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실전서 익힌 대함·대잠·대공전…압록강함 최초 대공전 치러
6·25 전쟁 당시 항공모함·수송선단의 호송작전 맡아
해군사관학교 4~10기생 실습 함정…다수의 전투 참가
압록강함 비롯 두만강·대동강·낙동강함 눈부신 활약
PF급 호위함은 6·25전쟁 당시 유엔 해군의 제95기동부대 예하 95.7기동전대(한국 해군)에 배치돼 항공모함과 수송선단의 호송작전을 맡았다. 더불어 한국 해군의 기함(旗艦)으로 활동하며 해상 봉쇄 작전에서 크고 작은 공을 세웠다.
특히 함정 인수 후 미 해군으로부터 받은 교육훈련과 실전에서 습득한 대함·대잠·대공전 등의 작전 및 전술교리는 한국 해군 발전에 큰 도움이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6·25전쟁 중 해군사관학교 4~10기생들의 실습 함정으로서 초급장교 임무 수행 능력 배양에도 디딤돌이 됐다.
한국 해군 최초의 대공전 ‘신미도 전투’
압록강함은 한국 해군 최초로 대공전을 전개한 주인공이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말 새로운 소련제 전투기(MiG-15)가 등장했다. 유엔군은 적 신형 전투기의 성능을 파악하기 위해 기체 입수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리 해군본부는 1951년 4월 11일 신미도 근해에 추락한 적 전투기를 인양·운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날 오후 신미도를 향해 출항한 압록강함은 이틀 뒤 장병 8명을 압록강 하구의 대화도와 소화도에 상륙시켜 적정을 살피게 하고, 14일 신미도 근해에서 격추된 적 전투기를 발견했다.
작전을 수행 중이던 4월 16일 오전 7시58분. 적 야크(YAK)기 4대가 출현했다. 1·2번기는 고도 120피트까지 하강해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 사격을 가했다. 3번기는 압록강함의 중앙부를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이때까지 우리 해군은 함대공 전투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한반도 제공권을 유엔군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차 공격에 실패한 적기 편대는 2차 공격을 했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압록강함 포 요원들은 적기가 폭탄을 투하하고 상승하려는 순간 화력을 집중했다. 적기 1대가 포탄에 명중돼 폭음과 함께 추락했다.
적기 편대는 3차 공격을 시도했다. 압록강함 좌현 상공에서 기총 사격을 가하며 폭탄을 투하하려던 적기 1대가 또 포탄에 명중됐다. 적기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북쪽 방향으로 도주했고, 나머지 2대도 뒤를 따랐다.
이 전투에서 압록강함은 적기 1대를 격추하고, 1대를 파손하는 전과를 거뒀다. 압록강함은 승조원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들 중 2명은 함정실습 중이던 해사 4기 이흥섭(대령 예편·2013년 작고) 생도와 강병희(대령 예편) 생도였다.
두 생도는 충무무공훈장을 받았으며, 적기를 격추한 김철준(중령 예편·2012년 작고) 생도에게는 화랑무공훈장이 서훈됐다. 당시 4기생 총원 71명은 7개월에 걸친 실습을 위해 1950년 12월 14일부터 압록강함에 승선했다.
생도 함정실습은 4기생부터 10기생까지 이뤄졌으며, 가장 많이 투입된 함정은 PF급 호위함이었다. 생도들은 다수의 전투에 참가해 실전 경험을 축적했으며, 이는 우리 해군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적 전투기 인양·탈취 및 적선 격파 등 완수
압록강함은 적기가 투하한 폭탄 6발이 수중에서 폭발하는 충격으로 선체가 파손돼 침수가 심했다. 함정이 왼쪽으로 10도가량 기울어 갑판에서 보행이 어려울 정도였다. 다행히 함정 보수 요원들의 방수작업과 미국·영국 군함의 도움으로 침몰 위기에서 벗어났다.
압록강함은 1951년 4월 17일 저녁 부산항을 출항해 다음날 아침 일본 사세보항에 입항했다. 2개월 동안 파손된 함체를 수리한 압록강함은 작전에 재투입됐고, 7월 20일 압록강 하류 신미도 근해에 추락한 적 전투기(MiG-15) 인양·탈취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1952년 5월 21일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했다. 동해 울릉도 근해에서 미 유조함·탄약함으로 구성된 수송전단을 호송하는 임무를 전개하던 중 기동신호 해독 착오로 미 군함 마운트 베이커함(Mount Baker)과 충돌한 것. 이 사고로 승조원 21명이 사망하고, 1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침몰을 간신히 면한 압록강함은 부산항까지 예인됐지만 수리 불가능 판정이 내려져 미국으로 반환됐다.
두만강·대동강·낙동강함의 활약도 대단했다. 두만강함은 1950년 12월 11일 적선 2척을 격침했다. 1951년 7월 14일에는 황해도의 순위도 근해에서 인민군 집결소에 포격을 가해 적병 20여 명을 죽이고, 병사(兵舍) 10동을 파괴했다.
1952년 5월 31일에는 원산만 인근 해안지대의 적 포대 2개소와 토치카(콘크리트·흙주머니 등으로 쌓은 사격 진지) 3개소를 무력화하고, 적병 10여 명을 사살했다. 같은 해 8월 4일에는 적 철도시설 6개소를 파괴했으며, 11일에는 적 포대 1개소를 파괴하고 적선 1척을 격침했다. 1953년 6월 25일에는 태안 난도 인근 해상에 미 해군 제트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조작업을 벌여 조종사 1명을 구출했다.
주로 동해에서 해상봉쇄·호송임무를 수행하던 대동강함은 원산 근해에서 적 진지에 함포사격을 가해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낙동강함은 1951년 12월 24일 원산 여도 근해에서 적선 2척을 격침했다. 1952년 5월 4일에는 원산만 인근 해안지대에서 적 진지에 포격을 가해 참호 3개소를 파괴했고, 5월 18일에는 함경남도 단천 부근에서 적 보급 기차를 파괴했다. 7월 31일에는 원산 근해에서 적선 1척을 격침하고, 1척을 격파했다.
강추위 뚫고 황해도 피란민 구출 작전 성공
1951년 1월 5일부터 두만강함은 3척의 함정을 지휘해 진남포·옹진 근해를 봉쇄했고, 압록강함은 9척의 함정을 지휘해 해주·인천 근해 봉쇄작전을 수행했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아군 전선이 후퇴하자 주민들도 북한군을 피해 남하했다. 그러나 황해도 일대는 퇴로가 끊겨 주민과 피란민들이 해안지대로 모였고, 이들은 한국 해군에 구출을 요청했다. 한국 해군은 두만강함에 예하 함정을 지휘해 청년의용군의 지상작전을 적극 지원하고, 피란민을 인근 도서로 수송할 것을 명령했다.
황해도 지구 피란민 구출 작전은 흥남철수작전과 달리 한국 해군이 주도했다. 연중 가장 추운 1월. 영하 20도의 추위와 풍랑으로 해안이 결빙돼 함정 접안이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소형 목선을 이용하거나 육지와 함정 사이에 로프를 연결해 피란민을 승선시키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충을 겪었다.
그럼에도 두만강함과 예하 함정들은 함포로 청년의용군을 지원하면서 피란민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백령도·대청도·초도 등으로 이들을 안전하게 이송했다. /사진=해군본부 제공
■ 기사 원문
국방일보 ‘대한민국 군함이야기’, 윤병노 기자,
2018년 7월 26일자
☞ PDF 보기 : 실전서 익힌 대함·대잠·대공전…해군 발전 원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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