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淸 꺾은 日, 英과 손잡고 러 제압… 한반도 침탈 가속

입력 2017. 10. 1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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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영일동맹과 러일전쟁


러와 경쟁하던 英, 日과 동맹 체결

日 국채 사주는 등 재정적인 지원

英 방해로 보급 부족 러 발틱함대

日의 함포 한 방에 힘 못쓰고 침몰

 

러일전쟁 당시 주요 전략적 쟁탈지로 떠올랐던 뤼순. 전후 일본의 해군기지가 됐다 2차 세계대전 후 1955년 중국에 반환됐다. 뤼순의 현재 모습.  필자 제공

 


연해주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이 속해 있는 백군을 상대로 항일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러일전쟁 때 러시아의 적대국이었던 일본은 러시아혁명을 계기로 다시 러시아 백군과 손을 잡게 됐다. 한인 의병들은 일본이 주적이었으므로 혁명군 편에서 일본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이에 앞서 일본과 러시아가 한반도를 놓고 서로 욕심을 내다가 러일전쟁으로 확대된 배경을 살펴보기로 한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으로부터 만주와 랴오둥 반도를 할양(割讓: 국제법상 영토의 일부를 타국에 이전하는 것) 받았다. 그러자 러시아가 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러시아는 프랑스·독일과 함께 일본이 할양받은 랴오둥 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만주와 한반도를 통해 해양 진출을 모색하던 러시아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대륙 진출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삼국의 요구에 열세를 절감한 일본은 결국 할양받은 랴오둥 반도를 내놓고 만다.

삼국간섭을 받아들인 일본은 대륙 진출의 꿈을 가로막은 러시아에 깊은 원한을 품게 됐다. 게다가 러시아는 청나라와 1898년 조약을 맺고 뤼순과 다롄을 조차해 태평양함대 기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00년에는 청나라에서 발생한 의화단 사건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만주 전 지역을 러시아 점령하에 두었다. 다급해진 일본은 영국·미국과 공조, 러시아를 압박해 철군을 약속받는 역삼국간섭을 시도했으나 러시아는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러시아의 의도는 명백했다. 계속 남진해 만주와 조선의 북쪽을 장악해 부동항을 완전하게 관리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더욱 긴장했다. 더구나 조선의 황후는 일본을 멀리하고 러시아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일본은 결국 을미사변을 일으켜 낭인들을 동원,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영일동맹(Anglo-Japanese Alliance).  다음백과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노골적으로 친러정책을 폈다. 일본은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막고 어떻게든 만주 진출의 교두보를 러시아에 빼앗기지 않으려 했다.

1903년 4월 일본의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 총리대신 가쓰라 다로, 외상 고무라 주타로가 교토에 있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별장에 모였다. 이들은 당시 일본의 실세 4인이었다.

네 사람이 그날 회의에서 의논한 내용은 만주에서 러시아의 우월권을 인정하고 조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되 타결이 되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한다는 것이었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러시아 함대가 조선의 39도선 위를 점령하려고 했다. 일본에게는 러시아 함대가 코앞에 주둔하는 것이 엄청난 위기였다. 러시아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강압적으로 일본을 몰아붙였다. 일본은 전쟁을 불사하고라도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했다.

일본은 갈등이 고조되자 1904년 2월 6일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2월 8일 중국 뤼순(旅順)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했고 선전포고는 이틀 후에 했다.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서울에 군사를 진입시켜 한일의정서를 체결, 한국으로 하여금 일본 편을 들도록 하고 한국의 영토를 일본이 편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용의주도하게 러시아와의 전쟁에 대비했다.

그러나 일본의 재정은 전쟁을 치를 만한 능력이 없었다. 이때 영국이 일본을 돕고 나섰다. 러시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영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었고 뒤이어 일본은 재빨리 미국과도 교섭을 시작했다. 일본은 스스로가 막강한 러시아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적당한 시점에 미국이 개입해 전쟁을 끝내달라고 요청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찾아간 가네코 겐타로는 그와 하버드 동문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후에 러일전쟁 강화회담이 포츠머스에서 열린 배경은 바로 이런 인맥 때문이었다.

한편 영국은 영일동맹을 체결한 후 일본의 재정을 돕기 위해 영국계 홍콩상하이은행에서 일본이 발행을 계획한 국채 1000만 파운드 가운데 500만 파운드를 매입해 주었다. 남은 부분은 매수자를 찾지 못하고 있던 중 미국의 유대계 은행가 제이컵 시프가 이를 매입하고 일본의 전쟁 국채 조달을 위한 주간사 역할까지 자진해서 맡았다. 시프는 러일전쟁 동안 일본에 2억 달러를 더 지원했다. 1881년 제정 러시아에서 알렉산드르 3세가 유대인을 심하게 박해하고 러일전쟁 당시 유대인 병사를 총알받이로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목격한 그는 러시아를 증오하고 일본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됐다. 러일전쟁 후 일본 천황이 시프를 초청해 훈장까지 주었다고 한다.

제이컵 시프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일본군은 러시아를 상대로 승기를 잡았다. 러시아의 강력한 발틱함대도 영일동맹의 여파로 긴 항해를 하는 동안 기항지에서 석탄 공급을 받지 못했다. 발틱함대가 대한해협까지 왔을 때는 아무 힘도 발휘할 수 없었고, 일본의 함포 한 방에 침몰해버리고 만다. 러일전쟁 동안 일본과 미국은 이미 한반도를 자기들의 입맛대로 요리하고 있었다.

참고서적: 박환 저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문영숙 저 『독립운동가 최재형』

<문영숙 작가/안중근 홍보대사>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독후감을 공모합니다
공모 대상: 국군 장병 포함 전 국민
작품 규격: 공백 포함 2000자 이내의 한글문서(HWP)
접수처: 인터넷 cjh@choijaihyung.or.kr(응모 시 이름, 소속, 계급, 연락처, 주소 기재 필수)
공모 기간: 11월 10일까지
시상 일시 및 장소: 12월 8일(금)/국방홍보원 회의실
문의: 국방일보 디지털뉴스팀 02-2079-3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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