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해군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그 하나로 1950년 5월 초순 동·서해 방위를 담당하는 제1·2정대에 함정을 증강 배치했다. 더불어 묵호경비부와 포항경비부를 중심으로 주문진·삼척·죽변·김포 등지에 해상감시소를 설치했다.
북한은 북한군 5사단의 남진을 돕고, 강릉의 국군 8사단 배후를 교란하기 위해 6월 25일 오전 3시30분 옥계를 비롯한 삼척·임원 등지에 게릴라부대를 상륙시켰다. 이날 옥계와 금진 방면에는 약 1800명이, 삼척 방면에는 약 800명이, 죽변·임원 방면에는 약 500명의 무장병력이 상륙했다. 6·25전쟁은 지상군 전면 남침 전에 이미 해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묵호항에 정박해 있던 가평정은 6월 25일 새벽 5시 묵호경비부 사령부로부터 긴급출동 명령을 받았다. 옥계 해안에 상륙 중인 북한 수송선단을 격침하라는 것. 새벽 6시 묵호항을 출항한 가평정은 1시간20분 뒤 북한 해군 경비정과 교전을 벌였다. 20여 분의 교전에서 가평정은 37㎜ 포로 적함을 명중시켰고, 적함은 북으로 도주했다.
함수에 적 포탄 1발이 명중된 가평정은 묵호항으로 돌아와 임시 방수 작업을 마친 오전 9시50분 다시 옥계 해역으로 출동했다. 이어 오후 3시쯤 옥계 북쪽 3㎞ 지점에서 상륙 중인 적을 발견하고 포격을 가했다. 산속으로 도주한 적이 여러 문의 박격포로 응사했지만, 가평정은 오후 5시30분 해안에 있던 적 상륙정 1척을 격파하고, 소형선박 1척을 노획해 귀항했다.
북한군이 떠내려 보낸 기뢰에 피해 증가
소해(掃海)작전은 적이 바다에 부설한 기뢰를 찾아 제거하는 것이다. 기뢰 부설은 어렵지 않지만, 이를 완전히 제거하기는 쉽지 않다. 북한군은 기뢰를 활용해 한미 해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미 95기동부대사령관 스미스(Allan Edward Smith·소장) 제독이 1950년 가을 “미 해군은 한국 해역에서 해양통제권을 상실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북한 해역의 조류는 동·서해 모두 남쪽으로 흘렀다. 이로 인해 북한에서 부류기뢰를 바다에 부설하면 남쪽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북한은 소련 군사고문관의 도움을 받아 어선 등에 레일을 깔고 기뢰를 부설했다. 부류기뢰는 헤이그(Hague) 조약에 따라 사용이 금지됐지만, 소련과 북한은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기에 계류기뢰의 케이블을 절단하고, 남쪽으로 기뢰를 떠내려 보냈다.
한국 해군에는 미국에서 인수한 YMS급과 일본에서 인수한 JMS급 연안 소해정이 있었지만, 소해 장비가 없었다. 1950년 9월 초 북한군이 떠내려 보낸 기뢰가 서해에서 발견되자 한국 해군은 한반도 연안과 항구에서 소해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1950년 9월 중순 이후부터 기뢰 피해가 증가했다.
1950년 9월 28일 가평정은 구룡포 근해에서 기뢰에 접촉해 침몰했다. 전사 25명에 생존자는 5명뿐이었다. 1950년 10월 1일에는 개성정이 기뢰 접촉으로 선저(船底·배 밑바닥)가 파손되고, 승조원 5명이 상처를 입었다.
출동 3462회, 폭파처리 기뢰 1012발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적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해 1950년 10월 20일 원산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북한이 원산 근해에 부설한 3000여 발의 기뢰가 유엔군의 발목을 잡았다. 유엔군은 대대적으로 기뢰대항작전을 펼쳤지만, 많은 함정이 기뢰 접촉으로 침몰했다.
우리 해군의 피해도 컸다. 10월 19일 원산 근해에서 소해작전을 전개하던 공주정이 자기(磁氣)감응기뢰로 추정되는 기뢰에 접촉돼 침몰했다. 이로 인해 15명이 전사하고, 11명이 부상했다.
서해에서도 북한군이 부설한 기뢰는 골칫거리였다. 특히 북한군은 유엔군이 원활한 보급을 위해 필수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대동강 입구인 진남포에 계류기뢰와 자기감응기뢰를 부설했고, 부류기뢰를 조류에 떠내려 보냈다.
한국 해군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소해작전을 위해 1950년 10월 23일 금강산정·경주정·광주정·강릉정·김천정·길주정 등 6척의 소해정으로 구성된 제1소해정대를 창설했다. 이어 10월 26일 6척의 소해정을 일본 사세보 미 해군기지로 보내 소해장비를 보강하고, 소해전술을 익히도록 했다. 함정의 무장도 37㎜ 대전차포를 철거하고, 40㎜ 포와 20㎜ 기관포로 교체했다.
또 1951년 1월 6일 YMS급 함정 3척을, 4월 25일 YMS급 함정 3척을 추가로 사세보로 보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제1소해정대는 1951년 1월 3일부터 미 해군 소해정대와 본격적으로 소해작전을 수행하게 됐다.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까지 한국 해군의 기뢰 소해작전 출동은 3462회였으며, 폭파 처리한 기뢰는 1012발에 달했다.
스미스 제독, 강경정 혁혁한 무훈 극찬
중공군의 참전으로 아군의 전선은 서울 이남까지 후퇴했다. 1951년 1월 5일 북한군과 중공군 각 1개 대대 700명의 병력이 인천시를 점거했다. 당시 강경정은 인천해역 봉쇄·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강경정은 1월 11일 적이 장악 중인 인천항에 돌입해 피란민 500여 명을 구출한 뒤 덕적도로 수송했다. 1월 25일에는 인천기계제작소 일대에 함포 사격을 가했고, 인근 도서를 왕래하는 적 범선 10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다.
스미스 제독은 강경정에 인천지구 정보를 요청했다. 강경정은 인천에 특공대를 상륙시켜 적을 생포해 오기로 했다. 1951년 1월 27일 강경정은 단독으로 인천항에 침투해 특공대를 상륙시켰다. 특공대는 적이 구축한 참호 속으로 돌진해 적 47명을 사살하고, 북한군·중공군 각 1명을 생포한 뒤 귀환했다. 미 해군은 특공대가 생포한 적으로부터 중공군 주력부대의 위치를 파악했으며, 적을 공습하는 데 성공했다.
스미스 제독은 ‘Well done to R.O.K. YMS-510’ 전보를 보내고 “이번 510정의 혁혁한 무훈은 전파를 타고 순식간에 널리 알려졌다. 본인은 한국전사에 찬란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 510정의 무훈을 전군에 알리니 각자 더욱 분발하라”고 강조했다.
우리 해군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그 하나로 1950년 5월 초순 동·서해 방위를 담당하는 제1·2정대에 함정을 증강 배치했다. 더불어 묵호경비부와 포항경비부를 중심으로 주문진·삼척·죽변·김포 등지에 해상감시소를 설치했다.
북한은 북한군 5사단의 남진을 돕고, 강릉의 국군 8사단 배후를 교란하기 위해 6월 25일 오전 3시30분 옥계를 비롯한 삼척·임원 등지에 게릴라부대를 상륙시켰다. 이날 옥계와 금진 방면에는 약 1800명이, 삼척 방면에는 약 800명이, 죽변·임원 방면에는 약 500명의 무장병력이 상륙했다. 6·25전쟁은 지상군 전면 남침 전에 이미 해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묵호항에 정박해 있던 가평정은 6월 25일 새벽 5시 묵호경비부 사령부로부터 긴급출동 명령을 받았다. 옥계 해안에 상륙 중인 북한 수송선단을 격침하라는 것. 새벽 6시 묵호항을 출항한 가평정은 1시간20분 뒤 북한 해군 경비정과 교전을 벌였다. 20여 분의 교전에서 가평정은 37㎜ 포로 적함을 명중시켰고, 적함은 북으로 도주했다.
함수에 적 포탄 1발이 명중된 가평정은 묵호항으로 돌아와 임시 방수 작업을 마친 오전 9시50분 다시 옥계 해역으로 출동했다. 이어 오후 3시쯤 옥계 북쪽 3㎞ 지점에서 상륙 중인 적을 발견하고 포격을 가했다. 산속으로 도주한 적이 여러 문의 박격포로 응사했지만, 가평정은 오후 5시30분 해안에 있던 적 상륙정 1척을 격파하고, 소형선박 1척을 노획해 귀항했다.
북한군이 떠내려 보낸 기뢰에 피해 증가
소해(掃海)작전은 적이 바다에 부설한 기뢰를 찾아 제거하는 것이다. 기뢰 부설은 어렵지 않지만, 이를 완전히 제거하기는 쉽지 않다. 북한군은 기뢰를 활용해 한미 해군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미 95기동부대사령관 스미스(Allan Edward Smith·소장) 제독이 1950년 가을 “미 해군은 한국 해역에서 해양통제권을 상실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북한 해역의 조류는 동·서해 모두 남쪽으로 흘렀다. 이로 인해 북한에서 부류기뢰를 바다에 부설하면 남쪽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다. 북한은 소련 군사고문관의 도움을 받아 어선 등에 레일을 깔고 기뢰를 부설했다. 부류기뢰는 헤이그(Hague) 조약에 따라 사용이 금지됐지만, 소련과 북한은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기에 계류기뢰의 케이블을 절단하고, 남쪽으로 기뢰를 떠내려 보냈다.
한국 해군에는 미국에서 인수한 YMS급과 일본에서 인수한 JMS급 연안 소해정이 있었지만, 소해 장비가 없었다. 1950년 9월 초 북한군이 떠내려 보낸 기뢰가 서해에서 발견되자 한국 해군은 한반도 연안과 항구에서 소해작전에 돌입했다. 그러나 1950년 9월 중순 이후부터 기뢰 피해가 증가했다.
1950년 9월 28일 가평정은 구룡포 근해에서 기뢰에 접촉해 침몰했다. 전사 25명에 생존자는 5명뿐이었다. 1950년 10월 1일에는 개성정이 기뢰 접촉으로 선저(船底·배 밑바닥)가 파손되고, 승조원 5명이 상처를 입었다.
출동 3462회, 폭파처리 기뢰 1012발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적의 후방을 차단하기 위해 1950년 10월 20일 원산에 상륙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북한이 원산 근해에 부설한 3000여 발의 기뢰가 유엔군의 발목을 잡았다. 유엔군은 대대적으로 기뢰대항작전을 펼쳤지만, 많은 함정이 기뢰 접촉으로 침몰했다.
우리 해군의 피해도 컸다. 10월 19일 원산 근해에서 소해작전을 전개하던 공주정이 자기(磁氣)감응기뢰로 추정되는 기뢰에 접촉돼 침몰했다. 이로 인해 15명이 전사하고, 11명이 부상했다.
서해에서도 북한군이 부설한 기뢰는 골칫거리였다. 특히 북한군은 유엔군이 원활한 보급을 위해 필수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대동강 입구인 진남포에 계류기뢰와 자기감응기뢰를 부설했고, 부류기뢰를 조류에 떠내려 보냈다.
한국 해군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소해작전을 위해 1950년 10월 23일 금강산정·경주정·광주정·강릉정·김천정·길주정 등 6척의 소해정으로 구성된 제1소해정대를 창설했다. 이어 10월 26일 6척의 소해정을 일본 사세보 미 해군기지로 보내 소해장비를 보강하고, 소해전술을 익히도록 했다. 함정의 무장도 37㎜ 대전차포를 철거하고, 40㎜ 포와 20㎜ 기관포로 교체했다.
또 1951년 1월 6일 YMS급 함정 3척을, 4월 25일 YMS급 함정 3척을 추가로 사세보로 보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제1소해정대는 1951년 1월 3일부터 미 해군 소해정대와 본격적으로 소해작전을 수행하게 됐다. 1951년 7월부터 1953년 7월까지 한국 해군의 기뢰 소해작전 출동은 3462회였으며, 폭파 처리한 기뢰는 1012발에 달했다.
스미스 제독, 강경정 혁혁한 무훈 극찬
중공군의 참전으로 아군의 전선은 서울 이남까지 후퇴했다. 1951년 1월 5일 북한군과 중공군 각 1개 대대 700명의 병력이 인천시를 점거했다. 당시 강경정은 인천해역 봉쇄·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강경정은 1월 11일 적이 장악 중인 인천항에 돌입해 피란민 500여 명을 구출한 뒤 덕적도로 수송했다. 1월 25일에는 인천기계제작소 일대에 함포 사격을 가했고, 인근 도서를 왕래하는 적 범선 10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다.
스미스 제독은 강경정에 인천지구 정보를 요청했다. 강경정은 인천에 특공대를 상륙시켜 적을 생포해 오기로 했다. 1951년 1월 27일 강경정은 단독으로 인천항에 침투해 특공대를 상륙시켰다. 특공대는 적이 구축한 참호 속으로 돌진해 적 47명을 사살하고, 북한군·중공군 각 1명을 생포한 뒤 귀환했다. 미 해군은 특공대가 생포한 적으로부터 중공군 주력부대의 위치를 파악했으며, 적을 공습하는 데 성공했다.
스미스 제독은 ‘Well done to R.O.K. YMS-510’ 전보를 보내고 “이번 510정의 혁혁한 무훈은 전파를 타고 순식간에 널리 알려졌다. 본인은 한국전사에 찬란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 510정의 무훈을 전군에 알리니 각자 더욱 분발하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