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잠수함 공격 위해 만든 함정… 한반도 전 해역서 ‘맹위’
▶ 미 해군 운용 당시 PCS에서 YMS로 재분류됐다가 다시 PCS로 분류된 화성정. 사진=해군본부 제공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군사지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대외 군사원조 방식에 변화를 줬다. 상호방위원조법에 의한 군사원조와 더불어 참전 유엔군에 군수물자를 전장에서 지급하는 직접 군사원조를 병행한 것.
한국 해군도 미 해군에 연합작전이 가능한 함정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고, 다양한 함정과 장비를 무상으로 양도받았다. 적 잠수함을 잡기 위해 만든 PCS(Patrol Craft Sweeper)급 구잠정(驅潛艇)도 그중 하나다.
수성정 등 4척 인수…1함대 동해전대 배치
한국 해군은 1952년 5월부터 6월까지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PCS급 4척과 LSSL(Landing Ship Support Large)급 대형 상륙정 2척을 인수했다.
4척의 PCS급 구잠정은 하와이를 거쳐 요코스카·사세보에서 수리를 마친 뒤 1952년 8월 26일 진해 군항에 입항했다. 이어 8월 31일 대통령, 국방부 장관이 참석한 행사에서 수성정·금성정·목성정·화성정으로 명명됐다.
PCS급 구잠정은 해군1함대 동해전대에 배치돼 한반도 전 해역에서 활약했다.
수성정은 1952년 9월 9일 첫 출항한 뒤 정전협정 때까지 175일 동안 출동 임무를 수행했다. 주로 서해 경비작전에 투입된 수성정은 1952년 10월 14일 교동도 근해에서 적 함선 1척을 파괴했으며, 다음 날에는 적 육상 진지를 공격했다.
1953년 5월 15일에는 황해도 연백군 봉화리 및 서산동 적 진지를 급습하고, 포격을 가했다. 7월 13일에는 중공군 주둔지에 포탄을 퍼부었다.
수성정보다 이틀 앞서 출항한 금성정은 1952년 9월 12일 교동도 상륙부대를 지원하는 함포 사격을 했다. 그 결과 적 7명을 사살하고, 벙커 4개를 무력화했다. 13일에는 봉화리 적 진지에 함포 사격을 가해 적 7명을 사살하고, 참호 4개를 파괴했다.
1953년 1월 15일에는 미 육군을 교동도에서 백령도로, 1월 19일에는 부상한 미 육군 장교를 연평도에서 인천으로 이송했다. 6월 14일에는 서해지구 철수작전에 투입돼 피란민 50여 명을 용매도에서 연평도로 수송했다.
경비 임무·부상병 이송·함포 사격 등 수행
목성정은 1952년 9월 23일 출항해 인천·백령도 사이에서 9회의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1953년 1월 20일에는 미군을 연평도에서 인천으로, 3월 9일에는 유격대 중환자를 연평도에서 인천으로 이송했다.
1952년 9월 23일 출항한 화성정은 11월 26일 병력과 군수품을 교동도에서 연평도로 수송했다.
1953년 1월 17일에는 미군을 인천에서 연평도로, 3월 9일에는 유격대를 연평도에서 인천으로, 5월 21일에는 부상병을 대수압도에서 용매도로 옮겼다.
6월 14일부터 7월 1일까지는 피란민 230명을 용매도에서 연평도로 철수시켰다. 1953년 4월 6~7일에는 교동도의 중공군 포진지와 한강 하구의 적 해안포 진지에 함포 사격을 했다.
금성정, 해상 대침투작전 투입…능력 발휘
금성정은 해상 대침투작전에서도 뛰어난 임무 수행 능력을 발휘했다. 금성정은 1966년 7월 29일 동해 근해를 경비하던 중 저진 동쪽 7마일 해상에서 불법으로 남하하는 9척의 북한 어선단을 포착했다. 금성정은 북한 어선단에 접근해 정선을 명령했지만 이들은 불응한 채 우리 어선단을 향해 남하했다. 금성정은 북한 어선단을 정선시키기 위해 위협사격을 가했고, 북한 어선단은 기관포로 맞섰다. 금성정은 40㎜ 함포와 20㎜ 기관포 등으로 응사해 무장 어선 1척을 대파했다.
금성정은 1962년 3월 12일 서해 대천 앞바다에서 PC(Patrol Chaser)급 오대산함과 함께 무장간첩선 추격 작전을 벌였다. 금성정은 이날 대천 남서방에서 간첩선을 발견한 뒤 사격을 가하며 추격했다. 그러나 속력의 열세와 협수로(狹水路: 항로 또는 수로 폭이 좁은 곳)의 제한으로 나포하지는 못했다.
글 = 윤병노 기자
● 전문가 해설
“YMS와 비슷한 규모 DCT·K-GUN 갖춰”
해군력 증강 위해 함정 지원 요청
PCS급 4척 인수 연합작전 참여
미 해군은 제2차 세계대전 때 59척의 PCS급 구잠정을 건조했다. PCS는 PC급 전투함보다 약 100톤이 작은 함정이었으며, YMS(Yard class Mine Sweeper·소해정)와 규모가 비슷했다.
선체 재질(목재)뿐만 아니라 톤수, 길이, 폭, 주 추진기 대수·마력, 발전기 대수·용량, 항적 거리, 승조원 수 등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화성정은 미 해군 운용 당시 최초 PCS에서 YMS로 재분류됐다가 다시 PCS로 분류된 이력을 갖고 있다.
무장도 YMS와 같은 40㎜ 함포 1문과 20㎜ 기관포 2문이 장착됐다. 대잠작전이 주 임무였던 만큼 폭뢰투하대(Depth Charge Track) 2조, K-Gun 2조, 7.2인치 헤지호그(Hedgehog: 대잠용 전방 투척기) 1조가 추가 설치됐다.
한국 해군은 6·25전쟁 당시 해군력을 증강하는 게 당면 과제였다.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미 극동해군사령관, 미 7함대사령관, 95기동부대사령관 등 미 고위급 지휘관과의 공식 회의나 사적 만남 때마다 한국 해군이 연합작전의 주요 구성원으로 참전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함정 지원을 강력히 요청했다. PCS 4척을 인수한 것도 이러한 노력의 결과다.
<임성채 해군역사기록관리단 군사편찬과장>
■ 기사 원문
국방일보 ‘대한민국 군함이야기’, 윤병노 기자,
2018년 8월 9일자
☞ PDF 보기 : 잠수함공격위해만든함정…한반도전해역서 맹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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