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해군(조선해안경비대)은 정부 수립 이전까지 37척의 함정을 획득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함정이 노후화되고, 소해정이어서 제한된 해상경비 임무만 가능했다. 정부 수립 후에도 미국 측에서 한국 해군의 임무를 해안경비대 기능으로 국한하면서 어떠한 전투함도 지원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실정을 잘 알고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손원일 제독에게 전투함 확보 방안을 모색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해군은 1949년 6월 1일 전투함 건조를 위한 ‘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를 구성하고, 모금운동에 돌입했다.
해군 장병들은 월급의 일부를 군함 건조 기금으로 출연했으며, 해군부인회도 바자회 등을 열어 수익금을 기부했다. 그 결과 4개월 만에 목표로 정한 1만5000달러를 모금했다.
해군은 국내 기술로 군함을 건조하는 방안을 심층 검토했지만 시설·기술 등이 미비하고, 경비가 더 소요될 것으로 판단해 해외 구매를 결정했다. 손 제독은 1949년 9월 이 같은 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이승만 대통령도 4만5000달러를 지원했다.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인수
해군은 미국과 협상해 PC(Patrol Chaser)급 함정을 구매하기로 했다. PC급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무장을 해제하고, 미 해양대학교에서 실습함으로 사용 중이었다.
한국 정부는 1949년 10월 17일 미국이 요구한 1만8000달러를 지불하고, 미 해양대학교로부터 PC급 함정 1척을 인수했다. 우리 해군이 처음으로 전투함을 갖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PC급은 독일 잠수함을 격퇴하기 위해 만든 450톤급 구잠정(驅潛艇)이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361척이 건조됐다. 3인치 포 1문, 40㎜ 포 1문, 20㎜ 대공포 5문, 폭뢰 투척기 2대를 장착했다. 우리 해군이 구매한 함정은 1944년 7월 24일 USS PC-823으로 취역했으며, 주로 대서양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이 함정은 인수 당시 뉴저지 호보켄항 인근의 하버 보트 빌딩 컴퍼니(Harbor Boat Building Co.) 조선소에 있었다. 인수 요원 16명은 이 함정에서 먹고 자며 페인트칠과 기관 정비에 매달렸다.
이어 2개월이 지난 1949년 12월 26일 뉴욕항의 미 해안경비대 제8부두에서 명명식을 개최했다. 손원일 제독은 함명을 ‘백두산’으로 명명하고, 함장 박옥규(중장 예편·2대 해군참모총장·1971년 작고) 중령에게 명명장을 수여했다. 선체 번호는 ‘701’을 부여했다.
만재 배수량이 450톤인 백두산함은 현재 우리 해군이 운용하는 유도탄고속함(PKG: Patrol Killer Guided missile)보다 작은 함정이지만 해군은 상징성을 고려해 '함(艦)'으로 분류했다. 1950년 초반 하와이 출발…진해로 입항
백두산함은 명명식 후 뉴욕항을 출항해 마이애미와 파나마 운하, 멕시코 만자니요항을 거쳐 1950년 1월 24일 하와이 호놀롤루항에 도착했다. 해군은 이곳에서 미 국방부와 협상을 벌여 3월 중순께 백두산함에 3인치 포 1문을 설치하고, 괌의 아프라항에서 3인치 포탄 100발을 적재했다.
1950년 4월 10일 진해항에 입항한 인수 요원들은 최용남(소장 예편·1998년 작고) 중령을 비롯한 65명의 승조원과 임무를 교대했다. 백두산함은 진해에서 중기관총 2정을 장착하고, 5월 하순부터 자체 교육훈련에 돌입했다.
백두산함은 태평양을 횡단한 한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이었다. 덩치가 작은 백두산함이 단독으로 대양을 횡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성호(중장 예편·5대 해군참모총장) 중령이 “황천(荒天·비바람이 심한 날씨) 땐 흡사 잠수함인 양 파도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나아갔다”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인수 요원들은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무사히 진해항에 입항함으로써 전투함 ‘1번함’이 6·25전쟁에서 맹활약할 수 있는 디딤돌을 놓았다.
금강산·삼각산 등 PC급 함정 속속 도입
우리 해군은 전투함 추가 구매를 위해 미 정부와 협상을 벌였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이에 따라 민간에 매각된 PC급 함정을 물색했고, 1949년 10월 17일 산 피에트로항에 정박해 있는 PC급 함정 3척을 척당 1만2000달러에 구매했다.
인수 요원들이 함정 정비를 끝낸 1950년 5월 27일. 우리 해군은 200여 명의 교민이 참석한 가운데 롱비치항에서 PC급 함정 3척의 명명식을 거행했다. 손 제독은 3척의 함명을 금강산·삼각산·지리산으로 부여했다.
3척의 함정은 1950년 6월 12일 롱비치를 떠나 샌프란시스코 발레이호항에서 3인치 포를 장착했다. 1950년 6월 24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PC급 함정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중기관총을 설치한 뒤 1950년 6월 26일 오전 긴급 출항했다. 금강산함과 삼각산함은 1950년 7월 16일 진해에 입항했으며, 출항 직후 엔진 고장이 발생한 지리산함은 7월 25일 입항을 완료했다.
해군은 6·25전쟁 기간 중 전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여 1951년 10월 PC급 함정 2척을 추가 인수했다. 명명식은 1952년 5월 3일 부산의 해군본부 부두에서 개최됐고, 한라산과 묘향산을 함명으로 부여받았다.
또 해군은 1958년 주한미해군사령부와 협의해 해군증강계획(새싹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 의해 1960년 11월 오대산함과 금정산함, 1964년 설악함을 도입했다.
우리 해군(조선해안경비대)은 정부 수립 이전까지 37척의 함정을 획득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함정이 노후화되고, 소해정이어서 제한된 해상경비 임무만 가능했다. 정부 수립 후에도 미국 측에서 한국 해군의 임무를 해안경비대 기능으로 국한하면서 어떠한 전투함도 지원받을 수 없었다.
이러한 실정을 잘 알고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손원일 제독에게 전투함 확보 방안을 모색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해군은 1949년 6월 1일 전투함 건조를 위한 ‘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를 구성하고, 모금운동에 돌입했다.
해군 장병들은 월급의 일부를 군함 건조 기금으로 출연했으며, 해군부인회도 바자회 등을 열어 수익금을 기부했다. 그 결과 4개월 만에 목표로 정한 1만5000달러를 모금했다.
해군은 국내 기술로 군함을 건조하는 방안을 심층 검토했지만 시설·기술 등이 미비하고, 경비가 더 소요될 것으로 판단해 해외 구매를 결정했다. 손 제독은 1949년 9월 이 같은 방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이승만 대통령도 4만5000달러를 지원했다.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 인수
해군은 미국과 협상해 PC(Patrol Chaser)급 함정을 구매하기로 했다. PC급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무장을 해제하고, 미 해양대학교에서 실습함으로 사용 중이었다.
한국 정부는 1949년 10월 17일 미국이 요구한 1만8000달러를 지불하고, 미 해양대학교로부터 PC급 함정 1척을 인수했다. 우리 해군이 처음으로 전투함을 갖게 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PC급은 독일 잠수함을 격퇴하기 위해 만든 450톤급 구잠정(驅潛艇)이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361척이 건조됐다. 3인치 포 1문, 40㎜ 포 1문, 20㎜ 대공포 5문, 폭뢰 투척기 2대를 장착했다. 우리 해군이 구매한 함정은 1944년 7월 24일 USS PC-823으로 취역했으며, 주로 대서양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이 함정은 인수 당시 뉴저지 호보켄항 인근의 하버 보트 빌딩 컴퍼니(Harbor Boat Building Co.) 조선소에 있었다. 인수 요원 16명은 이 함정에서 먹고 자며 페인트칠과 기관 정비에 매달렸다.
이어 2개월이 지난 1949년 12월 26일 뉴욕항의 미 해안경비대 제8부두에서 명명식을 개최했다. 손원일 제독은 함명을 ‘백두산’으로 명명하고, 함장 박옥규(중장 예편·2대 해군참모총장·1971년 작고) 중령에게 명명장을 수여했다. 선체 번호는 ‘701’을 부여했다.
만재 배수량이 450톤인 백두산함은 현재 우리 해군이 운용하는 유도탄고속함(PKG: Patrol Killer Guided missile)보다 작은 함정이지만 해군은 상징성을 고려해 '함(艦)'으로 분류했다. 1950년 초반 하와이 출발…진해로 입항
백두산함은 명명식 후 뉴욕항을 출항해 마이애미와 파나마 운하, 멕시코 만자니요항을 거쳐 1950년 1월 24일 하와이 호놀롤루항에 도착했다. 해군은 이곳에서 미 국방부와 협상을 벌여 3월 중순께 백두산함에 3인치 포 1문을 설치하고, 괌의 아프라항에서 3인치 포탄 100발을 적재했다.
1950년 4월 10일 진해항에 입항한 인수 요원들은 최용남(소장 예편·1998년 작고) 중령을 비롯한 65명의 승조원과 임무를 교대했다. 백두산함은 진해에서 중기관총 2정을 장착하고, 5월 하순부터 자체 교육훈련에 돌입했다.
백두산함은 태평양을 횡단한 한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이었다. 덩치가 작은 백두산함이 단독으로 대양을 횡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성호(중장 예편·5대 해군참모총장) 중령이 “황천(荒天·비바람이 심한 날씨) 땐 흡사 잠수함인 양 파도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나아갔다”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인수 요원들은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무사히 진해항에 입항함으로써 전투함 ‘1번함’이 6·25전쟁에서 맹활약할 수 있는 디딤돌을 놓았다.
금강산·삼각산 등 PC급 함정 속속 도입
우리 해군은 전투함 추가 구매를 위해 미 정부와 협상을 벌였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이에 따라 민간에 매각된 PC급 함정을 물색했고, 1949년 10월 17일 산 피에트로항에 정박해 있는 PC급 함정 3척을 척당 1만2000달러에 구매했다.
인수 요원들이 함정 정비를 끝낸 1950년 5월 27일. 우리 해군은 200여 명의 교민이 참석한 가운데 롱비치항에서 PC급 함정 3척의 명명식을 거행했다. 손 제독은 3척의 함명을 금강산·삼각산·지리산으로 부여했다.
3척의 함정은 1950년 6월 12일 롱비치를 떠나 샌프란시스코 발레이호항에서 3인치 포를 장착했다. 1950년 6월 24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PC급 함정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중기관총을 설치한 뒤 1950년 6월 26일 오전 긴급 출항했다. 금강산함과 삼각산함은 1950년 7월 16일 진해에 입항했으며, 출항 직후 엔진 고장이 발생한 지리산함은 7월 25일 입항을 완료했다.
해군은 6·25전쟁 기간 중 전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여 1951년 10월 PC급 함정 2척을 추가 인수했다. 명명식은 1952년 5월 3일 부산의 해군본부 부두에서 개최됐고, 한라산과 묘향산을 함명으로 부여받았다.
또 해군은 1958년 주한미해군사령부와 협의해 해군증강계획(새싹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 의해 1960년 11월 오대산함과 금정산함, 1964년 설악함을 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