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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해군이 목숨 걸고 지켜온 해상 경계선 그날처럼… NLL을 사수한다

윤병노

입력 2017. 06. 30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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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북방한계선과 서해 3대 승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 직후 우리나라와 북한 사이에는 ‘휴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군사분계선(MDL: Military Demarcation Line)’이 설정됐다. 그렇다면 해상 경계선은 무엇일까? 바로 북방한계선(NLL: Northern Limit Line)이다. NLL 설정 배경과 의미, 이를 인정하지 않는 북한의 도발로 발생한 ‘서해 3대 승전’을 소개한다.


北, 20년간 문제 제기 없이 NLL 인정

정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군과 북한군은 한반도 육지에 대한 군사분계선 설정에 합의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해역의 경계에 관해서는 합의하지 못했다. 북한은 전략적 요충지인 ‘서해 5개 도서(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를 차지하기 위해 MDL을 기준으로 해상 경계선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1953년 8월 30일 한반도 해역에서 남북한 충돌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서해 상에는 서해 5개 도서와 북한 지역의 개략적인 중간선을, 동해 상에는 MDL의 연장선을 기준으로 NLL을 설정해 북한에 선포했다. 이후 NLL은 남북한의 실질적인 해상 경계선 역할을 했다.

NLL 설정은 북한에 매우 유리한 조치였다. 당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의 전 해역을 장악했고, 북한 해군은 괴멸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북한은 NLL 덕분에 해상봉쇄 우려에서 벗어나 해상안전을 확보했다. 또 NLL 이북 도서에 대한 군사통제권을 보장받았으며, 함정과 민간선박의 항해와 어로 활동의 자유를 누렸다. 이로 인해 북한은 1973년 12월까지 20년 동안 어떤 문제 제기나 이의 제기 없이 NLL을 인정·준수했다.



북한의 어떤 도발에도 단호히 대응

북한이 1959년 11월 발간한 ‘조선중앙연감’에는 황해남도 해역과 서해 5도를 나타내는 지도가 실렸다. 북한은 서해 해상의 NLL을 그려놓고, 이를 ‘군사분계선’으로 표기했다. 이는 북한 당국이 NLL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해상 군사분계선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공인한 결정적 증거다.

1963년 5월 개최된 군사정전위원회 제168차 본회의에서는 NLL을 침범한 북한 간첩선 격퇴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다. 이와 관련해 유엔사 측은 “간첩선이 NLL을 침범했기 때문에 사격했다”고 항의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우리 함정이 NLL을 넘어간 적이 없다”고 맞섰다. 북한군의 이러한 언급은 NLL을 인정하는 발언이었다.

1992년 발효된 남북기본합의서에서도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해상 경계선을 설정하기로 합의했다. 국제법에서는 조약을 통지받은 지 12개월 내 이의가 없으면 이를 수락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북한은 NLL 설정 이후 20년 동안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북한은 최근 12해리 영해 입장에 따라 서해 5개 도서의 주변 수역이 자신들의 영해라는 억지 주장을 펴고 있다. 또 NLL 무실화를 목적으로 NLL을 침범하고 있다.

NLL은 우리 해군이 목숨을 걸고 지켜온 실질적인 해상 경계선이다. 해군은 앞으로도 ‘NLL 존중·준수’ 원칙을 확고히 견지하고, 북한의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히 대응할 계획이다./사진=해군2함대 제공


● 北 경비정 NLL 침범 ‘서해 3대 승전’

제1연평해전  북한군 어뢰정 1척·함정 5척 대파

 


1999년 6월 15일 북한 경비정 4척이 서해 NLL을 침범했다. 이어 북한 경비정 3척이 추가로 NLL을 넘어와 앞서 침범한 4척과 함께 우리 고속정에 충돌공격을 감행했다. 우리 해군은 ‘후미 충돌에 의한 밀어내기 작전’으로 맞대응했다.북한 중형 경비정이 기관포와 소화기로 선제공격하자 우리 해군도 자위권 차원에서 즉각 응사했다. 치열한 전투는 우리 해군의 압승으로 종결됐다. 우리 해군은 북한군 어뢰정 1척을 침몰시키고 5척의 함정을 대파했다. 북한군은 최소 30여 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우리 해군은 초계함 1척과 고속정 4척의 선체가 일부 파손됐으며, 장병 9명이 경상을 입는 데 그쳤다.

제2연평해전  윤영하 소령 등 6용사의 숭고한 희생

 

한·일 월드컵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2002년 6월 29일 제2연평해전이 벌어졌다. 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 2척은 근접 거리에서 차단기동을 펼치던 우리 해군 참수리 357정을 조준 사격했다. 기습사격을 받은 참수리 357정의 주요 지휘체계가 훼손됐다. 그러나 승조원들은 당황하지 않고 사격시스템을 수동으로 전환해 반격했다. 이 전투로 윤영하 소령과 한상국·조천형·황도현·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 당했다. 북한군은 3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알려졌으며, 경비정은 화염에 휩싸인 채 도주했다.

우리 해군은 전사자들의 투철한 군인정신을 기리기 위해 유도탄고속함 1~6번 함을 이들의 이름으로 명명한 후 최전방 해상에 작전 배치했다.

대청해전  교전규칙 따라 응전…北 경비정 격퇴


대청해전은 2009년 11월 10일 대청도 동방 해상에서 북한 경비정이 NLL을 침범해 발발한 전투다. 북한 경비정은 이날 어선통제를 빌미로 NLL을 넘었다.우리 고속정은 교전규칙에 따라 경고통신과 경고사격을 했다. 그러자 북한 경비정은 우리 해군 참수리 325정에 함포 50여 발을 조준 사격했다. 이 중 15발이 참수리 325정 좌현 외부 격벽에 떨어졌다.우리 해군은 즉각 대응사격을 했다. 현장에 도착한 호위함도 격파사격에 동참했다. 북한 경비정은 우리 해군의 대응사격에 손상을 입어 검은 연기와 화염에 휩싸인 채 NLL 이북으로 퇴각했다.


※그동안 ‘그것이 알고 싶다’를 사랑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코너를 마치고 7월부터는 새로운 주말 기획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윤병노 기자 < trylover@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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