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해안에 더 가까이… 수많은 전공(戰功) 뒤엔 희생도 따라
지리산함, 동·서해안 최전방서 회피 기동하며 적 진지 포격
1951년 부이 기뢰에 접촉돼 침몰…승조원 57명 전원 전사
지리산함 침몰사건 이후 한국 해군 함정에 ‘4’ 붙이지 않아
작은 고추가 맵다…‘고추함’ 지리산함
우리 해군은 1951년 2월 이후 해병대를 상륙시켜 원산항 부근의 여러 섬을 점령했다. 그러자 적은 원산항 근해에서 박격포와 야포로 아군 함정을 위협했다.
그럴 때 유엔 해군 함정들은 안전 해역으로 이동했지만 지리산함은 회피 기동을 하며 적 진지에 포격을 가하곤 했다. 이때부터 유엔 해군은 지리산함(PC-704)을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에 비유해 ‘Hot pepper ship(고추함)’이라고 불렀다.
지리산함은 별명에 걸맞은 활약을 펼쳤다. 주로 동·서해안 최전방에서 작전을 수행한 지리산함은 적 진지와 포대에 포격을 가해 큰 전과를 거뒀다. 그러던 1951년 12월 26일 비보가 날아들었다. 원산항 인근에서 야간 경비작전 임무를 수행하던 지리산함이 부유 기뢰에 접촉돼 침몰했고, 이태영 중령을 포함한 승조원 57명 전원이 전사한 것.
당시 해군본부 상황실은 출동 중인 함정으로부터 매 시간 위치를 보고받았다. 그런데 지리산함은 사고 당일 새벽 5시 이후 아무런 보고가 없었다. 수색작전에 나선 해군은 여도 해안에서 지리산함의 함체 조각과 전사자들을 발견했다.
수색작전에 참가했던 한 해병은 당시 “돌섬에 가보니 전사자 3명이 로프를 연결해 표류하고 있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해군 정신의 표본이었다”는 증언을 남겼다.
지리산함 침몰 이후 한국 해군은 각 함정의 단독작전을 금지했으며, PC급 함정은 소해 함정과 같이 행동하도록 했다. 특히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 해군은 함정 번호에 ‘4’자를 붙이지 않았다.
묘책으로 위험에 놓인 전우 구한 삼각산함
삼각산함(PC-703)과 함장 이성호(중장 예편·5대 해군참모총장) 중령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1950년 9월 초 삼각산함은 미 극동군사령부 정보참모부에서 파견된 클라크 대위와 휘하의 정보요원을 영흥도에 상륙시켰다. 이어 영흥도 주변 해역에 머물면서 한미 첩보요원들을 보호했다.
또 포술장 고경영(소장 예편) 중위 이하 20여 명의 병력으로 상륙반을 편성해 연평도를 점령하도록 했다. 이들은 북한 내무서원 10여 명을 생포해 정보를 습득한 뒤 연합군에 전달했다.
1950년 9월 14일에는 함명수(중장 예편·7대 해군참모총장·2016년 작고) 첩보대장과 해군이동기지 부대원들이 남아 있는 영흥도에 적 1개 대대가 상륙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이를 토대로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9월 16일 북한군이 영흥도에 상륙하면서 이용한 범선 대부분을 파괴했다. 범선 일부를 남겨 놓은 이유는 적이 영흥도를 탈출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북한군은 삼각산함의 의도대로 9월 17일 영흥도를 버리고 육지로 철수했다. 삼각산함의 묘책으로 함명수 첩보대장과 해군이동기지 부대원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서해안 철수작전서 맹활약…피난민 구출
삼각산함은 서해안 철수작전에서도 맹활약했다. 1951년 1월 초 삼각산함은 진남포 외해의 초도 해변 산등성이에 약 3000명으로 추산되는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성호 함장은 LST 단양호에 피난민을 안전지대로 이송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단양호는 해군본부 명령 없이 행동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이성호 함장은 명령을 이행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며 피난민 철수지원을 재차 지시했다.
당시 이성호 함장은 해군본부에 상황을 보고했지만 회신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판단해 피난민 철수를 명령했다. 단양호가 두 번째로 피난민을 실어 나를 때 해군본부에서 연락이 왔다. 이성호 함장에게 부산으로 귀항하라는 명령이었다.
해군본부가 삼각산함의 보고에 즉시 회신하지 못한 이유는 피난민 대책이 수립되지 않아서였다. 해군본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임의로 행동한 것에 책임을 물어 이성호 함장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이성호 함장은 해군본부의 회신이 없어 인도적 차원에서 피란민들을 구출했고, 군사적 차원에서도 그들을 남겨뒀다면 적이 돼 아군과 맞설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취한 행동이었다고 항변했다.
미 군사고문관들도 이성호 함장의 행동을 적극 옹호했다. 군법회의에서는 현장 선임장교의 판단이 작전 성공에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성호 함장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소해작전 당시 기지 발휘해 기뢰 제거
삼각산함은 소해작전에서도 공을 세웠다. 6·25전쟁 초기 우리 해군은 소해 장구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삼각산함은 기지를 발휘해 2척의 발동선 선미에 3~4m 길이의 ‘부이 앵커(Buoy Anchor)’를 매달고, 그 사이에 체인을 연결한 다음 이를 발동선이 끌도록 했다.
삼각산함 포술장 고경영 중위는 “발동선 2척에 계류삭(Mooring Rope·선박을 계류하기 위해 설치한 로프)과 체인을 연결해 항로를 따라 끌게 하니 계류 기뢰 7~8개가 떠올랐다. 우리는 기뢰를 건져 소총과 기관총으로 파괴했다”고 회고했다.
‘경찰 해군’ 수준 임무서 ‘내해 방어 해군력’ 갖춰
적 집결소 및 해안포에 포격 가해
특공작전·소해작전 등 임무 수행
우리 해군은 미국으로부터 모두 9척의 PC급 구잠함(驅潛艦·대잠수함 함정)을 도입했다. 이 중 백두산·금강산·삼각산·지리산함은 6·25전쟁 발발 이전 해군 장병들의 성금으로 구매했다. 한라산·묘향산함은 전쟁 중 무상으로, 오대산·금정산·설악산함은 정전협정 이후 대여 형식으로 양도받았다.
PC급 전투함의 도입은 ‘경찰 해군’ 수준의 임무만 가능했던 우리 해군이 ‘내해 방어 해군력’을 갖추는 디딤돌이 됐다. 450톤 크기의 PC급 전투함은 유엔 해군의 대형함이 진입할 수 없는 해안 가까이 접근해 3인치 포로 적 집결소 및 해안포 등에 포격을 가했다. 또 해안봉쇄작전, 특공작전, 소해작전 등 다양한 임무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이 같은 임무는 PC급 함정만 수행할 수 있었다.
PC급 전투함은 수많은 전공을 세웠지만 희생도 뒤따랐다. 백두산함은 대한해협해전에서 2명의 전사자를 냈고, 지리산함은 적의 부이 기뢰에 접촉돼 승조원 57명이 희생됐다. 이를 계기로 우리 해군은 기뢰의 위험성과 소해작전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전술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다.
■ 기사 원문
국방일보 ‘대한민국 군함이야기’, 윤병노 기자, 2018년 6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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