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레이더·대잠무기 등 장착…주력 전투함으로 맹활약
연안작전 위주서 벗어나 발전 계기
한국 해군은 창설 초기부터 미 해군의 PF급 호위함을 도입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미 정부 정책에 의해 구매가 불가능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발발했고, 한국 해군의 역할과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미 해군은 예비 전력으로 운용하던 PF급 호위함을 양도했다.
한국 해군 보유 전투함보다 월등한 성능
PF급은 미 해군의 타코마급 호위함(Tacoma Class Patrol Frigate)이다. 1943년 건조 직후에는 PG(Patrol Gunboat)급으로 분류됐다가 같은 해 PF(Patrol Frigate)급으로 재분류됐다. PF급 호위함들은 미 해군이 1년여 운용하다 1945년 8월 소련 해군에 대여됐으며, 1949년 11월 다시 반환받은 이력을 갖고 있다.
PF급 호위함은 한국 해군이 그때까지 보유하고 있던 전투함보다 성능이 월등했다. 만재 배수량 2227톤, 전장 304피트, 전폭 37피트에 강철로 제작됐다.
무장은 3인치 포 3문, 40㎜ 포 2문, 20㎜ 기관포 9문을 장착했다. 대잠수함 무기 발사대인 폭뢰트랙(Depth Charge Track) 2조, K-건(Gun) 8조, 7.2인치 헤지호그(Hedgehog: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영국이 개발한 잠수함 공격용 다연장 소형 폭뢰 전방 투척 무기) 1조도 갖췄다.
PF급 호위함은 6·25전쟁 중 수많은 전투에서 크고 작은 공을 세웠다. 또 유조선과 보급선, 피난민 수송선 등을 호송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전후에도 구축함(DD: Destroyer)이 인수되기 전까지 한국 해군의 주력 전투함으로 활약했다.
6·25전쟁 계기 두만강함·압록강함 인수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은 백두산함(PC-701) 구매 이후 전투함을 추가 확보하기 위해 퇴역한 미 군함들이 정박해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부두에는 PF급 호위함도 정박해 있었다. 손 총장은 만재 배수량이 450톤인 PC(Patrol Chaser)급 전투함보다 크고, 전투력이 우수한 PF급 호위함을 구매하기로 마음먹었다.
손 총장은 이 같은 결심을 한국 정부에 보고한 뒤 미 국방부·국무부와 교섭을 시작했다. 미 국방부는 판매 가능 의사를 표했지만 국무부의 입장이 달랐다. 미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PF급 이상 함정은 다른 국가에 판매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손 총장은 결국 민간에 매각된 PC급 함정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아쉬움을 해소해준 것은 6·25전쟁이었다. 한국 해군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7월 10일을 기해 유엔 해군의 일원으로 임무를 수행했다. 9월 12일에는 제95기동부대에 소속됐다. 봉쇄·호송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제95기동부대는 서해안전대(TG 95.1), 동해안전대(TG 95.2), 소해전대(TG 95.6), 한국 해군(TG 95.7)으로 구성됐다.
앨런 스미스(Allen E. Smith·소장) 제95기동부대사령관은 유엔 해군의 봉쇄·호송작전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한반도 해역에 익숙한 한국 해군의 참전이 필수라고 판단했고, PF급 호위함 2척을 양도하기로 했다.
이에 한국 해군은 1950년 9월 6일 최효용(준장 예편·2018년 작고) 중령, 9월 13일에는 박옥규(중장 예편·2대 해군참모총장·1971년 작고) 대령을 PF급 호위함 인수함장으로 임명했다.
박 대령을 비롯한 인수 요원들은 1950년 10월 23일 일본 요코스카항에 정박 중이던 PF-49 머스코지(Muskogee)함과 PF-48 록퍼드(Rockford)함을 인수했다. 두 함정은 11월 5일 두만강함(PF-61)과 압록강함(PF-62)으로 명명됐다. 두만강·압록강함 승조원들은 한 달 동안 미 해군에게 봉쇄·호송작전에 필요한 교육훈련을 받은 뒤 작전에 투입됐다.
근해작전 수행 가능한 해군력으로 발전
1951년 6월 20일 스미스 제독에 이어 조지 다이어(George C. Dyer) 제독이 제95기동부대사령관을 맡았다. 그 역시 한국 해군의 능력과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다이어 사령관은 한국 해군에 PF급 호위함을 더 양도해 달라고 미 해군에 건의했다. 한국 해군도 이전부터 PF급 호위함의 추가 인수를 요청했고, 다이어 사령관의 적극적인 건의가 더해져 미국은 PF급 호위함 2척을 추가 양도하기로 했다.
한국 해군은 1951년 9월 말 최효용 중령과 이재송(대령 예편·1997년 작고) 중령을 인수함장으로 임명했다. 10월 8일 일본으로 건너간 인수요원들은 요코스카항에서 PF-3 타코마함과 PF-5 호퀴엄(Hoquiam)함을 인수했다. 2척의 함정은 대동강함(PF-63)과 낙동강함(PF-65)으로 명명됐다. 1952년 9월 2일에는 이성호(중장 예편·5대 해군참모총장) 중령 등이 요코스카항에서 PF-4 소살리토(Sausalito)함을 인수해 임진강함(PF-66)으로 명명했다.
한국 해군은 6·25전쟁 중 PF급 호위함 5척을 인수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압록강함이 1952년 5월 21일 울릉도 근해에서 경비 임무를 수행하던 중 미 해군 함정과 충돌해 퇴역함으로써 4척만 운용했다.
레이더·음향탐지기·대잠수함무기 등을 장착한 PF급 호위함은 한국 해군이 연안작전 위주에서 벗어나 근해에서도 작전이 가능한 해군력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 기사 원문
국방일보 ‘대한민국 군함이야기’, 윤병노 기자,
2018년 7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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