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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는 꿈이었고 아버지와의 약속이며 국가에 대한 보답”

김가영

입력 2017. 06. 14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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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육군전투지휘훈련단 김 태 영 소령


레이더 기지서 정비 중 순직한 아버지

해발 1100m 넘는 기지로 향할 땐

힘드셨을 아버지 생각에 가슴 아파

 

순직 25기 맞아 사고현장에서 위령제

기지 대원들께 감사… 자부심 깊어져

 


 

 



“25년 전 아버지의 사고 소식을 알려 주시던 주임원사님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것 같습니다. 비록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조국의 도움 덕분에 무사히 학교를 마친 후 저의 어린 시절 꿈을 이루고, 장교가 되겠다는 아버지와의 약속도 지켜 참 행복합니다.” 육군전투지휘훈련단 김태영(41·3사 35기) 소령은 할아버지인 고(故) 김종훈(육사8기) 중령, 아버지 고(故) 김명수 공군 준위에 이어 3대째 군 간부의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김 소령이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하는 과정에는 남다른 고통과 고민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김 소령이 고등학교 1학년 때 임무 수행 도중 순직했기 때문이다.

“1992년 3월 11일 저녁이었죠. 아버지께서 출장에서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던 우리 가족은 청천벽력 같은 사고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했습니다. 공군군수사령부 예하 통신전자장비 정비부대 소속이셨던 아버지께서는 경상북도의 레이더 기지에서 감독관으로서 레이더 교체 작업을 직접 점검하시던 중 레이더의 철제 빔이 떨어지면서 순직하셨습니다.”

20년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김 소령의 목소리에 깊은 슬픔이 묻어났다. 어린 마음에 ‘왜 당신이 직접 하시지 않아도 될 일을 하셔서 돌아가셨느냐’며 답도 들을 수 없는 원망을 수없이 했다고 한다. 전국의 레이더 기지 장비를 정비하느라 한번 출장에 나서면 한 달 가까이 집을 비울 정도로 바빴지만, 든든한 가장이었던 남편을 잃은 어머니의 충격도 클 수밖에 없었다.

순직 1주기를 맞아 사고 현장에서 위령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도 참석을 거부하셨다. 차마 사고 현장을 볼 수 없었으리라. 그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으리라. 군에서 아버지를, 남편을 잃은 김 소령과 어머니에게 ‘군’은 슬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그런 외면도 오래가지 않았다. 김 소령에게 군은 꿈의 무대였기 때문이었다.

 

육군전투지휘훈련단 김태영 소령이 지난 3월 11일 아버지 고(故) 김명수 공군준위가 임무를 수행하다 순직한 공군 레이더기지를 찾아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김태영 소령 제공

 


“어린 시절 아버지를 보면서 군인의 꿈을 키웠습니다. 부사관 생활을 거쳐 준위가 되신 아버지를 위해 장교가 되고 싶었거든요.”

국가에 대한 고마움도 어린 시절 꿈의 불씨를 되살리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비록 불행한 일을 겪었지만, 어머니께서는 주부로서 김 소령과 여동생의 양육에 전념하며 안정적으로 가정을 꾸려갈 수 있었다. 순직자 가족을 위한 연금 덕분이었다. 김 소령과 여동생 역시 보훈 장학금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대학까지 마칠 수 있다.

국가유공자 자녀로서 단기(6개월)로 병역 의무까지 다했지만, 군인의 길에 대한 미련은 계속 남았고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장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반대하시던 어머니도 그의 오랜 꿈을 알기에 나중에는 육군3사관학교 모집 공고가 났다며 알려 주실 정도로 응원을 보내셨다. 아들을 앞세웠던 할아버지께서도 그를 격려하시며 그동안 숨겨왔던 당신의 군 생활 경험을 들려주셨다. 덕분에 김 소령은 그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셨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할아버지가 실은 6·25전쟁 당시 영천지구전투에 참전하셨고 충무·화랑 무공훈장을 받은 전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처럼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쳐 장교가 됐고 누구보다 열심히 군 생활을 하던 그는 얼마 전 눈물겹도록 감사한 일을 경험했다. 아버지가 순직하셨던 레이더 기지에서 그동안 한 해도 빠짐없이 아버지의 위령제를 지내온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것. 순직 25주기를 맞아 지난 3월 처음으로 사고 현장을 찾아 위령제에 함께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버지를 위해 차례상을 준비하는 기지 부대원들을 보면서 너무 늦게 찾아간 것 같은 죄송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군 생활이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늘 열심히 사셨던 아버지를 더 챙기지 못하고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에 가슴도 먹먹해졌지요. 제게 아버지의 마지막을 기억할 기회를 주시고 근무자들이 수없이 바뀌는 와중에도 매년 위령제를 통해 아버지를 기억해 주신 기지 관계자들께 감사드립니다.”

위령제에 참석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 자부심도 깊어졌다.

“해발 1100m가 넘는 기지로 향하는 길은 얼마나 멀고 험한지, 20여 년 전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춥고 힘든 곳에서 마지막 작업을 하셨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대전으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께서 잠들어 계신 국립대전현충원을 틈날 때마다 찾는다는 김 소령은 앞으로의 군 생활 각오를 묻는 말에 3사관학교 면접 당시 했던 말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때 면접관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병역 의무도 다했는데 왜 지원했느냐고. 그래서 이렇게 답했지요. 장교는 어린 시절 ‘꿈’이고 아버지와의 ‘약속’이며 그동안 국가의 도움을 받아 살아온 데 대한 ‘보답’이라고요. 지금까지 꿈과 약속, 보답을 위해 열심히 근무했듯이 앞으로도 면접 때의 마음 그대로 생활할 겁니다.”

김가영 기자 < kky7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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