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신출귀몰’ 기습작전… 동·서 해안 완벽 봉쇄
▶ 한반도 연안을 경비 중인 PT급 고속어뢰정. 사진=해군본부 제공
육지로부터 600야드까지 접근...군수품 수송기차·포대 등 맹폭
PT급 고속어뢰정은 영국 함대와의 에피소드로 더 유명해졌다. 1953년 초 해주 기습작전에 참가한 PT정에 영국 해군소령이 연락장교로 편승했다.
PT정이 해안에 바짝 붙자 적이 포격을 가했고, 포탄이 영국 해군 장교의 철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장교는 너무 놀라 PT정 정장에게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작전을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이에 PT정 정장은 “This war is my war. Why not?”이라고 답했다.
한국 해군 PT정의 작전 수행에 감동한 영국 해군 장교는 본국으로 돌아가 훈장을 상신했다. 그러나 영국은 외국인에게 훈장을 준 사례가 없었다고 한다. 영국은 외교 채널을 통해 한국 정부가 훈장을 수여해 달라고 건의했다. 한국 정부는 당시 계급이 소위였던 PT정 정장들에게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해연·백구작전 투입…적 진지·포대 맹폭
PT정 편대의 기습작전은 기간에 따라 해연작전(1952년 4월 1일~12월 31일)과 백구작전(1953년 1월 1일~7월 31일)으로 구분된다. 이 기간에 PT정 편대는 동·서 해안에서 군수품을 수송하는 기차와 요새 및 병력 집결지, 해안 포대 등을 공격했다. 더불어 적 선박의 기뢰 부설을 방지하는 데도 톡톡히 기여했다.
해연작전에 투입된 갈매기·올빼미정은 1952년 4월 19일 서해안 마합도의 적 포대와 범선 수척을 로켓포로 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4월 26일에는 옹진반도의 마정리에 집결한 적을 향해 로켓포를 발사했다. 4월 27일에는 유엔 함정의 지원을 받으며 장산곶 해안의 적 진지를 공격했고, 4월 30일에는 미 함정과 합세해 옹진반도 일대 해안의 적 진지에 포탄을 퍼부었다. 5월 5일에는 해주만 입구 부포리에 접근해 적 진지에 포격을 가했다.
갈매기정 정장 박성극(대령 예편) 중위는 “기차 잡이 작전을 할 때면 우리는 구축함 1척과 늘 같이 작전을 했다. 우리는 육지로부터 600야드까지 접근했다. 엔진을 끄고 박격포로 조명탄을 쏘아 올렸다. 기차가 나오는 소리가 들리면 미군 구축함에 연락했다”고 증언했다.
해안 봉쇄하며 끊임없이 기습공격 감행
기러기정과 제비정은 1952년 5월 23일 동해안의 영흥만으로 출동해 원산항 봉쇄 작전을 수행했다. 2척의 PT정은 호도반도에서 마양도와 신포에 이르는 해안선 일대에서 적 선박, 포대·보급소 등에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6월 20일에는 여도와 양도 해안의 적 진지에 포격을 가해 소형 선박 1척을 격침하고, 1척을 대파했다. 또 적 진지 6개소를 파괴했다. 이후 10월 초순까지 여도와 양도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북으로는 함경북도 어랑군 어대진에 이르기까지 북동부 해안을 봉쇄하면서 끊임없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기러기정 정장 홍기경(준장 예편) 중위는 “우리 편대가 2000야드까지 접근해 5인치 로켓포로 적을 공격하지만 그 결과는 알 수가 없었다. 공격 후에는 즉시 전속력으로 빠져나와야 했기 때문이다. PT정 승조원들은 다른 함정 승조원보다 자부심이 강했다. 해상 돌격대로서 해군 수뇌부에서도 승조원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대단했다. 급식과 수당을 지금의 항공사와 같은 수준으로 받았고, 식사의 질도 좋았다”고 증언했다.
▶해사 4기생 홍기경·서동연 소위가 1952년 4월 제비정에서 벚꽃과 함께한 기념 사진. 사진=해군본부 제공
적의 도서 침공계획 좌절 크게 기여
기러기정과 제비정은 1952년 11월 초순 다시 서해로 출항했다. 이들은 영국 함정과 장산곶~등산곶 사이의 해안을 봉쇄하면서 산발적으로 기습작전을 전개했다.
11월 15~16일에는 적 병력이 해안에 집결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기습작전을 펼쳐 적진을 무력화했다. 11월 20일에는 덕동의 해안선으로부터 700야드까지 접근, 공격을 퍼부어 적 진지 5개소와 건물 3동을 파괴했다. 기러기정과 제비정은 1953년 2월 19일까지 장산곶과 옹진반도 일대에서 기습공격을 이어가 적의 도서 침공 계획을 좌절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PT정은 한국 해군의 전력 증강 계획인 ‘새싹계획’에 의해 1963년부터 순차적으로 퇴역했고, 진해 군항에 보관됐다.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미 해군은 케네디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중위로서 지휘한 PT-109정(일본군 어뢰에 피격 침몰)과 같은 유형의 함정을 케네디도서관·박물관에 전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미국에는 PT정이 단 1척도 남아 있지 않았다. 미 해군은 전 세계에 수소문한 결과 한국 해군이 퇴역한 3척의 어뢰정을 보관하고 있음을 알게 됐고, 양도를 요청했다. 한국 해군은 1969년 6월 17일 기러기정을 미 해군에 양도했다.
글 = 윤병노 기자
● 전문가 해설
항공기 엔진 3기 장착 최고 속력 50노트 당시 세계 ‘No.1’
고속어뢰정인 PT정은 적의 전투함이나 수송함을 격침하기 위해 건조한 함정이다. 소해정(YMS)·구잠정(PCS)과 마찬가지로 선체를 나무로 제작했다.
또 1500마력의 항공기 엔진 3기를 장착해 최고 속력이 50노트에 달했다. 우리 해군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함정 4척을 1952년 1월 24일 미 해군으로부터 양도받았다.
1972년부터 인수한 우리 해군 고속정(PK·PKM)의 효시(嚆矢)인 셈이다.
속력이 빠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 해군은 PT정에 갈매기·기러기·올빼미·제비를 함명으로 부여했다.
미 해군은 우리 해군에 PT정을 양도할 때 어뢰를 제거했다. 그러나 좌·우현에 5인치 로켓포 발사대를 설치해 막강한 화력을 갖췄다.
PT정 정장은 인수 당시 해군사관학교 3기생들이었고 뒤 이어 4기생들이 정장을 맡았다. 승조원들은 우리 해군의 초창기 고속정 승조원처럼 고속정 복장을 착용했다. 고속정을 상징하는 휘장도 부착했다. 위험한 작전을 수행했던 관계로 이들에게는 다른 함정 승조원보다 양호한 주·부식이 제공됐다.
해군의 특공대라는 자부심이 컸던 PT정 승조원들은 주로 달빛이 없는 야간에 적진 가까이 접근해 기습공격을 가했고, 수많은 전과를 거뒀다. 특히 유엔 해군이 수행할 수 없었던 전투를 도맡음으로써 용맹성에 대한 격찬이 자자했다.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 기사 원문
국방일보 ‘대한민국 군함이야기’, 윤병노 기자
2018년 8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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