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淸, 푸른 눈 선교사 마테오 리치 ‘공자’ 받들듯

입력 2016. 12. 15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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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열린 마음으로 세계를 보라


“허생전·호질 내 작품 아니다” 변명

위정자 전횡에 날개 못 펴고 살았던 천재의 비극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워

 

괴상한 관측기계, 사람 마음 얼떨떨

연경에서 본 천주당 내벽·천장 성화

평범한 말·글로 형용하기 힘든 경험

 

 

 

마테오 리치 초상화.

 

 

 

 

‘허생전’

1780년 9월 18일부터 10월 14일까지 연암은 연경에 체류했다. 약 1개월 동안 그는 사절단 일행과 흉금을 터놓고 얘기를 나누었으며, 청나라 수도의 명소들을 부지런히 관찰했다. 연암은 이를 다섯 편으로 구분해서 열하일기에 수록했다.

‘옥갑야화(玉匣夜話)’편은 ‘옥갑’이란 숙소에서 수행원들과 나눈 대화의 기록이다. 예전에 조선 통역관들이 재물을 모은 비법, 중국 기생에게 호의를 베풀어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 등이다.

이 자리에서 연암은 19살이던 1756년에 윤영이라는 노인에게 들었던 일화(逸話)를 들려준다. 바로 우리에게 친숙한 ‘허생전’이다.

“서울 남산의 가난한 선비 허생이 갑부 변씨에게 빌린 만 냥으로 과일과 말총을 매점매석해서 큰돈을 번다. 이 돈으로 도둑들을 무인도에 모아서 농사를 짓게 하고, 곡식을 일본에 수출해서 더 많은 재화를 얻는다. 이후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빈민을 구제한다. 소문을 듣고 (북벌계획을 수립하던) 어영대장 이완이 찾아오지만, 허생은 그의 어리석음을 개탄하며 쫓아버린다.”

열하일기의 ‘허생전 붙임 글’에는 1773년 연암이 80세가 넘은 윤영을 다시 만났는데, 노인은 자기 이름이 신색이라고 우겼다고 한다. 또한 몇 년 후, 경기도 광주의 절에 아흔이 넘은 이생원이란 도인(道人)이 산다는 소문을 듣고, 윤영이라는 생각에 찾아갔으나 못 만났다는 기록도 있다.

연암은 열하일기에 실린 두 편의 단편소설 ‘허생전’과 ‘호질’이 자기 창작물이 아니라고 변명한다. ‘허생전’은 이름이 불분명한 노인에게 들은 얘기고, ‘호질’도 이름 모를 중국인의 작품을 베낀 것이란다. 위정자(爲政者)의 전횡 때문에 날개를 못 펴고 살아야 했던 천재의 비극을 보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


연암이 들렀던 천주당.

 

 

 

천주당의 성화(聖畵)

‘황도기략(黃圖紀略)’편은 연경의 관광명소에 관한 간략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서양인의 뛰어난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천주당과 서양화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청나라로 출발하기 전에 연암은 홍대용으로부터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김창업 같은 선배들이 중국을 올바로 관찰하고 훌륭한 기록을 남겼으나, 가장 중요한 볼거리인 천주당의 오르간에 대한 설명이 미흡하다는 것이었다.

연경에는 네 개의 천주당이 있는데 오르간이 있는 곳은 선무문 안의 천주당이니 꼭 가서 오묘한 소리를 들어보라는 홍대용의 조언을 마음에 간직했던 연암은 열하에서 연경으로 돌아온 즉시 천주당을 찾았다. 그러나 1769년 천주당의 화재로 오르간이 불타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오르간 구경은 못 했지만, 연암은 천주당에서 남다른 경험을 한다. 그것은 천주당의 내벽과 천장에 그려진 성화였다. 연암은 원고지로 8장 정도의 감상평을 남겼는데, 그 시작은 다음과 같다.

“구름과 인물들이 웬만한 지혜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으며, 평범한 말과 글자로는 형용하기 힘들다. 눈으로 보려고 하자, 그림의 형상들이 번개처럼 번쩍이며 먼저 내 시선을 빼앗고 가슴속을 환하게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귀로 들으려고 하자, 굽어보고 돌아보며 먼저 내 귀에 무언가 속삭이며, 내 몸의 은밀한 곳을 꿰뚫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입으로 말하려 하자,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우레 소리를 내는 듯했다.”

연암보다 6년 후, 독일의 문호 괴테는 약 2년간의 이탈리아 여행 중에 10개월간 로마에 체류했다. 1786년 11월 22일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을 처음 방문한 후 그는 수차례 그곳을 찾았는데, 미켈란젤로의 명화 ‘최후의 심판’에 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감상평은 아래의 세 구절이 거의 전부다.

“그저 경탄할 따름이며, 거장의 내면적 확신과 남성적인 힘, 위대함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미켈란젤로만큼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나는 이 그림을 내 마음속에 단단히 붙들어 놓고 싶을 뿐이다!” “시스티나 성당을 보지 않고는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없다.”

아! 연암이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을 보았더라면 과연 어떤 감상평을 남겼을까?

연경의 관상대.

 


마테오 리치 묘비. 필자 제공

 

 


관상대와 마테오 리치

‘알성퇴술(謁聖退述: 공자 사당 참배 후 쓰다)’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관상대는 해와 달,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 바람과 구름, 기후의 변화를 살피는 곳으로 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있다. 수위가 막아서 올라가지 못했으나, 혼천의 혹은 선기옥형이라는 천문기구가 있다고 한다. 아래에는 흠천감(欽天監)이라는 관청이 있으며, ‘관찰유근(觀察惟勤: 관찰은 부지런함에 달려 있다)’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렸다.

흠천감 뜰에는 구리로 만든 관측 기계들이 놓였는데, 모양이 괴상하여 사람의 마음과 눈을 얼떨떨하게 만든다. 그중에 내 친구인 정철조의 집에서 본 기계와 유사한 것이 있었다. 언젠가 홍대용과 그의 집에 갔는데, 둘은 문외한인 내가 듣는지 잠을 자는지 개의치 않고 천문학 얘기로 밤을 지새웠다.”

감나무 잎(葉·엽)에 글을 써서 항아리(앙·앙) 안에 넣었다가 책으로 엮었다는 고사에서 이름은 딴 ‘앙엽기(앙葉記)’편에는 연경의 서양 선교사 합동묘역을 찾은 기록이 보인다. 연암은 마테오 리치(Matteo Ricci·1552~1610)의 묘비에 주목했으며, ‘앙엽기’에는 ‘耶蘇會士利公之墓’(야소회사이공지묘)라는 묘비명과 마테오 리치의 이력이 소개됐다.

천주교에 대해 비판적이던 연암은 왜 선교사 묘역을 찾았을까? 연암은 마테오 리치가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의 한문 번역서인 ‘幾何原本’(기하원본)이 발간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으며, 이 책에 서양화 기법도 소개됐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마테오 리치를 공자처럼 예우하는 청나라 위정자들의 열린 마음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 선교사 묘역은 1900년 의화단 운동 때 파손됐다가 복구돼 현재 북경행정학원 내에 있으나, 마테오 리치 묘비는 옛 모습이 아니며, 연암이 보았던 묘비는 탁본으로 남아있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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