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최재형, 한인신문사 ‘한인신보’ 방문 시국대담
연추읍 집행위원장 선출 등 러시아혁명 후에도 진보적 사회활동 지속
이동휘와 전로한족대표자대회 고문 선출… 한인 지도자로서 위상 높여
최재형의 연해주촌민회 지지 입장은 러시아 혁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직후인 1917년 12월 23일 자 ‘한인신보’의 ‘최씨의 본사 방문’ 기사에 실려 있다.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얀치혜 남도소 사장 최재형이 한인 신문사를 방문해 시국에 관한 대담을 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리 남도소는 동적에 오른 가구 수가 900여 호인데 투표권 있는 남녀 2995명 중 이번에 투표한 수가 1833명이며, 전쟁에 출정한 장정이 모두 600여 명이요, 군인가족으로 월급 받는 호수가 450호로 매호가 평균 53원을 받는다. 금년에 농사가 잘 됐으므로 민간 생활은 풍족한 모양이다.
2. 기자: 선거는 어느 당을 했으며, 여자들 투표는 어느 정도의 자격을 찾았습니까?
답: 투표는 여러 당으로 했으며, 여자들은 뒷집 아버님이나 앞집 생원으로 한 모양이라고 하면서 웃음.
3. 기자: 고려족 총회의 창립에 관한 효력과 장래에 힘쓸 일은?
답: (최씨는 개탄하면서) 사람이 없다. 물론 공동 일을 하려면 배고프고 등 시린 줄 몰라야 할 터인데, 돈 있는 자는 돈을 더 벌려고 욕심내고, 없는 자는 먹을 것이 없어 일을 못 한다. 우리 늙은 사람은 시대에 뒤진 사람이라 새 일은 새 인물을 요구한다. 또 우리 마을에 이어 한인의 중심 될 만한 지방은 소왕령(우수리스크)이다. 지금 한인의 호수가 1000여 호가 되니 한 집에 두어 량씩 내어도 한인 교육엔 염려가 없다.
4. 기자: 아령 한인의 중심적 단체는 고려족 총회로 할 것인데 끝까지 힘을 써야 하지 않을까요?
답: (최씨는 일 볼 사람이 없는 것을 근심하면서) 오는 연말 총회에 참석할 것을 기약한다. 이번 대의사 투표에 한인대표가 없는 것을 개탄한다. 이번 연해주 투표에 1만5000명에 한 사람씩 피선되니 우리 한인으로서는 투표권이 있는 자가 이 수에 못 미친다. 그러므로 연약한 연해주 농민대표회 대의사에 우리가 세 개의 조건으로 일전에 부탁했다.
(1) 우리 한족은 시베리아 정부의 독립을 찬성할 일
(2) 시베리아가 독립되면 한족대표 두 사람을 선거에 참여케 할 일
(3) 아령에서 5개년 이상 거주한 한인에게는 입적과 관계없이 토지소유권을 줄 일
위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워 농민회 대표는 이번 국회에 가서 허락을 받아내겠다고 말했다.
최씨는 마을의 교육 정도를 묻는 기자에게 세 학교의 관계와 학생 수를 말했다.
최씨는 학교에서 아무리 잘 가르쳐도 감독이 없으면 어린아이들에게 별 효력이 없다고 한다. 최씨는 한인 가운데 법률지식이 있는지를 가려 변호사를 두고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이 한인들에게 급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 대담 내용을 보면, 최재형이 얀치혜 사장으로서 한인들의 세세한 일상까지 전부 파악하고 있으며 여러 문제에 대해 한인 지도자로서 관심의 폭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를 헤아릴 수 있다.
러시아 혁명 후에도 선생은 꾸준하게 진보적인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계속했다. 1917년 7월 7일 자로 된 일본 외무성의 첩보자료에는 일반선인(鮮人)의 고로(古老)로 추앙받고 있는 선생이 귀화선인단(歸化鮮人團)의 대표자로서 6월 29일 블라디보스토크 노병소비에트를 방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또한 연추읍의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러시아의 혁명은 2월 혁명과 10월 혁명에 이르는 동안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 바로 다음 해인 1918년 1월 11일에 개최된 고려족중앙총회에서는 고려족 대표로 얀치혜 남도소 사장이며 우수리스크 의원인 최재형을 시베리아 독립정부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1918년 6월 13일부터 24일까지 우수리스크에서 제2회 전로한족대표자대회가 개최됐다. 러시아 각 지역의 대표 129명이 참석한 이 대회에서 최재형은 이동휘와 함께 고문으로 선출돼 한인의 대표적인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나타냈다. 그러나 10월 혁명 후인 1918년 여름 체코군의 봉기를 계기로 일본군이 무력 개입했고, 선생의 집이 있던 슬라비얀카에도 일본군이 상륙하게 되자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선생의 부인은 옷가지, 침대, 귀중품만 가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왔다. 이어 선생의 가족은 일본군을 피해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주했는데, 여기서 선생은 군 자치회의 의원과 검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참고서적: 박환 저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최재형』, 문영숙 저 『독립운동가 최재형』
‘잊혀진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독후감을 공모합니다
공모 대상: 국군 장병 포함 전 국민
작품 규격: 공백 포함 2000자 이내의 한글문서(HWP)
접수처: 인터넷 cjh@choijaihyung.or.kr(응모 시 이름, 소속, 계급, 연락처, 주소 기재 필수)
공모 기간: 2017.10.10~11.10
시상 일시 및 장소: 2017.12.8(금)/국방홍보원 회의실
문의: 국방일보 디지털뉴스팀 02-2079-3831
<문영숙 작가/안중근홍보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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