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청산리지구 전투 ①(전투배경)
독립군 무장투쟁 의지 ‘활활’
1920년 국내진공작전 1600여 회
中 침략 위해 만주 장악 꾀하던 日
독립군 탄압하려 관동군 확대 개편
청산리 전투 불씨 곳곳서 타올라
청산리지구 전투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엿새간 북간도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다. 흔히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연합부대가 일제 ‘간도침공부대’와 벌인 10여 차례의 대소 전투를 묶어서 말한다. 청산리지구 전투는 백운평 전투로부터 시작해 독립군이 일제 토벌대의 포위망을 벗어나 안전지역으로 철수하면서 종결된다.
이 전투는 한국인의 국토와 국권 회복을 위해 거세게 타오르던 독립전쟁 의지가 중국 대륙침략을 위해 만주 지역에서 영향력 확대를 꾀하던 일제와 전면적으로 충돌한 사건이다. 한국 독립전쟁사의 정점이자 군인 철기에게도 일생 최고의 전투였다. 철기가 군인의 길을 걷고 나서 치른 첫 전투가 최대 영광으로 이어진 셈이다.
이 전투의 연원은 깊고 복잡하다. 일제의 팽창주의가 러시아 혁명과 내전, 중국 동북 군벌의 친일 야합, 대한민국 무장독립투쟁과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봉오동 전투-청산리지구 전투-자유시 참변 등으로 씨줄과 날줄처럼 연결된다.
일제의 만주 장악 기도
일제는 한반도 강제 병탄 후 만주와 몽골 지역을 ‘생명적 이익권’으로 확장한다. 러일전쟁 당시의 이익권은 한반도까지였으나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특히 만주는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기 위한 발판이었다. 만주 지역의 엄청난 콩이나 수수, 탄광과 산림자원 등은 훗날 발생할 중·러·미·영과의 전쟁에 필수적인 병참기지였다.
일본이 만·몽을 일본의 이익선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부터였다. 그러나 그 유래는 더 오래됐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에 한반도를 병탄하기 위해 청일·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이어진 다이쇼 시대는 산둥반도를 집어삼키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했다.
1907년 일제는 만주의 북쪽은 러시아가, 남쪽은 일본의 세력권으로 한다는 제1차 러일협약 비밀조항을 체결했다. 1912년 제3차 러일협약 비밀조항에서는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통과하는 그리니치 동경 116도 27분을 기준으로 만주와 내몽골을 포함한 동쪽은 일본이, 서쪽은 러시아세력 범위로 한다는 내용을 두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직후 가상 적국을 설정해 전쟁준비를 하는 ‘제국국방방침’을 설정했다. 1907년 최초 제정 시 가상 적국 우선순위는 러시아-미국-독일-프랑스 순이었는데, 1918년 1차 개정 때는 러시아-미국-중국 순이었다. 러시아는 부동의 우선순위 1번이었다. 러시아에 대해 주도권을 가지려면 만주 지역 장악이 필수였다. 즉, 중국 영토 할양에는 러시아와 협조하는 척하면서 실제는 전쟁에 대비해 만주를 세력권으로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만주는 일찍부터 일본의 사활적 이익이 걸려 있었다.
1919년 일제는 러일전쟁 이래 점령해온 요동(랴오둥)반도의 관동군을 확대 개편해 ‘관동군사령부’로 승격시켜 만주 지역 장악의 군사기반을 강화했다.
한편, 시베리아 내전 시 체코군대 보호 목적의 다국적 연합군이 출동하자 일제는 이때다 싶어 1918년 8월 1일, 8개 사단 7만여 명의 대규모 병력을 조직해 시베리아로 출병했다.
하지만 체코군대와 다국적 연합군이 모두 철수한 뒤에도 일제는 시베리아에 대한 욕심과 러시아혁명이 중국과 한국에 끼치는 영향을 두려워해 철병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그러나 목적 없이 무의미하게 연해주에 주둔하다 보니 적색 빨치산의 공격 대상이 됐다. 또 연해주의 개방된 유럽식 문화에 노출돼 염군사상이 발생하는 등 군기와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일제에는 군대 주둔 명분과 상황을 반전시킬 대책이 필요했다.
중국과 러시아의 정세
당시 만주의 주인인 동3성 순열사 장작림(장쭤린)의 관심은 오로지 중원으로의 진출이었다. 안직전쟁(1920년 7월 직예군벌 오패부가 안휘군벌 단기서를 꺾은 전쟁) 직후 장작림은 직예파와 한판 대결을 준비했다. 장작림은 비밀리에 일제와 야합했다.
한편, 중국 베이징정부는 일본과 함께 1918년 소비에트혁명군의 극동 진출을 차단하기 위해 공동 방위한다는 비밀군사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으로 북만주, 동내몽골, 시베리아 동부 극동러시아령 지역은 일본군 작전구역이 돼 이 구역 내에서는 일본군이 중국군을 지휘할 수 있게 됐다. 일제는 여러모로 중국과 마찰 없이 간도에서 한국 독립군들을 토벌할 수 있게 됐다.
일제의 가상 적국 1번인 러시아는 남진정책과 함께 새로이 나타난 공산주의 물결로 한국 독립투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제정러시아 이래로 러시아는 동방정책과 아울러 부동항(不凍港)을 획득하기 위해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공을 들였다. 비록 러일전쟁 패전으로 요동반도를 일본에 빼앗기기는 했지만, 끊임없이 만주 지역 진출을 시도했다.
러시아 영토를 가로지르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이어 만주 북방을 지나는 중등철도를 추가 가설해 몽골-북만주의 하얼빈-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해 러시아 세력권에 뒀다. 그리고 다시 하얼빈-여순 중등철도 남부지선(만철)을 가설해 그 지역 일대를 자국 영향권 아래 두려고 했다.
한편, 전통적인 러시아 남진정책과 맞물린 볼셰비키 혁명의 물결도 중국과 일본을 자극했다. 공산혁명의 파급을 우려한 중국과 일본은 공동 ‘방적군사협정’을 맺는다.
이러한 중·일의 방적군사협력은 역설적으로 한국 독립운동가 일부에게 공산주의를 새로운 의지세력으로 인식되게 했다. 또한, 일제에는 독립군을 제거하려는 또 하나의 이유로 작용했다. 반일 공동전선 차원에서 공산주의를 이용 또는 의지하거나, 계급투쟁 그 자체에 매료된 세력도 나타났다.
공산주의의 영향은 향후 한국 독립운동에 커다란 갈등요소가 됐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분열뿐 아니라 청산리지구 전투 후 자유시 참변은 일제를 패퇴시킨 독립군이 동족에게 멸망당하는 비극이었다. 그 분열이 아직도 우리 앞에 남아있다.
독립군의 무장투쟁 격화
1920년 전후 한국의 항일무장투쟁은 더욱 격화됐다. 특히 연해주와 만주 일대의 50여 항일무장단체의 집요한 국내 진공작전은 일제의 한국 식민정책과 향후의 만주 진출에 커다란 가시였다. 청산리지구 전투가 일어났던 1920년의 경우에만도 연인원 4600여 명의 독립군이 1600여 회에 달하는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했다. 독립군은 일제 경찰서와 관공서 공격, 일제 부역자 처단, 군자금 모집활동 등을 벌였다. 또한, 상하이 임시정부의 출현으로 일제는 한국 독립투쟁의 상승작용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는 이에 국경수비를 강화하고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국경 지역에 군사 및 경찰력을 대폭 증강했다. 만주 지역 장악에 앞서 간도 지역에서의 불안정한 상황을 조기에 제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청산리지구 전투의 불씨는 그렇게 곳곳에서 타올랐다. 사진=필자제공
<박남수 철기 이범석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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