남보람 소령/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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